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지폐를 지갑에 넣고 세계를 여행한다. 이처럼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셰저칭의 『지폐의 세계사』를 손에 든 이유는 그걸 직접 할 수는 없으니 간접적으로나마
맛보기 위한 마음이 있어서였다(책을 읽는 이유 대부분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이 사람이 들고 있는 지폐는 여행하기 위한 지폐가 아니다. 여행
중에 만난 지폐이고, 역사 속에서 만나는 지폐이고, 미술
작품을 통해 만나는 지폐다. 그래서 맘껏 지폐를 뿌리고 다니며 여행할 수는 없어도 지폐를 통해서 세계
곳곳을 살펴볼 수는 있다.  

지폐를 통해 만나는 세계와 역사는 다른 지리책이나 역사책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이를테면 콜럼버스에 대해 얘기를 하더라도 지폐를 통해 얘기를 하면 그에 대한 애증(愛憎)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는 쉽게 만나지 못하는 나라들도 만난다. 페로제도라든가, 기니비사우, 에르트리아, 루마니아, 상투메
프린세페 같은 나라, 혹은 지역에 대해서 어디 다른 데서는 쉽게 들어나 봤겠나 싶다. 돈은 어느 나라나 있는 것이니 지폐는 전 세계를 구석구석 바라보는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적절한 도구인 듯 싶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각국의 지폐가 (놀랍게도!) 천편일률적이지 않다는 데서도
나오는 덕목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다양한 지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데서는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고, 어떤 데서는 정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어떤 데서는 문학 작품을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지폐 얘기로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어떤 데서는 전혀 지폐 얘기를 하지 않고 그 국가에 대해서만, 혹은 미술 작품에 대해서만, 인물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야 간신히 몇 줄 지폐에 대해서 쓴다. 말하자면 제목이 ‘지폐의
세계사’(원제는 ‘The Art of Money’)이지만
거기에 절대적으로 얽매이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자유로이 옛날 지폐들을 감상하며 편안하게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떤 대목에서는 긴장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부룬디와 르안다의
역사에서 그렇고(그 역사가 고스란히 그들의 지폐에 담겨 있다), ‘오웰적인’ 부조리의 나라라 칭한 미얀마의 지폐를 보면서도 그렇다. 한 뭉텅이로
묶어놓은 북한과 이라크, 리비아의 경우에도 그렇게 편안하게만 그들의 지폐를 감상할 수는 없다. 루마니아의 통곡도 그렇고, 알제리의 허무도 그렇다. 놀랍게도(이 말을 여러 번 쓰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모두 지폐에 담겨 있다.

이제 지폐(특히 외국의 지폐)를
보게 되더라도 거기의 인물, 혹은 그림, 도안 등이 어떤
것인지를 볼 것 같다. 그리고 그게 그 나라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지폐에 쓰이게 되었는지도 생각할
것 같다.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들이다. 물론
그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더욱이 유로화로 통일되어버린 유럽에서는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