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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a
- 작성일
- 2018.1.28
비둘기
- 글쓴이
-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열린책들
“그것이 그의 문 밖에 앉아 있었다. 문지방에서 불과 2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의 창백한 역광을 받으며 있었다. 납회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의 타일 위에, 빨간색이며 갈퀴 발톱을 한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둘기였다.”
조나단 노엘이 방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비둘기 따위에 기겁을
하고, 결국은 자살까지 생각하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다만 그랬다는 것이다. 신산했던 어린 시절 이후
나름 평온하게 보내온 20여 년의 세월을 망가뜨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아니, 비둘기 따위가 뭐라고 그렇게 화들짝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왜 그랬는가가 아니라 그 이후 그의 삶, 단 하루의 삶과 그 하루 동안 그의 의식이 어떻게 망가졌나
하는 것이다.
비둘기를 피해 가까스로 자신의 집에서 나오고 난 후 평생 하지
않던 실수를 하고, 그 실수에 직장에서 쫓겨날 걱정을 하고, 결국은
다음 날에는 자살을 하리라 결심을 한다. 말하자면 거의 서술하지 않을 정도로 평안했다고 하는 그의 수십
년의 세월이 그만큼 연약했던 것이다. 겨우 비둘기 때문에 완전히 부정당할 정도로.
그런데 그게 조나단 노엘이라고 하는 중년의 독신남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비록 비둘기는 아닐지라도 그 무엇, 하찮은 것 하나
때문에 산산조각 나거나 완전히 헝클어져 버릴 정도로 허약한 게 우리 삶이 아닐까? 문득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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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