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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고기
글쓴이
대니얼 월리스 저
동아시아
평균
별점7.9 (15)
operion
벌써 10여년 전인가 보다. 우리나라는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의 '열풍'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폼 나는 사랑의 테마' 정도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던 이 드라마의 주제가가, 사실은 체첸공화국과 러시아의 처절한 투쟁 속에서 탄생한 '장송곡'이었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무릇 장송곡은 이 '백학'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듣는 이들의 가슴을 '묵직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소명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 <큰 물고기>는 장송곡이다. 아들 윌리엄이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을 떠나보내는 장송곡. 그런데 이 장송곡은 유쾌하다. 늙어서 죽어가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늙지 않았을 때의 파란만장한 삶이 계속 교차되어 보여지는데도 말이다.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데(그것도 아버지가!) 어떻게 유쾌할 수가 있어?"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이 소설이 비밀이 있다. 에드워드 블룸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신화 속의 큰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블룸은 비범했다. 그가 태어나던 날 '비가 왔을 뿐'만 아니라, 암탉이 그의 무릎 위에서 알을 낳기도 했고, 열두살 때에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맞힐 수 있었고, 그의 고향 애쉴랜드에 있는 책은 전화번호부까지 다 읽었다. 이러한 '징조'들은 에드워드 블룸이 큰 물고기가 될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문지기개에게 손가락을 물어뜯긴 채 애쉴랜드를 떠나지 못한 이들과 달리 당당하게 애쉴랜드를 벗어나 '신화'가 된다.

먹보 거인과 담판을 짓고, 노파의 유리 눈알을 찾아주고, 앨러배마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나중에는 마음에 드는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사 들이기도 하는 그를, 주의의 모든 사람들은 '신화'로 인정한다. 단 한 명, 그의 아들 '윌리엄'을 제외하고.

'신화'가 되기 위해,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돌아다녀야 했던 에드워드는, 다른 이들에겐 비록 신화였으나 그의 아들 윌리엄에겐 '낯선 사람'이자 '허풍쟁이'일 수 밖에 없었다. 늘 모험을 찾아 떠돌던 에드워드가 늙어서, 죽음을 기다리기 위해 결국 찾은 곳은 그의 집이었고 그 곳에서 그는 그의 아들에게 자신이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알리고 싶어한다. 신화로서, 큰 물고기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모험을 해 온 그도, 결국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늙은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날도 에드워드는 윌리엄에게 자신의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들려준다. 에드워드 특유의 유머감각을 한껏 살려서. 그리고 아들에게 묻는다.

"진정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니?"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위대하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에드워드가 원했던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을텐데.

결국 이 소설은 이렇게 진행되어 간다.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늙은 아버지'와 '마지막 순간만큼은 신화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아들이 빚어내는 안타까운 반목.

이제 에드워드는 곧 죽는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음을 에드워드도, 윌리엄도 눈치챈다. 에드워드는 마지막으로(또 필사적으로) 아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로서 네게 한두가지는 가르치려고 했다. 난 정말 나름대로 노력했어. 집에 많이 있지는 못 했지만 함께 있을 때는 네게 가르치려고 했어. 그래서 알고 싶은 게 있는데 - 내가 내 일을 제대로 한 것 같니? 내가 죽기 전에만 말해다오.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말해다오. 내가 인생에 대해 네게 가르친 것 모두 말해주면 내가 죽을 때 걱정 없이 죽을 테니까. 그냥 말해다오."

죽음이 드리워지는 아버지의 푸른 회색빛 눈을 들여보던 윌리엄은 아버지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시작한다. 내게 이 소설에서 가장 멋진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장면을 꼽겠다. (윌리엄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말하는 것은'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래~'라고 외치고 도망갔다던 그 '역적'과 행보를 같이 하는 것임을 잘 알기에 여러분들의 소중한 몫으로 남겨 놓는다.)

사실 이 소설은 이 장면에서 끝나는 것이 더 좋았을(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 월러스는 애초에 에드워드 블룸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신화'를 쓰고자 했던 모양이다. 신화의 끝에 '여운'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지난 과거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다. 그래서 그는 이 소설을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을 굳이 덧붙이고야 만다. (물론 신화의 마지막 장면으로서 손색이 없는, 멋진 피날레다.) 혹 나중에, 다니엘 월러스가 이 장면을 피날레로 삼은 것에 대해 후회를 하지는 않을까 하며 혼자 생각해 보게도 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만한 상상' 역시 독서의 큰 즐거움이 아니랴! (핑계 좋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진실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을 정신없이 넘기게 만드는 다니엘 월러스의 유쾌하고 신명나는 글솜씨는 에릭 시걸의 그것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엉뚱한 해프닝이나 우스꽝스러운 단어의 조합으로 웃음을 만드는 것(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글을 '슬랩스틱 코미디'라고 규정짓고 있다)이 아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상황의 묘사가 어느 순간 '쿡!'하고 웃게 만드는 것, 이게 고수다. 김유정이 그렇고, 에릭 시걸이 그렇고, 이 작가 다니엘 월러스가 그렇다.

이렇게 빼어난 재주를 지닌 다니엘 월러스가 들려주는 '신화'이고 보면 책장이 '유쾌한 속도'로 팔랑팔랑 넘어가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 유쾌함의 저 아래에서 조용히 고개를 내미는 '슬픔'을 맛 본다. 이렇게 '은근히' 장치된 슬픔은, 대 놓고 들이대며 눈물을 강요하는 경우(영화 '편지'의 성당씬, 영화 '실미도'의 마지막 버스 씬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될는지)와는 그 격이 다르고 위력이 다르다.

'그 슬픔은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던져보게 된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답을 얻는다.

이제 나는 내 아버지를 만나면 그에게 물을 것이다. '아버지 젊었을 때 여자한테 인기 많았다면서요? 혹시 엄마 몰래 바람 피우고 그러신 거 아녜요?'라고.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신화'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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