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읽기

오르페우스
- 작성일
- 2017.10.2
손님
- 글쓴이
- 황석영 저
창비
타자를 부정하는 ‘남성의 시선’
- 황석영 『손님』의 경우
황석영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굵직한 서사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그는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가 쓴 소설을 읽다 보면 남성의 시선에 지나치게 갇힌 또 다른 ‘그’를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 장면만 본다. 주제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타자를 배제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손님』에서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윤 선생을 윤간하는 청년단원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류요한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윤간의 장면은 류요한이라는 주체의 시선에 한정되어 묘사된다. 윤 선생이라는 고통스런 타자는 있되, 윤 선생(타자)의 시선은 배제된 채 류요한이라는 주체의 시선만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무추름하니 그냥 혼자서 빈 술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복도가 시끄러워지고 여자의 비명과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못 먹는 술을 연거푸 두 잔이나 털어 넣었다. 한참이나 있다가 술이 벌겋게 올라서 방을 나섰다. 복도를 나서려는데 신음소리가 들렸다. 미닫이를 조금 열고 방안을 들여다본다. 세 남자가 둘러 앉아 발가벗긴 여자의 팔과 다리를 잡고 있었는데 한놈이 올라타고 일을 치르는 중이다. 나는 숨을 삼키며 끈에 달린 것처럼 방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봉수는 이미 끝났는지 웃통을 벗은 채이고 상호의 바지가 종아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일본식 목욕 하오리는 끈이 풀려 다다미 위에 활짝 펼쳐져 있다. 내가 아마 상호의 몸을 발로 찼을 것이다. 그가 옆으로 나뒹굴었으니까. 그러고는 언제나 군용점퍼 안에 찌르고 다니던 권총을 꺼내어 여자를 쏜다. 두 발을 쏜 것 같았다. 내가 비틀거리며 방을 나와서도 아무도 나를 쫓아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귓전을 파고든 총소리가 아직도 앵 하며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손님』, 247~248쪽)
윤간의 장면은 이미지로 드러나 있다. 류요한이 윤 선생에게 총을 쏘는 장면도, 그 총소리가 ‘앵’ 하며 류요한의 귓전을 파고드는 장면도 이미지로 처리되어 있다. 『손님』이 류요한과 류요섭, 또 학살당한 사람들의 기억에 의지해 서술되는 것처럼, 윤선생의 윤간 장면 역시 이러한 이미지(기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도인 류요한이 이 장면을 회상하며 “이제부터 마귀가 번성하게 될 지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윤선생의 윤간 장면이 이미지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윤 선생은 청년단원들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존재한다. 주저없이 윤선생에게 총을 쏘는 류요한의 행동은 그런 점에서 윤 선생 개인보다는 그가 목격한 추악한 광경을 처벌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행동이다. 이 과정에서 윤 선생이라는 개별적인 존재는 류요한의 시선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중요한 것은 윤 선생이라는 형상이 작가의 시선에서도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윤 선생의 형상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모여 ‘말들의 잔치’를 벌이는 과정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류요한이 인식하는 타락한 세상의 한 증거로서 윤선생의 윤간 장면이 제시됐으므로 윤 선생에 대한 소설적 언급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손님』이라는 작품의 전체적인 서술구조를 고려할 때, 윤 선생에 대한 후일담을 묻는 일은 어리석은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존재들을 영혼으로라도 불러내어 진혼하는 이 소설의 문학적 의도를 생각한다면, 윤 선생은 그 진혼의 과정에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해자-피해자들의 말들은 진혼의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만 윤 선생은 죽음의 세계에서도 한결같이 침묵을 강요당한다. 개인이기 때문일까? 여성이기 때문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타자들 속에서 배제된 또 다른 타자의 얼굴=여성을 보게 된다. 류요한의 시선에 이미지로 포착되어 타락한 세상을 증명했던 한 여성은 이렇게 진혼 의식에서도 배제되어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윤선생의 영혼이 등장했다면 그녀는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윤간 당한 여자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왔을까? 황석영의 남성적 시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낸다. 스스로 무당이 되어 죽은 자들을 대변하려는 작가의 열정은 윤 선생의 윤간 장면에 이르러 결정적인 모순의 상황에 빠져버린 셈이다.
『손님』에서 황석영은 ‘여성’에 대한 역설에 직면해 있다. 할머니-어머니로 이어지는 모성적 존재들이 오구굿의 형식과 어울려 이 작품의 한쪽 구조를 이룬다면, 진혼의 장소에서도 배제되는 윤 선생의 형상은 이 작품의 또 다른(은폐된) 구조를 이룬다. 그가 지향하는 것과 배제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그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된 ‘모성’이 작품의 중심에 들어선다. 윤 선생에게 부재하는 것은 모성적 존재의 순결성이 아니었을까?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존재(여성)가 황석영 소설의 중심에 들어설 수 없는 이유가 순결성의 부재와 연결된다면, 이것만큼 지독한 남성 중심적 시선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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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