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ena
- 작성일
- 2023.10.14
루시의 발자국
- 글쓴이
-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외 1명
틈새책방
책의 공저자인 후안 호세 미야스는 소설가이고,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는 고생물학자다. 소설가가 고생물학자를 만나 인류의 진화사에 관해 배우는 형식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책의 제목은 “루시의 발자국”이니, 이것으로는 인류의 진화사를 얘기한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루시는 가장 유명한 인류 조상의 화석이다). 그런데 스페인어 원제는 (번역기를 돌려 알아봤더니)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에게 들려준 삶(인생)” 정도로 번역된다.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책을 직접 쓴 소설가는 스스로를 네안데르탈인, 혹은 그 후손으로 지칭하고 있고, 고생물학자는 사피엔스다. 그러니까 소설가가 고생물학자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기록한 이야기라는 얘기다.
배움의 장소는 매우 다양하다. 가끔은 소설가가 만나자고 연락해서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고생물학자가 느닷없이 어떤 장소를 지정해서 소설가를 불러낸다. 그곳은 박물관이기도 하고, 시장이 되기도 하다. 오래된 벽화가 발굴된 동굴이나, 고인류학의 보고가 된 계곡과 같은 곳은 당연한 장소로 여겨진다. 그런데 놀이터나 장난감 가게와 같은 곳에서도 고생물학자의 살아 있는 강의가 이어진다. 그런 곳에서 인간의 해부학과 행동에 관해 관찰하고, 의미를 음미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흔적을 남겨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어느 곳이나 인류 진화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현장이 되는 셈이다.
인류의 진화사는 고릴라와의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면서 시작된다. 우리말 제목에도 쓰인 루시(Lucy)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를 통해 인류가 두 발로 걷게 된 것과 관련한 구조적 특성(나에게는 두 발로 걷는 것도 매우 독특한 특성이지만, 무엇을 던질 수 있는 과 어깨의 구조가 인간에게만 독특한 것이 더욱 인상 깊다)을 설명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하고, 성적 이형성과 함께 성 선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불의 사용이라든가, 뇌 크기의 증가, 혹은 감소, 권력의 지닌 집단의 등장, 나아가 국가의 등장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것으로 설정된(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소설가에게 설명하는 형식인데, 때로는 면박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 다소는 시니컬하기도 하지만, 매우 기초부터 설명해나가고 있으며, 소설가의 지적 수준에 맞게 인문학적, 사회적 의미까지도 단번에 나아가기도 한다.
사실 인류의 진화사에 관해 다양한 논의를 깊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고생물학자 아르수아가의 개인적인 가설이 마치 유일한 이론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이에 관해서는 감수자인 김준홍 교수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논지가 왔다 갔다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래서 잘 따라가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소설가 정도의 인류 진화사 지식(다시 말하지만 매우 초보적, 혹은 거의 없는 것처럼 설정되어 있다)으로도 그의 설명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주의 깊게, 혹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은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무덤을 찾아간 장면이다. 뉴런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이 천재 신경학자의 무덤은 방치되어 있다. 비석과 무덤을 손보는 데 겨우 1,200유로가 든다는 것을 확인한 고생물학자는 슬픔에 잠긴다. 고생물학자는 뉴턴, 아인슈타인, 다윈과 같은 반열에 든다고 여기는 카할의 생가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부동산 회사로 넘어가고 헐려 고급 아파트가 지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이게 노화와 죽음이라는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안타까움을 공유할 수 있다. 우리라고 다를 수 없으며,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과학자는 둘째치고, 현재 맹렬히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사기, 아닌 현실적인 연구비 문제와 관련해서도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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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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