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
  1. 사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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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게으름 예찬
글쓴이
로버트 디세이 저
다산초당
평균
별점9 (101)
오르페우스

 

게으르게 사는 삶은 정말로 가능한가?

- 로버트 디세이, 『게으름 예찬』

 

 

 

자본에 묶인 근대인

 

 

박태원이 지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는 근대 도시를 산책하듯 떠도는 인물이 나온다. 제목에 나오는 소설가 구보 씨. 그는 요즘 사람들처럼 운동 삼아 산책을 하는 게 아니다. 소설을 쓰려는 목적으로 그는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래서일까, 그는 늘 피곤하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일이 피곤하고, 찻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곤하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 또한 한없이 몸을 지치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이렇게 해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할 일 없는 한량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구보 씨는 정말로 열심히 소설에 담을 만한 이야기를 도시를 산책하며 찾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산책이니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고? 그것은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들이 내뱉는 속 모르는 소리이다.

 

구보 씨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다. 그는 계획대로 움직인다. 근대 도시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장소를 따라 움직이며 그는 소설 언어에 담을 내용을 공책에 기록한다. 공책에 쓴 내용이 풍부해질수록 소설 또한 양질 면에서 좋아질 수 있다. 요컨대 구보 씨는 일을 하기 위해 산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좀만 걸어도 피곤하다. 일만 하고 쉬려고는 하지 않는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근대인은 왜 쉬려고 하지 않을까? 잠시라도 쉬면 속도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속도에서 뒤처진다는 건 곧 경쟁에서 밀린다는 걸 의미한다. 무한 경쟁이 외쳐지는 세상에서 경쟁에서 밀리면 어떻게 될까? 근대인은 그래서 휴식도 더 나은 성과를 얻기 위한 시간으로 치부한다. 더 열심히 일하려면 더 열심히 놀아야 한다. 이때 놀이는 물론 자본이 만든 광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을 할 때도, 휴식을 할 때도 근대인은 자본에 묶여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니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다! 바쁘다는 말은 사실 자신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광고하는 것이다. “바쁜 사람이 사는 것만큼 덜 바쁜 삶은 없다.” 2천 년 전 세네카Seneca의 말이다. 세네카는 자녀를 위해서든 미래 세대를 위해서든 일하느라 바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말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다른 사람을 위한 낭비라고 보았다. 그런 사람은 다음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낭비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학교에서든 대학에서든, 교회에서든 시장에서든 굉장히 바쁘다는 것은 활력 부족 증후군이라고 여겼다. (19~20)

    

바쁘다는 말이 곧 행복을 과시하는 말이 되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바쁘다는 건 할 일이 많다는 것이고, 할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돈을 얻을 수단이 많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바빠야 돈을 벌 수 있다. 돈을 벌면 명예는 자연 따른다.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지은이는 이렇게 바쁜 현대인을 향해 요즘 우리는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니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다!”고 서슴없이 외친다. 그는 바쁘다는 건 그만큼 사회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바쁜 사람은 자유를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자유를 즐기지 못하는 삶을 상상해 보라. 아무리 돈을 많아도 자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돈을 쓸 것인가? 2천 년 전의 세네카는 바쁜 사람이 사는 것만큼 덜 바쁜 삶은 없다.”고 단언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지은이 또한 루이스 스티븐슨을 따라 세네카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바쁘게 움직일수록 그 사람은 그만큼 활력이 부족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무언가 이상하다. 활력이 부족한데 어떻게 바삐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으로 특혜를 받은 계급은 늘 빈둥거리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빈둥거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자신들과 같은 계급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예전 귀족들은 일상과 관련된 일을 모두 하인들에게 맡겼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돈(당시에는 땅)이 있어서 가능했다. 실컷 빈둥거리면서도 그들은 정작 돈이 없는 사람들이 빈둥거리는 것을 그냥 두려고 하지 않았다. 땅이 없는 사람들이 일을 해야 귀족들의 재산이 는다. 재산이 늘어야 귀족들은 마음껏 빈둥거릴 수 있다. 하층민은 열심히 일을 하고, 특수층은 일을 하지 않는 사회는 예전부터 이념처럼 군림하고 있었던 셈이다.

  

  

빈둥거림의 미학

  

  

당신이 만약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빈둥거리며 논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빈둥거리며 논다는 것은 돈 벌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빈둥거리며 놀면서 돈을 벌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알려주는바 그대로, 사람들은 일=노동을 해서 먹고 사는 게 정직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왜 청교도 정신과 연결되었겠는가? 청교도 정신은 무엇보다 근면을 중시한다. 근면한 사람만이 신이 준 직분을 이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다. 빈둥거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의 명령을 거스른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예수가 말한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면서 잘 먹고 잘 산다. 고리대금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을 예수가 싫어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잘 살려면 태어날 때부터 부자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 한다. 돈을 모으면 성공한 삶이고, 돈을 모으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트랙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경주마처럼 사람들은 늘 긴장상태가 되어 사회생활을 한다. 토끼처럼 아무리 빨라도 긴장하지 않으면 다른 토끼들에게 밀린다. 토끼를 앞지른 거북이는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거북이가 앞지를 만큼 토끼가 잠도 자지 않으려니와,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자는 토끼를 대체할 빠른 토끼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한없이 좁다. 피라미드를 생각하면 어떨까?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올라가더라도 언제 아래로 고꾸라질지 모른다.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버티려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의 맹공이 있기 전, 인도 사람들은 차 한 잔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 풍습은 서벵골 지역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는 무언가를 하는(그러나 많이 하지는 않는) 식의 대화, 이른바 아다Adda를 완성했다. 아다를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 곧 아다바지Addabaj라면 보통 차와 커피를 놓고 친구들과 함께 중요한 일에 관해 느긋하게 대화를 나눈다. 이런 대화는 공적인 장소에서 그러나 매우 사적인 방식으로 벌어진다. 그러므로 그 논의는 사적이면서도 바깥세상의 것이 된다. 대화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뒷담화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 살롱에서 프랑스인들이 하던 것처럼 서로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무언가를 사고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관점을 교환하고, 배우고, 논쟁하고, 적극적으로 알고 싶어서 모인다. 그것은 경쟁이 아니며 선술집에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는 것도 아니다. (105)

    

일에 치인 사람은 빈둥거릴 줄 모른다. 인용문에 나타나듯, 지은이가 말하는 빈둥거림은 아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모든 시간을 성과를 내는 일에 투자하는 근대인들의 망상을 깨뜨리려고 한다.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고 자본주의는 선전한다. 이를 따르면 피라미드의 아래에 사는 사람들보다 피라미드의 위에 사는 사람들이 부지런하다. 부자가 되려면 부지런해지라는 선전을 함으로써,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력을 이끌어내려 한다. 사람들이 만약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자본주의는 망할 것이다. 현행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다. 생산을 하려면 사람들이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해야 사람들은 물건을 소비하는 데 돈을 쓸 수 있다. 자본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줌으로써 자본을 증식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회는 정지 상태가 되어버린다. 정지 상태의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소비를 해야 한다. 일을 하는 것도 크게 보면 소비의 일종이다. 돈을 벌면 돈을 써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움직여야 하고, 돈을 소비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게으름을 피운다고? 말도 안 된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사람들은 돈을 들고 밖으로 나와 소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돌아가고, 자본가의 재산이 증식된다. 자본가는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을 싫어한다.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자꾸만 자본의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자본은 자본의 안쪽에서만 증식을 한다.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만큼 자본이 증식하는 속도는 늦어진다. 일을 할 때도 에서 해야 하고, 소비를 할 때도 에서 해야 한다.

 

이라는 장소는 자본이 만든 광장을 가리킨다. 자본의 광장에서 일을 한 사람들은 자본이 세운 놀이터로 가 여가를 즐긴다. 자본은 놀이터를 만들어 인건비로 나간 돈을 회수한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자본은 극도로 싫어한다. 자본 회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을 멈추는 순간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무너진다. 돈이 돈을 먹는 사회가 아닌가. 사적인 장소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을 자본은 어떻게든 사람들이 많은 광장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혼자 놀아도 밖에 나와서 놀아야 한다. 집안에 처박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자본은 조장한다고나 할까? 밖으로 나가기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텔레비전 광고를 보라. 수많은 광고들이 상품을 선전하고, 놀이를 선전한다. 유혹을 당하지 않으려면 텔레비전을 꺼야 하지만, 세이렌의 소리는 이미 사람들의 뇌를 장악하고 있다.

 

지은이가 얘기하는 빈둥거림은 어찌 보면 이러한 자본의 유혹을 물리치려는 하나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소셜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대화가 아니라 서로가 무언가를 배우고 논쟁하는 대화를 원한다. 그러려면 빈둥거릴 시간이 있어야 한다. 모든 시간을 일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빈둥거릴 시간이 없다고 울먹이듯 외친다. 그들은 정말로 시간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없다는 환상에 빠진 것일까? 지은이는 후자라고 명확히 밝힌다. 바쁘다는 말이나, 시간이 없다는 말은 자본이 퍼뜨리는 환상에 불과하다. 자본은 사람들을 그냥 놔두려고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일만 하라고 하고, 여가를 즐길 때는 여가만 즐기라고 한다. 일과 여가는 물론 자본이 만든 광장을 벗어나면 안 된다. 돌려 말하면 자본의 광장에서 벗어나면 빈둥거릴 시간이 나온다는 얘기가 된다. 지은이 말마따나 책을 읽는 일만 해도 꼼짝하지 않은 채 모험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깃들이기와 단장하기

 

 

자본이 만든 광장은 사적인 영역을 애써 무시하려고 한다. 사적인 자리가 들어설 자리를 자본이 자꾸만 침범해 들어온다. 지식을 얻으려면 인터넷을 켜면 된다고 자본은 유혹한다. 책을 읽고 정보를 얻는 시간보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시간이 더 짧다고 자본은 강조한다. 수많은 정보를 담은 스마트폰을 보는 게 더 유익하다고 자본은 또한 선전한다. 현대인들은 분명 사적인 일을 할 때도 무언가 공적인 일, 정확히는 자본이 만든 일과 자꾸만 얽힌다. 인터넷상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자본이 만든 광고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하나를 지우면 다른 하나가 나타난다. 방안에 홀로 있으면서도 홀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인터넷을 끄지 않으면, 텔레비전을 끄지 않으면 자본은 어디서나 우리 삶에 개입한다. 한 곳에 편안히 깃들이기가 그만큼 힘든 것이다.

    

나는 순전한 쾌락을 위해 육욕에 탐닉하는 것이 더 높은 의식 수준의 문턱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솔직히 말해 재미를 위한 섹스는 엄격한 성직자적 관점에서 특히 더, 깨달음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카주라호에서 세속적 공간과 신성한 공간 사이의 수많은 문턱은 서로 껴안은 커플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 한편 더욱 외설스럽고 훨씬 덜 금욕적이며 실제로 이 사원들을 지은 인도인들이 알고 있었다시피,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모든 것들과 접촉하는 데는 좋은 섹스만 한 것이 없다. 우리의 욕구, 우리의 장난기, 우리의 수많은 어리석음, 우리의 다정함, 탐욕, 그리고 누군가의 그것을 캐내는 것에 관해 우리가 평생 배워온 것들. 누군가의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할 뻔했지만 가장 깊은 내면이라고만 말해 두자. (176)

    

지은이가 말하는 깃들이기는 영혼, 다른 말로 하면 가장 깊은 내면과 만나는 과정을 나타낸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리는 영혼을 느낄 수 없다. 인터넷을 하면서도 우리는 영혼을 느낄 수 없다. 스마트폰이라고 다를까. 온통 문명의 이기에 정신을 빼앗긴 채 우리는 살고 있다. 기기는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동물로 만들려고 한다.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오로지 게임 속 적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저 두 눈으로 화면에 나오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자본은 스펙터클한 장면을 번갈아가며 화면으로 내보낸다. 보기만 하면 되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만 있고 공()은 없는 세상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색만 있는 세상은 화려하다. 감각적이다. 감각은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게임을 하면서 몸이 들뜨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깃들이기의 한 형식으로 지은이는 섹스를 이야기한다. 그는 종교적 차원으로 억제되는 섹스는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감각에 탐닉하는 섹스를 물리쳐야 할 적으로 생각한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섹스만큼 아름다운 접촉 또한 없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섹스를 통해 사람들은 단순히 쾌감만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섹스를 하려면 우선 서로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신뢰가 없이도 섹스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쾌락을 얻는 데 불과한 행위다. 서로를 향한 신뢰가 있어야 서로를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고 지은이는 재삼 강조한다. 섹스는 몸과 몸이 만나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정신과 정신이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색을 통해 공에 이르는 기술이라고나 할까? 자본은 이러한 섹스를 산업화해서 자본을 증식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날이 갈수록 번창하는 섹스 산업을 보라.

 

섹스는 상대 몸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제 몸을 알아가는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상대 몸을 모르고 어떻게 상대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며, 제 몸을 모르고 어떻게 섹스를 하는 쾌감에 이를 수 있을까? 지은이는 섹스에 스며든 깃들이기를 목욕 문화에서도 발견한다. 목욕을 하며 일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일과는 거리를 둔 자리에서 사람들은 알몸이 되어 목욕을 한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싼다. 피곤이 단번에 가시는 느낌이 든다. 섹스가 더불어 느끼는 감각이라면, 목욕은 홀로 느끼는 편안한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빈둥거림과는 다른 차원의 느낌을 깃들이기는 준다고나 할까? 지은이가 말하는 게으름이 단지 일을 놓는 게 아니라, 삶 자체를 즐기며 사는 것이라고 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노동은 적게, 놀이는 길게

 

 

당연한 말이지만, 게으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려면 그만큼 노동을 적게 해야 한다. 노동을 적게 하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뇌리를 떠나지 않은 질문이다. 세네카가 게으르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일을 대신 해주는 하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귀족이었다는 얘기다. 노동을 적게 하고 놀이를 길게 하려면 돈이 나오는 길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지은이는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사회 문제다. 가난 문제를 국가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가난 문제는 여전히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복지 국가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복지 국가는 국가가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노는 것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그것을 열변을 토했고, 중국부터 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그 통찰을 이야기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 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성직자들과 군대와 함께,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부자를 포함해 나머지 모든 사람이 뼈가 부서져라 일할 때, 그들은 자유롭게, 종종 목숨을 걸어가며 그들의 게임을 하며 놀 수 있었으니까. 일해야 할 의무가 대체 무엇이 성스럽다는 말인가? 이는 이제 우리가 드러내놓고 콧방귀를 뀌어야 할 허튼소리다. (274)

    

노는 것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지은이의 말은 옳다. 시간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자본이 만든 시간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몇 백 년 동안 지배계급은 노동을 신성시하여 엄청난 이익을 취했다는 말도 옳다. 하층민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리고 죽어갈 때, 지배계급은 안전한 후방에서 전리품을 챙겼다. 지배계급의 그런 속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 이 사회에서도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뼈가 녹을 정도로 일을 하고, 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골프를 즐기며 일을 한다. 성공한 1퍼센트는 결코 건강에 무리가 되는 일을 벌이지 않는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만이 무리를 한다. 하층민은 무리를 해야 하루하루 먹고 살 수 있고, 상층으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무리를 해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 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본다.

 

노동이 성스럽다는 지배계급의 말을 걷어찬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잘 놀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콧방귀를 뀌며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말을 한 바로 그 시간에도 하층민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연인이 되는 게 좋다는 말처럼 무책임하다. 이 책에는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구나 품격 있게 살고 싶다. 한여름에 근사한 휴양지에 놀러가 비싼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쉬고 싶다. 그게 안 되면 집에 깃들어 책을 읽으며 빈둥거리고 싶다. 그렇게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왜냐고? 자본이 만든 사회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균형 잡힌 삶을 살려면 균형 잡힌 사회가 필요하다. 그것이 안 된 상태에서 균형을 이야기하면 결국은 개인의 능력 차이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것만큼 자본에 충실한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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