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정원선
- 작성일
- 2019.1.25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글쓴이
- 박신영 저
바틀비
지난해에 한국 사회를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미투 운동(Time's Up Movement)은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부조리한 성범죄와 성차별의 민낯을 목격하게 되었고, 마치 우리 사회 전체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만신창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보도를 통해 페미니즘도 더불어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페미니즘은 대단히 불편한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대학교 재학 시절에 처음 접했던 페미니즘의 과격한 실태가 나에게 불필요한 부정적 선입견을 주입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 나에게는 사회 전체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과 태도만을 일관하는 페미니즘(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주의’였다. 그리고 이런 과격한 형태의 페미니즘은 지금도 여러 형태로 계속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시각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그런 변화에 대단히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 『제가 왜 참아야 하죠?』이다. 이 책은 내가 블로그 활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게 된 분이 쓴 작품으로서, 자신이 직장생활에서 직접 겪은 끔찍한 성폭행 사건과 그 사건의 법적 처리 과정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현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투 운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단상들을 써내려가는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페미니즘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페미니즘과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페미니즘의 구분이 그것이다. 물론 상아탑에서 학자들이 학문의 영역에서 펼치는 페미니즘이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이론과 실제가 꼭 일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어서 우리의 주변에서 목격되는 페미니즘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억압받거나 약자의 처지에 있는 여성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신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페미니즘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 생존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두 페미니즘들에 대한 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페미니즘(꼭 달리 부를 명칭이 없어서 그렇게 밖에 부를 수 없는 명칭)을 최후의 생존 전략으로 붙들고 있는 많은 여성이 마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불필요한 반항 세력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지금껏 누려온 기득권을 마치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게 된다는(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문뜩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일부(또는 대다수) 남성들의 비합리적인 동조도 한몫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현실을 ‘천재로 길러지는 여자’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최근에 안희정의 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그리고 가해자)는 피해자들을 이중의 잣대로 억압한다. 우선 피해자에게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 잊고 싶은 악몽을 뚜렷이 기억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겪은 피해가 사실상 피해가 아닌 자신의 강박증에 불과한 것이라는 최면을 강요한다. 다음으로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부조리한 사건을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 기억의 진정성 여부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런 기억의 정확성을 조롱조로 칭찬함으로써 피해자의 진술을 간접적으로 부정하여 현실을 외면하려고 시도한다.
어느 경우든 간에, 여성이 천재가 되어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여성이 정말 천재가 되면 그 여성이 천재라는 이유로 비난을 가하고 폄하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 속에서 여성은 앞서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을 자기 생존의 마지막 보루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다시 부정되고 비판받는다. 악순환의 고리는 끝없이 계속된다. 한국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현실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차별도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노력을 시작하도록 촉구하는 작은 목소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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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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