- 책을 읽으며

ena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7.1.31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읽으며 많은
띠지를 붙여놓았다. 대출한 책으로 밑줄을 긋지 못하고, 나중에
기억하기 위한 방식이다. 만약 마음대로 줄을 그을 수 있었다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 내 밑줄이 그어졌을
것이다.
그 중 한 부분이다.
“죽음에 관한 우리의 현대적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에 그(몽테뉴)가 있다. 그는
고대 세계의 현명한 본보기들과 우리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현대적으로, 원숙하게, 종교를 초월해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로 이어준다.
‘Philosopher, c’est apprendre ámourir.’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몽테뉴는 키케로를 인용하고, 키케로는 이어서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한다. 죽음에 관한 그의 박학한 면모를 드러내는 유명한 저서들은 금욕주의적이고 문학적이며 일화가 많고 경구적이고 (어쨌거나 그가 의도한 바대로) 위안을 준다. 더불어 절박하다.” (71~72쪽)
그러고보니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몽테뉴 평전의 제목이 바로 “위로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줄리언 반스가 몽테뉴를 죽음에 관한 사유로
읽는 것과는 달리 슈테판 츠바이크는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그리고
관용의 정신을 강조했다. 기억하는 바로는 몽테뉴를 죽음에 관한 사유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몽테뉴가 ‘죽음에
관한 현대적 사유’의 시작이라고 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읽지는
않았지만 기억만 하는 그의 작품 『수상록』이
수필, 혹은 에세이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유는
필연코 죽음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다다를 데는 거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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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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