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ena
- 작성일
- 2019.4.5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 글쓴이
- 정철현 저
북드라망
스티븐 제이 굴드의 유명한 문장인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를 제목으로 삼은 이 책은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한 해설서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책의 저자 정철현에게만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특별한 존재다. 진화에 대해 처음
배운 것도 굴드에게서라고 할 수 있고(『다윈 이후』), 그의
부음을 거의 실시간으로 듣기도 했다(미국 미생물학회 개회식장에서였다).
번역된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전작(全作)주의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아마 한 저자의 책을 모두 읽는 건
굴드의 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암사에서 그의 자연사 에세이를 모두 번역할 계획이라는 소식에
환호를 했고, 그게 중단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실망했다.
그런 굴드에 대한 책이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철현은 굴드의 생명에
생각, 이론을 11개의 키워드로 정리하고 있다: 팡글로스 패러다임, 역사적 제약,
중복성, 굴절적응, 단속평형, 발생학, 대폭발과 대멸종, 불연속성, 구조적 제약, 우연, 역사적
과학. 이 개념들은 모두 굴드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긴 하지만 조금은 중복되어 있다. 다시 몇 가지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줄인다면, 굴절적응(exaptation), 단속평형(punctuated equilibrium), 우연성(contingency)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들은 굴드의
진화 이론에서 나온 그의 총체적인 생명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윈의 진화 이론을 보완하고, 신종합론을 반대하고, 더 중요하게는 창조론을 배격하는 개념들이고
생명에 대해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개념들이다. 비록 그의 정치적 입장(사회생물학 등에 대한 반대 입장 등을 포함하여) 같은 것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은 이러한 굴드의 개념들에 대해 아주 잘 정리하고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우선 저자 스스로 자신의 소망을 저버리고 있다. 저자 정철현은 책날개의
저자 소개에서부터 굴드에 대한 경의를 잔뜩 담아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공부하고 글을 쓰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굴드의 공부 방식, 글을 쓰는 방식은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굴드는 한 편의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 1차 저작을 읽었다. 그리고
그의 글은 처음에는 비유적으로 시작했다가 중간 이후부터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엇을 얘기하는 글인가 싶다가 결국은 그런 비유와 인용이 얼마나 적절하고 예술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정철현은 그 어느 것도 여기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굴드는 과학자로서 많은 책과 논문을 남겼다. 그런데 정철현이 인용하고 있는 것은 에세이가 대부분일 뿐더러, 그것도
‘번역되어 있는’ 것뿐이다(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은 자연사 에세이집이 몇 권 있다). 적어도 굴드를 이야기한다고
했으면 독자들이 쉽게 읽지 못하는 책도 읽고 분석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적인
굴드의 국내 독자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는 것 아닌가. 굴드의 자연사 에세이를 1차 저작이라고 치더라도 너무 한정적이다. 거기다 너무 굴드의 책에’만’ 의존하고 있다. 다윈을
인용하더라도, 자크 모노를 인용하더라도 직접 찾아서 인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굴드의 책에서 찾아 인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굴드의 공부 방식은 아니다.
좀더 문제라고 생각되는 건, 저자가 상정하고 있는 현대생물학, 현대진화학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현대생물학과 현대
진화학은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 굴드가 비판했던 생물학, 진화학일 뿐이다. 굴드가 자연사 에세이를 수십 년간 300편을 썼지만, 그건 최근이라야 1990년대의 일이다. 그가 당대의 생물학적 발전, 발견에 안테나를 들이대고는 있었지만, 종종 놓치는 일도 있었고, 그 후로 생물학은 놀라운 발전을 했고, 개념적 전환을 하고 있다(대표적인 것인 ‘junk DNA’에 관한 것이고, 발생학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굴드 당시 비판의 대상이던 생물학과 진화학을 그대로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다. 굴드에 대해서 쓰니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극복해가고 있는
대상을 과거의 모습을 상정해놓고 비판하는 것은 굴드의 생각 자체를 구닥다리처럼 만드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당시
생물학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고, 굴드가 그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보여주었을 때 굴드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도 저자의 (생물학) 공부가 부족해서라고 밖에 할 수 없지 않나 싶어 안타깝다. 굴드가
가설적으로 예측했던 것이 그 이후 증명이 되었는지 반박되었는지 찾아보았는지 궁금하다. 일부는 증명이
되어 굴드의 혜안이라고 칭찬받고, 또 일부는 반박되기도 하고 있다.
굴드와 굴드의 글을 정말 좋아하기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 같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임을 알지만, 한 권의 책이
가치를 가지려면 정말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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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