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쿠키D
- 작성일
- 2020.3.25
녹나무의 파수꾼
- 글쓴이
- 히가시노 게이고 저
소미미디어
말로 다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말로 다 못한다. 자기의 감정을, 그 생각을,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마치 무지개의 수만가지 빛깔처럼 각양각색으로 움직이고 있는 내 안의 감상과 감각은 말로 다 못한다. 하나의 감상을 표현할 수 있는 몇 가지 적합한 단어는 찾을 수 있겠지만, 이 복잡하고 오묘한 감정의 총체를 고스란히 담아 전할 수 있는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다.
흔히 우리는 ‘말’로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조금 더 꼼꼼히 이 작용을 살펴보면 말 그 자체가 칼이 되어 날아와 꽂히기 보다는, 말 속에 채 다 담기지 못한 감정이나 말을 벗어나는 생각들이 화살이 되어 찌르는 게 아닌가 한다. 우리의 눈이 빛을 반사하는 물성에만 닿지 않고 그 내면 속으로 가닿아 혼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는 그곳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어떨까? 그의 진짜 마음이 어땠는지, 그의 생각과 감정의 세세한 결들이 어떤 감촉인지, 그가 간직한 추억의 색채와 소리와 선율을 알 수 있다면? 모든 진심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로의 마음을 몰라서 엇갈려버린 안타까운 순간들을 만회해볼 수 있지 않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녹나무의 파수꾼]은 ‘이런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면?’하는 상상력으로 빚은 환상소설이다. 녹나무와 가문의 비밀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속에 따듯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마음이 봄햇살처럼 내려와 앉는다.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모두를 언어만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녹나무에게 맡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믐날 밤에 녹나무 안에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염원합니다. 그것을 저희는 예념이라고 합니다. 염원을 맡긴다는 뜻이지요. 예념을 하는 사람은 예념자라고 합니다. 녹나무는 예념자의 그 모든 생각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보름날이 다가오면 그것을 뿜어냅니다. 그때 녹나무 안에 들어가면 그 염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혈연관계인 사람뿐이지요. ”
373-374쪽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들을 단순히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등의 이미지로만 연상하기에는 아쉽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작품만 해도 그렇다. 시간을 뛰어넘는 편지의 교신이라는 미스터리 장치를 통하여 히가시노 게이고가 독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 사는 일의 따듯함’이다.
[녹나무의 파수꾼]도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놀라운 일, 미스터리 혹은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근사한 일은 서로 간에 사소한 따듯함과 신망을 주고받을 때 일어난다. 녹나무는 다만 그 사이에 꽃처럼 피어난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향기로 전해줄 뿐, 녹나무 자체는 기적이 아니다. 염원을 남기고 간 사람의 용기와 그것을 전달 받은 사람의 각오와 애정이 진짜 기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원래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이제 나는 이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 작품 [녹나무의 파수꾼]은 너무 너무 좋다.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불운하게 여기는 스무살 청년의 ‘낭만적인 성장기‘가 이 작품의 전부였다면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젊은 층이 삶의 애착을 잃고 가족애는 희미해져가며 온고지신의 의미가 이미 오래전에 퇴색된 현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작품에 담았다.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레이토에게 우리 시대 10-20대의 얼굴이 비치고, 레이토와 치후네를 비롯하여 서로 연을 끊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사회의 가장 최소 단위인 가족이 해체되어 모두가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게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고독한 표정이 읽힌다. 역사와 전통과 계승이라는 든든한 뿌리와 혈맥이 자취를 감추고 현재의 효율성만이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데에 대한 비판은 일본과 한국이 다르지 않음을 이 작품이 보여준다.
[녹나무의 파수꾼]은 사상 최초로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에서 함께 출간되었다. 출간 상황만 특별한 게 아니다. 책 앞장에는 은색 글자로 작가의 전언이 인쇄되어 있기도 한다. 책 표지에서부터 영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작은 촉매제로, 곳곳의 작은 녹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녹나무의 파수꾼] 줄거리 (스포일러가 매우매우매우 강함 주의!)
레이토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 컸다. 레이토의 엄마 미치에는 긴자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다 유부남과 불륜 끝에 레이토를 혼자 낳아 키우다 레이토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유방암으로 세상을 뜬다. 후미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재산으로 근근이 레이토를 키웠다. 생활고 속에서 자란 레이토는 할머니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하여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식품제조회사에 취업했지만 누명을 쓰고 회사 사람들 눈 밖에 난다. 친구가 일하는 유흥업소 웨이터로 일을 옮겼으나 호스티스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켜 거기서도 쫓겨난다. 간신히 공작기계 회사로 재취업했지만 거기서도 역시 억울하게 쫓겨난다. 분한 마음에 공장 기계를 훔쳐 팔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경찰에 체포된 레이토를 방면해준 것은 레이토의 이모인 야나기사와 치후에였다. 이제까지 이모가 있는 줄도 몰랐던 레이토는 가족관계에 대한 세세한 사연도 듣지 못한 채, 이모가 요구한 방면의 대가로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게 된다.
녹나무는 레이토의 할아버지가 데릴사위로 있었던 ‘야나기사와’ 가문의 지경에 속한 일종의 소원나무다. 그믐날이면 누군가 녹나무에 염원을 전하고(예념) 보름날에는 염원을 남긴 자의 혈족이 녹나무로 찾아와 그 염원을 받는다(수념). 반드시 혈족만이 염원을 받을 수 있는데, 마치 유언장을 보관했다가 그것을 전해주는 듯한 녹나무의 신기한 작용은 벌써 백 년이 넘게 야냐기사와 가문의 파수꾼에 의해 지켜져 왔다. 녹나무 파수꾼이었던 치후에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자 급히 후계자를 찾아 나섰고 그녀의 먼 혈족, 심지어 그간 왕래도 하지 않았던 조카인 레이토가 파수꾼 견습생이 된 것이었다.
녹나무와 염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 레이토에게 처음에는 모든 것이 기이했다. 살면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도 받지 못했고 변변한 기술이나 꿈도 없이 살아왔기에 레이토의 생활 습관 역시 엉망이었다. 치후네 이모는 레이토의 사소한 습관과 태도를 교정하고 고쳐주면서 레이토를 야나기사와 가문에 소개한다. 자신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으로 여기던 레이토의 삶은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면서 그리고 치후네 이모와의 동행과 대화를 통해 숨겨진 가족사를 이해하게 되면서 점차로 근면하고 따듯한 방향으로 변해간다.
그런 레이토 앞에 유미가 나타난다. 유미는 녹나무에 기념을 하러 찾아오는 사지 씨의 딸로,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걸 막기 위해 레이토에게 도움을 구한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 아버지가 이상해 졌다는 것이다. 레이토와 유미는 사지 씨의 행적을 함께 추적하게 되고 그 끝에 사지 씨와 형 기쿠오의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된다. 천재 피아니스트로 촉망받던 기쿠오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열등감에 휩싸여 가족도 멀리하다 알콜 중독과 합병증으로 일찍 사망한다. 기쿠오는 사망하기 직전, 녹나무에 찾아와 가족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속죄를 염원으로 남겼고 동생 사지 도시아키는 형의 염원을 받은 후 비로소 형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사연을 듣게 된 딸 유미는 사지씨와 함께 기쿠오가 귀가 먼 상태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지은 피아노곡을 복원하여 연주회를 연다.
녹나무가 전달하는 염원이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마음, 그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의 총체임을 깨달은 레이토는 치후에 이모에게도 솔직한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치후에가 앓고 있는 인지장애를 숨기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곁에 있을 것임을 그러니 치후에 이모 역시 옆에서 자기를 계속 가르쳐달라고 이야기하면서, 둘은 비로소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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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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