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ena
- 작성일
- 2020.6.9
감염의 전장에서
- 글쓴이
- 토머스 헤이거 저
동아시아
항생제 또는 항균제(영어로는 antibiotic 또는 antimicrobial agent)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세균을 죽이는 약’이면 다 항생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좁은 범위의 정의를 보면 ‘어떤 미생물에서 만들어진, 세균을 죽이는 물질’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미생물이란 세균이 될 수도 있고, 곰팡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항생제라 부르며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물질 중에는 미생물에서 나오지 않은, 실험실에서 합성해낸 물질이 적지 않다. 그것들을 이용해서 세균을 죽이는 데 사용하는데 굳이 항생제의 범위에서 배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최초의 항생제는 공식적으로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이다. 그런데, 이 최초라는 타이틀은 조금 논란이 있다. 우선 페니실린과 똑같은 물질을 발견한 전례가 있다. 그냥 그런 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넘어간 게 아니라 그 물질의 세균 사멸 효과까지 알았었다. 프랑스의 뒤셴이라는 청년의 이야기인데, 그는 심지어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잊혀졌고, 약으로 만들어진 건 플레밍의 발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무 논란 없이 플레밍의 페니실린이라고 해도 괜찮을까? 그것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그에 관한 에피소드는 너무 유명하니 생략) 1928년이고, <영국병리학회지>에 발표한 것은 1929년이다. 그러면 그후 바로 약으로 쓰였거나 약 개발에 힘을 썼을까? 아니다. 그의 발견도 잊힐 뻔했다. 옥스퍼드대학의 플로리와 체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플로리와 체인은 도서관에서 잊혀져가던 플레밍의 논문을 찾아내 가능성을 보았고, 갖은 노력 끝에 치료에 쓰일 수 있도록 페니실린을 순수분리했다(플로리와 체인이 찾아가서 문의했을 때 플레밍은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플레밍을 더 많이 기억한다. 아니 플레밍만 기억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논란이 있다. 플레밍, 플로리, 체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45년이다. 그러면 그들이 항생제 개발의 공으로 노벨상을 받은 게 최초였을까? 아니다. 1939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에 지명된 것은 독일의 연구자 게르하르트 도마크였다. 그는 설포닐아마이드, 즉 설파제 개발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노벨상에 지명되었다. 그 당시는 나치가 노벨상을 거부하던 때로 나치에 의해 수상 포기 종용을 받았고 실제로 수상한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가 되었지만, 그리고 그 물질이 세균 감염 치료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1934년 경의 일이지만, 어쨌든 노벨상 수상 년도는 페니실린보다 더 먼저였다. 이 설파제, 상품명으로는 프로톤질(protonsil)이 바로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합성 항생제였다. 그래도 최초의 항생제라는 타이틀은 플레밍의 페니실린이지만, 그 역사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염의 전장에서》(이 우리말 제목은 지금 상황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바로 도마크의 설파제에 관한 이야기다. 도마크에 대해 현재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파고들만한 소재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전개된다. 우선은 세균 감염의 무서움이다. 지금이야 코로나-19로 바이러스 감염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지만, 1차 세계대전 즈음만 하더라도 세균 감염이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전쟁에서 총칼에 의해 직접 죽는 병사보다 전쟁 도중 어떤 방식으로도 세균에 감염되어 죽는 숫자가 더 많았다. 실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거의 죽을 뻔한 위험에서 살아나 의학을 전공하고, 세균 감염 정복을 위한 길에 나선다. 물론 그 전부터 그 길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들이 있었다. 세균설을 확립한 파스퇴르와 코흐를 비롯하여, 매독 치료제를 최초로 개발한 에를리히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특히 염색산업이 발달했던 독일에서는 염색약을 이용하여 세균 감염 치료제를 개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게 되는데, 그것은 세계 최초의 대규모 기업 수준의 연구개발 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연구개발 사업의 한 가운데에 도마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실제 설파제, 프로톤질 개발의 과정이다. 가능성이 보이는 염색약에 이저러저런 작용기를 붙여보고, 그것들은 변환시키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약효를 관찰하는 것이다. 도마크는 바이엘사의 화학자들이 만들어내는 물질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실험했고, 결국은 수백번의 시도 끝에(정확히는 730번째 물질) 연쇄구균에 효과적인 물질을 찾아낸다. 그게 바로 나중에 프로톤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설파제였다(설파제란 sulphur, 즉 황을 기반으로 한 물질이란 뜻이다). 그리고 성공의 역사가 시작된다. 독일과 영국 등 유럽에서의 알음알음 명성을 쌓아가던 설파제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을 치료하면서 그 명성이 미국에까지 이어졌고, 그에 대한 의존은 과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온통 성공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만든 프로톤질은 기본적으로 염색약에 황을 포함한 가지를 다는 것이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염색약은 아무 필요 없고, 황을 포함한 물질만 있어도 충분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특허를 낼 수 없는 물질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마구잡이로 비슷한 물질을 만들어냈고, 의사며 약사들은 그것들을 치료에 사용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잘못된 용매를 사용한 약품 때문에 적지 않은 인명피해가 생겼고 그것을 기화로 미국 FDA가 강화되고, 의약품에 대한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진다. 설파제 때문에 생긴 일인 셈이다.
설파제는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의 대성공을 뒤로 하고 페니실린을 비롯한 다른 항생제에 그 자리를 넘겨준다. 지금은 단독으로는 쓰이지 않고 trimethoprim이라는 다른 항생제와 함께 사용한다(상품명으로는 bactrim이라고 한다). 설파제가 최초의 항생제라는 영광은 받지 못했고, 도마크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개발자가 되었지만, 도마크의 설파제가 인류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많은 목숨을 살린 것은 물론이고, 제약산업의 변화가 일부 그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머스 헤이거(그는 《공기의 연금술》에서 역시 인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 하버-보슈 공정을 발견한 과학자에 대해서 다루었었다)는 ‘감염의 전장에서’ 최초로 승리의 보고서를 쓸 수 있도록 했던 설파제 개발의 역사라고 하는, 어쩌면 딱딱하기 이를 데 없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마치 역사 소설처럼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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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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