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사상

오르페우스
- 작성일
- 2019.11.20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글쓴이
- 김현균 저
21세기북스
어둠 너머에서 빛나는 시
- 김현균,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어둠을 뚫는 존재는 시인이 아니라 시다. 시를 쓰는 게 결국은 시인이 아니냐고? 아니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인으로 하여금 시가 시를 쓰게 한다. 아무 시인이나 어둠을 뚫고 오는 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둠을 뚫고 오는 시를 받아들이려면, 시인 또한 어둠을 뚫고 나갈 기세로 시를 써야 한다. 지은이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네 명의 시인을 다루는 이 책의 부제를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로 달고 있다. 소외는 어둠을 가리킬 것이고, 해방의 노래는 시를 가리킬 것이다. 어둠 속에 갇힌 소외된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시인들은 시를 쓴다. 소외된 약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실 너머를 향한 열망을 불태우는 존재만이 비로소 시인이 되는 법이다.
라틴아메리카는 33개국의 독립국과 한 개의 준독립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문화적 역사적 동질성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다양성과 혼종성이 넘쳐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멕시코와 과테말라 등지는 아스테카나 마야 문명권에 속하고,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은 흑인문화의 영향이 매우 강하며, 페루로 대표되는 안데스 지역은 백인 문화와 선주민 문화가 공존하는 문화 지형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같은 라플라타 강 유역은 백인 인구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높은 지역 중 하나다. 흔히 히스패닉이라고 부르는 라티노 공동체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또 다른 문화, 정치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이중의 유혹’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지역의 정체성은 선주민주의와 서구 지향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 루벤 다리오
루벤 다리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혁신적인 시 운동인 모데르니스모를 주창했다. 모더니티와 비슷한 어감인 모데르니스모는 혁신을 중시한다. 모데르니스모는 대륙적 차원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작을 알렸다. 모데르니스모는 무엇보다 도시 공간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앙헬 라마의 말마따나,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산업 문명이 촉발한 사회, 문화적 모더니티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모데르니스모가 발생했다. 지은이는 모데르니스모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모더니즘 운동과 구분하고 있다. 모더니즘이 1차 세계대전 이후 구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발로 등장한 근대적 감각의 혁신적 예술 경향이라면, 모데르니스모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답파나 상징주의와 접목돼 일어난 문학운동이라는 것이다.
공주는 슬픔에 잠겨 있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웃음도, 핏기도 잃어버린
딸기 입술에선 한숨이 새어 나오네.
공주는 황금 의자에 앉아 창백하게 앉아 있네.
청아한 클라비코드 건반은 소리 없고,
꽃병엔 꽃 한 송이 잊힌 채 시들어가네.
- 루벤 다리오, 「작은 소나타」 부분
지은이는 위 시를 모데르니스모의 미학이 응축된 작품으로 제시한다. 프랑스 상징주의가 음악을 중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데르니스모 또한 음악을 중시한다. 다리오는 ‘무엇보다 음악’을 자신의 모토로 삼은 시인 베를렌을 가장 숭배했다. 우리말로 번역된 위 작품에는 음악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 시의 14음절 시행들은 음절수와 악센트, 자모음의 배치가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강력하고 조화로운 리듬감을 형성한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이러한 음악성을 통해 하늘과 조응되는 어떤 세계를 지향했다. 이곳 현실보다는 저곳 이상으로 나아감으로써 그들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세계를 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20세기 초에 펼쳐진 모더니즘 운동과는 다른 내용과 형식이 모데르니스모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루벤 다리오는 푸른색과 더불어 백조를 모데르니스모를 상징하는 주된 모티프로 내세웠다. 푸른색은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한 색으로, 다리오는 ‘예술은 푸른빛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모데르니스모에서 백조는 단순한 장식적 요소가 아닌 영원한 예술미의 상징이다. 그래서 절대미, 순수, 꿈, 이상, 때로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더 나아가서 관능성 등 다리오가 생각하는 긍정적 가치의 총화로서의 의미를 지닌다.”(85쪽) 요컨대 다리오는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세계를 시를 통해 다가가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상상으로 현실을 개조하려는 이 꿈은 실제 현실 속에서는 쉬이 이룰 수 없는 허상과도 같다.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뻗어 나오거니와, 다리오 역시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 앞에서 절망하는 시적 화자(「하나의 형을 좇지만…」)를 그려내기도 했다.
다리오에게 시적 리듬은 곧 우주적 리듬의 현시였다.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리듬으로 서로 상응한다. 보들레르가 지은 「만물조응」이라는 시에도 드러나는 이러한 사상은 시와 우주를 하나로 잇는 아날로지(analogy)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리듬으로 만물과 조응하려면 시인 또한 우주의 리듬을 타야 한다. 자아와 세계 사이에 전혀 틈이 없는 상상 세계는 이로써 펼쳐지는바,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다리오도 온몸으로 우주의 리듬과 조응하는 시적 세계를 지향한 셈이다.
모데르니스모 시기는 정신적 공허와 우울이 지배하는 문화적, 사회적 격변의 시대였다.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루벤 다리오의 시도 차츰 아날로지의 세계에서 아이러니의 세계로 중심이 이동하게 된다. 불화와 균열을 뜻하는 아이러니는 조화와 통일성을 의미하는 아날로지의 상대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이것과 저것,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상응이 빚어내는 화음을 깨뜨리고 소음으로 만드는 불협화음이 바로 아이러니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과 우주, “개별성이 총체성을 꿈꾸고, 차별성이 통일성을 지향하는” 순환적, 신화적 시간 대신 고뇌하는 근대적 인간, 직선적이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95쪽)
문학운동은 시대 현실을 반영한다. 모데르니스모 또한 19세기 말 라틴아메리카의 시대 현실을 그 속에 함유하고 있다. 타락한 시대 현실과 만나면서 우주 질서와 조화를 꿈꾸던 다리오의 아날로지는 차츰 불화와 균형을 의미하는 아이러니로 변주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는 근대인의 정신을 대변한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근대인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세웠다. 그 결과 근대인은 이전에는 신에게 미루었던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신성의 자리에 이성을 놓고, 기적의 자리에 과학을 놓는 작업을 통해 근대인은 자연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세계를 인간 중심의 세계로 바꾸기 시작했다. 당연히 상징주의 시인들이 꿈꾸는 만물조응의 세계는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인간이 중심이 된 새로운 근대 세계가 만들어졌다. 신으로 대변되는 보편성과 통일성이 사라진 자리에 근대인은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을 들여놓은 셈이다.
역사적 시간은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의 광기로 드러났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난 1898년에 발표한 「칼리반의 승리」에서 다리오는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글에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전복시켜 야만스러운 것은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바로 미국이라고 질타했다. 물질주의를 앞세운 북미의 앵글로 색슨족이야말로 그리스 라틴 문명의 정신주의와는 동떨어진 야만인이라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다리오는 반제국주의자로 변모한다. 지은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처럼 다리오는 적어도 두 개의 얼굴을 가졌고, 모데르니스모도 결국 단일한 방향성을 가진 문학 운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데르니스모 자체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독립에 뒤이은 문화 영역에서의 탈식민적 실천의 성격을 일정 부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리오의 입장 변화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113쪽)
사랑과 혁명의 길 : 파블로 네루다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시가 내게로 왔다’는 네루다가 지은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구절은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루다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시인이다. 연애시를 쓴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스탈린을 신봉한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사랑과 혁명 사이에서 그는 삶을 살았고, 시를 썼다. 그의 대중성을 알려주는 사례로 지은이는 2010년 8월 칠레 산호세 광산 붕괴 사건을 제시하고 있다. 광산에 매몰된 서른셋의 광부들은 69일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을 하는데, 그 기간 광부들은 네루다의 시를 돌려 읽으며 고통을 견뎠다고 한다.
나는 쓴다, 물과 달을, 변치 않는 질서의
요소들을, 학교를, 빵과 포도주를,
기타와 연장을 필요로 하는 소박한 이들을 위해 쓴다.
(…)
광부는 웃음 띤 얼굴로 바위를 깨고,
제동수制動手는 이마의 땀을 닦고,
어부는 팔딱거리며 그의 손을 불태우는 물고기의
반짝거림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될 테고,
갓 씻은 깨끗한 몸에 비누 향기 가득한
기계공은 나의 시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고.
- 파브로 네루다, 「커다란 기쁨」 부분
네루다는 소박한 이들을 위해 시를 쓴다. 농부들을 위해, 광부들을 위해 쓰는 시를 통해 그는, “그는 동지였다”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그들과 연대감을 형성한다. 커다란 기쁨은 그러므로 이러한 연대감에서 뻗어 나온다. 탄광에 갇힌 광부들은 어찌 보면 이러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견뎠는지 모른다. 시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일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네루다의 위 시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네루다 시의 대중성은 무엇보다 약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이러한 시심에서 비롯된다. 대중성을 흔히 상업성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지만, 네루다 시에서 대중성은 상업성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그는 대중적인 시를 씀으로써 민중의 삶에 이르는 시의 길을 열려고 했다. 민중이 쉽게 읽는 시가 곧 그가 추구한 시 양식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주의자였던 네루다의 이데올로기를 빌미로 네루다의 시를 평가하는 이들이 있지만, 네루다는 한순간도 미적 자율성과 창조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은 자유로운 예술혼의 소유자였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네루다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시종일관 리얼리스트이기만 한 시인 역시 죽은 시인이라고 했다. ‘리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네루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판하는 한편으로 ‘리얼리스트’ 너머에서 빛나는 사상의 중요성을 중시했다. 하나의 이념이나 형식으로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판단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이지 네루다는 분명히 보여준다. 시간을 따라 변하지 않는 시인이 어떻게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은이 말마따나, 네루다는 일체의 교조주의를 거부하는 유연한 태도로 리얼리즘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셈이다.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네루다는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리얼리스트로 돌아섰다. 이후 그의 시는 억압받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공감하는 새로운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앞서 살핀 대로 그는 민중들이 쉽게 읽는 시를 쓰려고 했으며, 그를 통해 민중들과 연대감을 구축하려고 했다. 네루다의 이러한 연대의식은 사실 우주와 조응하려는 시심과도 이어져 있다. 리얼리스트이자 리얼리스트를 뛰어넘는 시인의 위상은 민중과 우주를 한 울타리에 묶으려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일반인에게는 사랑의 시인으로 알려진 네루다는 스탈린을 옹호한 이념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시와 우주가 어우러진 세계를 지향하는 동시에, 약자들의 목소리가 드넓게 울려 퍼지는 혁명 세계를 지향하기도 했다.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자리에서 뻗어 나오는 시인의 면모를 그는 온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가난의 고통을 넘어 : 세사르 바예호
세사르 바예호는 첫 시집인 『검은 사자들』에서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신이 아픈 날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아픔을 바예호는 가난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표현한다. 흔히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굶주림과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예호의 삶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굶주림을 사랑과 함께 버무려 예술로 빚어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를 시를 통해 그는 가난으로 해서 생긴 고통을 언어로 표현했다. 당대에는 비록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는 라틴아메리카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바예호의 시에서 지은이는 ‘다정함과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염세주의’를 발견한다. 염세주의는 이 세상을 비극으로 본다. 비극적인 세계에 어떻게 다정함과 자애로움이 흘러넘치는 것일까? 「트릴세 18」이나 「트릴세 65」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가난에 젖은 삶을 살 때나 감옥에서 고통을 겪을 때도 결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잊지 않았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절망적이고 비루한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고 가난, 소외, 고통과의 힘겨운 싸움을 견디게 해주는 견고한 ‘기둥’”(247쪽)이었다. 비극적인 세상에서 다정함을 잃지 않는 성모(聖母)의 이미지를 시인은 어머니에게 투영한 것이다.
어머니를 향한 마음은 영혼의 영원한 안식처인 안데스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바예호는 안데스와는 동떨어진 대도시 파리에서 부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 그는 대도시에서 이방인으로서 사는 소외감을 느꼈고, 삶의 부조리를 느꼈다. 도시에는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비한다면, 안데스 산악 지대는 그에게 자연이나 순수, 문명 세계의 불모성과 폭력성에 침윤되지 않은 원초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이 대도시 파리를 지향하며 시를 썼다면, 그는 반대로 파리에서 안데스를 그리워하며 시를 쓴 셈이다. 고향에 대한 시인의 열망은 이후 타인(약자)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된다. 스페인 내전을 기록한 다음 시를 보면, 문명의 파괴 공작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바예호의 서정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전투가 끝나고,
죽은 전사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 “죽지 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러나 아아! 시신은 계속 죽어갔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다 :
“우리를 두고 가지 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아아! 시신은 계속 죽어갔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했다 : “한없는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그러나 아아! 시신은 계속 죽어갔다.
수백만 명이 모여들어
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아아! 시신은 계속 죽어갔다.
그러자 세상사람 모두가
그를 에워쌌다. 슬픈 시신은 감격하여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 세사르 바예호, 「군중」
세상사람 모두가 모여들어 슬픔에 빠진 시신을 살려낸다. 기적은 위대한 존재 한 사람이 아니라 군중이라는 다수를 통해 펼쳐진다. 한 사람이 다가와도 시신은 계속 죽어가고, 두 사람이 와도,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도 시신은 계속 죽어간다. 수백만 명이 모여들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사람 모두가 시신을 에워싸자 비로소 시신이 몸을 일으켜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는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예수의 기적이 아니다. 예수의 마음을 지닌 군중들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다. 황현산의 말마따나,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바예호는 시 양식으로 표현한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게 아니다. 상상이 곧 현실이다. 상상을 통해 현실이 만들어진다고 말해도 좋겠다. 바예호는 바로 그 믿음으로 만인이 공감하는 사랑과 혁명의 시를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이다.
시와 반시 : 니카노르 파라
니카노르 파라가 주장한 반시(反詩)는 시인을 저주받은 존재로 보는 기존의 시학을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저주받은 시인은 늘 현실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만물조응의 세계관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만물과 하나가 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인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드리워진 까마득한 거리를 확인한다. 타락한 현실에 발을 디딘 채로 숭고한 이상 세계를 지향하다 보니, 시인이 쓰는 언어는 상징성을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다. 상징 언어는 일상 언어와는 다른 표현방식을 취한다. 파라는 무엇보다 기존 시에 부여된 이러한 상징성(신성성)을 거부했다. 그는 “시만 빼고 모든 게 다 시다!”라고 극단적으로 외쳤다. 시에 내재된 절대성과 신성을 거부한 파라는 시를 일상의 차원으로 내려놓으려고 했다.
파라는 기존의 시적 전통에 시비를 걸기 위해 언어 외적인 요소를 시 안으로 끌어들였다. 여자가 노골적으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그림을 배치하여 시를 능욕했으며, 신성한 주기도문과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를 결합함으로써 종교의 세속화, 상업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롤러코스터」라는 시에서 그는 “반세기 동안 시는/ 숭고한 바보들의 천국이었다.”며, 이런 시에서 벗어나려면 롤러코스터에 올라타 입과 코로 피를 쏟아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숭고한 바보들은 상징 언어로 신성에 다가가려고 했다. 그들은 신성을 쟁취하기 위해 일상을 버렸다. 파라는 ‘반시’를 통해 숭고한 바보들이 버린 일상(언어)에 주목했다. 그는 무지개나 고통, 바보와 같은 시어 대신 관이나 연필, 지우개와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기존 시는 쓰지 않던 언어를 시어로 사용함으로써 그는 언어에 새겨진 고정관념을 깨뜨리려고 한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 별일 아니야!
수업을 하면서 눈을 버렸어.
어두침침한 보명, 햇빛,
눈에 해로운 초라한 달빛.
도대체 무슨 영화榮華를 보겠다고!
부르주아의 상판대기처럼 딱딱하고
피 냄새와 피 맛이 나는
용서할 수 없는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서지.
우리는 뭐 하러 사람으로 태어난 것인가,
어차피 개죽음 당할 거라면!
- 니카노르 파라, 「자화상?」부분
반시의 가장 큰 특징은 시와 시인과 시적 자아를 탈신성화하는 것이다. 시인을 ‘저주받은 시인’으로 규정한 예전 시인들은 시를 이상 세계를 표현하는 절대적인 양식으로 생각했다. 시 안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 또한 이상 세계와 마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신성을 겸비한 존재로 간주했다. 위 시에 드러나는 대로, 시적 화자는 더 이상 이상을 꿈꾸는 신성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신분인 시적 자아는 “용서할 수 없는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교직에 종사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개죽음”이라는 시어처럼, 일상에서 사용되는 욕설이 거침없이 표현되기도 한다. 숭고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비루함이 자리 잡는다. 파라는 저주받은 시인의 모습이 아니라 타락한 현실에 물든 시인의 모습을 물질주의에 경도된 시적 자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함께 파라는 주기도문과 같은 신성한 내용을 패러디하여 시인들이 시에 부여한 신성한 언어에 의문을 제기했다. 종교 담론은 절대성을 지향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려 보라. 신이 말한 계율을 인간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조건’은 조건이 없음을 의미한다. 계율은 이유가 있어 지키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동어반복의 세계라고나 할까. 신이 절대적인 만큼 신의 계율 또한 절대적인 특성을 지닌다. 신을 지향하는 시인 또한 시를 통해 이러한 절대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시의 절대성은 무엇보다 이런 맥락에서 의미화되는바, 파라는 주기도문을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신성이 사라진 세계의 어긋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파라는 「선언문」에서 시인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보통사람이라고 선언한다. 연금술사는 본질을 탐구하는 존재이다. 화학 실험을 통해 가장 근원적인 물질을 발견하려는 연금술사의 방식은,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인의 방식과 상당히 닮았다. 파라는 연금술사로서 시인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버리고, 일상을 사는 벽돌공이나 인부를 시인으로 부른다. 벽돌공이나 인부가 시인이므로, 그들이 쓰는 언어 역시 연금술적인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파라는 일상의 언어로 일상을 사는 민중들의 삶에 다가가려고 했다. 현실 너머에 있는 사물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저주받은 시인의 면모를 민중과 더불어 일상을 사는 현실 속 시인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파라는 생태시 운동을 벌인 시인이기도 하다. 1970년대부터 그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생태주의자로 규정했다. 「나무 보호」라는 시를 보면, “기쁜 소식 :/ 백만 년 뒤에/ 지구가 회복된단다/ 그런데 사라지는 건 바로 우리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다고 주장하지만, 자연이 건강을 회복하는 날, 인간은 지상에서 사라질 거라고 시인은 예언한다. 지은이는 이 지점에서 파라가 주창한 반시의 윤리성을 끄집어낸다. 반시는 시에 반하는 양식이기보다 시를 일상 속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절대라는 이념에 한정된 시의 영역을 드넓은 일상으로 확장한 시 운동이라고 봐도 좋다. 시 주변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 영역으로 나아간 파라는 이로써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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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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