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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과 을의 전쟁

 

이 영화에 관한 티비 다큐 프로를 보고 상영하는 극장을 찾고 찾아 가서 보았다. 이 영화의 감독 선호빈과 그의 아내 김진영은 결혼 4년차. 아이를 낳고부터 심해진 고부갈등 중에 “어머니와 아내 간의 수많은 진실 공방 관련 증거 자료로 아내가 부탁해서 촬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상처로 남을 만한 잔소리들을 여러 차례 했는데, 정작 아들인 선호빈 감독 앞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고...)

 

영화 속 며느리이자 김진영 자신인 진영씨는 밝고 쿨하고 공부도 엄청 잘한 똑똑한 아가씨였다. 결혼 후 고부갈등으로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황을 만나 마음이 피폐해진 그녀는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했는데..."라고 말하며 목이 멘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온가슴으로 끌어안고 한평생을 성공적으로 살아낸 보통의 시어머니 조경숙씨는 보고 싶은 손자를 보지 못하자 내가 뭘 어떡해야 하냐며 눈물을 닦는다.

 

며느리가 입혀온 손자의 옷이 못마땅해 보기만 하면 갈아 입히는 시어머니. 고부갈등이 폭발하자 시댁에 발길을 끊고, 넌 안와도 좋으니 손자만 보내라는 시어머니에게 "제가 싫으면 제 아이도 못보신다"는 며느리. 결혼전부터 친하게 만나던 시동생을 여전히 "호원아!" 하고 부르는 며느리를 보고 기겁하는 시어머니. "도련님'이라는 호칭은 하인이 주인집 아들을 부르는 호칭과 같다며 거부하는 며느리. 시어머니에게 당연한 것들이 며느리에게는 부당하다. 진영씨는 '며느리'는 내가 가진 여러가지 역할 중 하나일 뿐이지 내 정체성은 아니라 하는데, 시집의 모든 사람들은 진영씨는 '단지 며느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말 묘하게도 논리로는 며느리가 우위인데 실제 현장에서는 무논리 시어머니의 주장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난 처음부터 중립을 지키며 이 영화를 볼 마음이 아니었다. 상영 극장을 찾고 찾아간 건 진영씨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나는 철저히 며느리 편이다. 이 사회의 최고 약자인 며느리, 나는 약자의 편에 서기 위해 영화를 보러갔다.

 

시어머니는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며느리를 아들 몰래 구석으로 불러 야단쳤다. 신혼여행 중에 매일 아침 문안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양가에 전화 하고 허니문의 즐거움에 빠졌던 새색시는 눈물이 찔끔 났다. 결혼하고 첫 명절, 밥상 앞에서 쉼없이 심부름을 시켜대는 시어머니와 남자들 때문에 뒤늦게 식사가 거의 끝난 지저분한 밥상에 앉아 수저를 들어야했던 며느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날 먹다 남은 찬밥이 많으면 시어머니는 일부러 밥을 적게 해서 며느리에게는 찬밥을 먹였다. 아들 며느리의 신혼집 열쇠를 부동산에서 미리 받아 시어머니는 주인 허락 없이 맘대로 집을 드나들었다. 큰동서는 새 동서가 생기자 자기 인생의 지나간 날들의 시집살이 고생을 이제 네가 갚으라고 쪼아댔다......영화 속 이야기냐고? 아니, 내 이야기다. 

 

나는 수퍼우먼 컴플렉스, 착한 며느리 컴플렉스, 웬디 컴플렉스, 신데렐라 컴플렉스(좋은 사람이 되야한다는 내방식의 신데렐라 컴플렉스) 등등 온갖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잡음 없이 '의연하게' 그 역할들을(아내이자 엄마이자 딸이자 며느리이자 동서이자 올케언니이며 직장에 다니는) 수행했다. 결혼 십년이 되었을때 나를 진맥한 한의사는 무슨 힘든 일을 하기에 이렇게 기가 다 빠졌냐고 했다. 효도 타령이 남못지 않은 친정엄마까지 한몫하며 그들은 내 등골을 빼먹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 내가 붙인 제목은 '을과 을의 전쟁'이다. 남편이나 시아버지등 남자들이 그 갈등에서 빠져있기 때문이다. 선호빈 감독은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 사이에 끼어 상담까지 받을 정도로 힘들었다는데 그는 그 갈등에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제일이지, 무슨 일에든 당연히 아버지가 1등이야."라는 말을 들으며 떠받들어지는 시아버지, 이 가부장 제도 먹이사슬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시아버지는 더욱 우아하고 점잖게 아무 일도 안한다. 아, 그냥 쫌 해주면 안되냐는게 그들 남자들의 마음이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진영씨는 누구의 요구도 없었는데 스스로 시댁을 방문해 들어간다. 나는 실망했다. 영화는 갈등을 보여주며 그 갈등을 확장시키지 않고 스르륵 개인적인 화해로 아름답고 희망적이고 다시 가부장적인 자세로 끝맺음을 했다.(진짜 가족의 생얼굴을 보여주는 영화의 한계일지도)

 

'을과 을의 전쟁'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거나 '소모전'이라 폄하된다. 하지만 을들의 전쟁은 이전에는 있지조차 않았던 다음 단계를 위한 도약의 시대이다. 이제 을들은 내분을 평정하고 다음 단계 '갑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그래도, 내가(우리가) 희망을 거는 것은 법이나 사회의 시스템도 아니고, 남자들(남편)의 각성도 아닌 진영씨, 또다른 진영씨들이다.(아직은 그것 밖에 없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한다는 진영씨의 해맑은 용기가 장하고 기특하다. 컴플렉스로 범벅되어 파국을 맞고, 결국 전(前)세대 시니어들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오염돼버린 내 실패를 수많은 진영씨들이 회복해 주기를 바라고 응원한다.  

 

영화 중에 선호빈 감독의 고모(진영씨의 시고모) 인터뷰가 나온다. 며느리의 역할이 뭐냐는 질문에, 한눈에 보기에도 점잖은 중산층 부인으로 보이는 그녀가 "며느리는 집안의 최말단이야, 하인이지."라고 말해 나를 경악하게 했다. 내 결혼생활을 비교적 가까이서 본 친구는 내 시댁에 대해 "너를 호구로 생각하는 집단이 있다니 놀라워~"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 친구는 종가집 종부로 결혼해 허리가 휘도록 별별 일을 다 했으니.....우리는 갈 길이 멀고도 멀다, 축지법이라도 써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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