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ena
- 작성일
- 2023.4.15
재와 빨강
- 글쓴이
- 편혜영 저
창비
"C국에 온 것, 쓰레깃더미로 투신한 것, 공원에서 부랑생활을 한 것이나 하수도로 떠밀려간 것은 모두 믿을 수 없지만 쥐 한 마리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애초에 그를 선발한 지사장이 가장 먼저 고려한 것도 쥐 한 마리를 때려잡은 일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인생에 어떤 미련이나 애착이 없는 그로서는 다시금 쥐 한 마리가 가져올 우연을 기다리며, 쥐를 잡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207쪽)
징그러웠다. 글자만으로 이루어진 문장과 문단에서 장면을 상상해야 하는 소설이라는 장르는 때때로 그림이나 영상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상상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경험과 관련될 수밖에 없으므로 더 생생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쓰레기더미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쥐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쥐들이 죽는 장면, 그것도 피를 튀기며 죽는 장면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징그러웠다. 해설을 쓴 차미령은 소설가 편혜영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듯 이게 바로 ‘편혜영 소설의 결정판’이라며 ‘불쾌의 미학’을 언급하고 있다. 불쾌함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얘기일 터이다. 그렇다면 나의 징그러움은 작가가 의도한 것, 나는 그 세계에 걸려든 셈이다.
C국. 작가는 이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지목하고 있지 않지만, 대개는 짐작할 수 있는 나라다. 물론 어긋나는 점이 없지 않기에 염두에 둔 나라를 명쾌하게 지목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 나라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당국은 어감 때문에 전염병보다는 감염병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하고 있으나, 그 어감의 차이 때문에 여기서는 전염병이 훨씬 어울리는 용어가 되고 있다). 또한 지금 시점에 이 소설을 읽은 이라면 누구라도 떠올리는 질병이 있다. 10여 년 전의 소설이니 우리가 떠올리는 질병을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3년간 친숙했던 장면들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던 듯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작가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들은, 그 사이에 인간의 대처 능력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건 ‘능력’일 뿐 ‘본성’ 자체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C국의 본사로 파견을 나온다. 앞에 인용했듯이 쥐 한 마리를 때려잡는 것을 C국 출신의 지사장이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C에 도착하면서도부터 ‘그’의 인생은 급전직하하고 만다. 부랑자로 전락하고, 죽을 위기를 넘긴다. 결국은 쥐를 잡으러 다니는 직업으로 C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끝내 풀리지 않는 지점들이 많다. 과연 ‘그’가 전처를 죽였는지의 여부, ‘그’가 과연 전염병에 걸렸는지의 여부, ‘그’가 진짜로 파견 대상자로 선발되어 C국에 오게 되었는지의 여부, 본사의 몰이라는 인물은 그를 알아봤는지의 여부 등등. 이런 궁금증에 대해 작가가 어떤 답변을 내놓을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모호함 자체가 장치이지 않나 싶은데, 이 모호함을 그대로 안고 가면서 소설을 스토리로 읽는 독자의 입장을 더더욱 안달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모호함이라는 장치가 어쩌면 인간이라든가 사회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여긴다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모호함은 쥐와 쓰레기를 중심으로 한 ‘불쾌함’과 더불어 이 소설의 뼈대가 되고 있다. (끝내 스스로 풀지 못한 의문 중에는 왜 제목이 “재와 빨강”인가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C국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방역복을 입고 있었다. 공항 검역원이 그랬고 관리인과 경찰관이 그랬다. 유행중인 전염병 때문일 거였다. (중략) 그는 방역복을 입거나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을 볼 때마다 C국 내 전염병 확산속도가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자기만 감염에 무방비인 것 같아 새삼 겁이 났다.” (47쪽)
“이 책에서 가르쳐준 거지요. 병은 발열로 시작됩니다. 나 역시 열이 났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목에 림프선종이 생기기 시작하면 열이 폭발적으로 오르죠.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병원균이 신경계를 침범하면서 의식이 몽롱해지고 환각중상까지 나타나죠. 결국에는 피를 토하고 온몸에 고름애 맺히고 몸을 떨다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를 공기 중에 꽃가루처럼 퍼뜨리고 말입니다.” (144쪽)
“전염병의 실체가 불분명한 가운데 일상은 그 실체를 분명히 드러냈다. (중략) 물론 전염병은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가급적 약속을 잡지 않았고 피치 못해 만나더라도 악수와 명함을 주고받지 않았으며 마스크를 쓴 채 비즈니스 회의를 진행했고 최초의 인사를 나눴으며 조문을 드렸다. 누구나 양해할 만한 일이었다.” (179~180쪽)
전염병이 배경이 되는 소설을 찾다 읽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전염병이 배경이다. 전염병보다는 오히려 전염병에 두려워하고,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과 도시가 배경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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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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