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요약 정리해 봤다. 사실 대단한 것이 못되는 것이 내가 본 책 자체가 일종의 요약본이기 때문이다. 원전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청소년용으로 나온 풀빛의 책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순서도 편역자가 일부 변경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 책의 본문 분량이 150여 페이지 정도인데, 내가 타자를 치면서 정리한 내용은 A4지 27쪽, 원고지 202쪽 정도니까 말이 요약이지, 요약도 아니다. 뭐.. 그래도 타자를 친다는 목적 의식이 있어서 다 읽기는 했다는 점이 이 요약의 의의..

Text :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저, 홍석영 편역, 풀빛

들어가는 말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 물음에 대해 탐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강의하는 형식을 빌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덕목이 필요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많은 내용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물음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첫째, 행복이란 무엇인가, 둘째,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셋째, 행복과 관련된 도덕적인 덕, 즉 품성의 덕은 무엇인가다. 덕,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우애 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읽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우리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일러두기]
1. 이 책은 독일판(1972)을 주된 텍스트로 사용하였고, 국내 번역본 중에서는 서광사판(2003)을 참조하였다.
2. 이 책은 원래 10권으로 되어 있으나,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중심으로 6부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주제에 따라서 내용과 순서를 일부 바뀌었다.
3.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 부와 각 장 앞에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

1부 행복에 대하여

1. 최고의 선

(편저자 요약)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답들은 모두 ‘행복’으로 모아진다. 행복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의 선이다. 어떤 사람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같은 사람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매우 잘’ 수행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해지며, 그런 행복은 생애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인 ‘정신의 덕이 있는 활동’을 행복이라고 규정하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탐구한다.

사람들이 찾는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어떤 탐구를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할까?
아마도 무엇인가 좋은 것, 즉 선(善)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러 목표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일의 목적으로 삼는 것,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 바로 그것을 ‘선(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어떤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모든 선 가운데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대개 비슷하다. 즉, 보통 사람이나 교양 있는 사람이나 모두 ‘행복’을 최고의 선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의 생활 모습
- 첫째, 향락적 생활, 쾌락을 행복이라 여기는 삶
- 둘째, 정치적 생활, 명예로운 삶을 행복이라 여기는 삶
- 셋째, 관조적 생활, 명상하고 깊이 생각하는 삶 => 이성적 생활, 진리를 탐구하는 삶의 모습

최고의 선 = 궁극적인 목적 즉 그 자체가 목적으로 추구되는 것. 바로 행복

∴ 행복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요, 다른 여러 가지 선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이며, 다른 모든 행동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 자족 : 어떤 한 개인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아내, 친구, 나아가 동포들까지도 만족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기능
- 첫째, 생명의 기능 -> 식물에게도
- 둘째, 감각과 운동의 기능 -> 동물에게도
- 셋째, 정신의 이성적 활동 기능 -> 사람만이 지닌 특별한 기능
∴ 사람만이 지닌 특별한 기능은 정신의 이성적 활동 기능 = 인간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한다는 것. -> 알맞은 행위의 규범, 즉 덕을 가지고 수행할 때 잘할 수 있다.
∴ 선이란 덕과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
∴ 참된 행복은 이성을 아주 잘 실현할 때 이루어진다. -> 평생 이루어져야 하는 활동
-> 행복에는 외부적인 여러 가지 선(친구, 재물, 정치적 권력 등)도 필요.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행복의 정의 : 덕이 있는 정신의 활동
행복은 자신의 삶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것.
ex) 트로이의 마지막 임금 프리아모스의 수많은 행운과 말년의 불운.
-> 정신의 고귀함과 위대함으로 모든 불행을 견뎌 낸다면, 불행 속에서도 고귀한 성품은 내내 밝은 빛을 발할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 ?
- 비참해지지 않는다. -> 가증스럽거나 비열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
- 쉽게 변하지 않는다. -> 불운 때문에 쉽게 불행에 빠지지도 않는다.

행복한 사람 : 일생을 통해 완전한 덕을 지키며 활동하고, 동시에 외부적인 여러 가지 선도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또 앞으로도 갖추게 될 사람을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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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덕

<편저자 요약>
행복이 완전한 덕에 따른 활동이라면, 이제 덕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덕은 ‘인간의 덕’이다. 인간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을 의미한다. 정신의 덕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은 지적인 덕이고, 너그러움이나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그러면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정념, 즉 감정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념이 넘치거나 모자르지 않은 중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은 수학에서 말하는 평균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중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며, 또한 참된 덕이다.

덕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덕 :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덕의 종류
1) 지적인 덕 <- 교육에 의해 생성, 발전
2) 도덕적인 덕 <- 습관의 결과, ‘에티케’(도덕, 윤리) - ‘에토스’(습관)란 말을 고친 것.
: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습관을 통해 완전하게 얻는 것.
∴ 덕은 먼저 실천해 보고나서 비로소 배워 알게 된다.

도덕적 덕과 쾌락이나 고통과 관계가 있다. 쾌락과 고통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 즉 덕이 있는 사람이 되고,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 즉 덕이 없는 사람이 된다.

도덕적인 덕의 특징은 무엇일까?

정신 속에 생기는 것 : 정념(情念), 능력, 성품
- 정념 : 욕망, 분노, 공포, 태연함, 질투, 환희, 사랑, 증오, 동경, 경쟁심, 연민 등 쾌락 또는 고통이 따르는 감정들.
- 능력 : 우리가 이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 즉 노여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것.
- 성품 : 정념에 대해 잘 처신하거나 잘못 처신하게 해 주는 것.

∴ 정념 때문에 칭찬이나 비난을 받지 않는다. 즉, 공포나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칭찬이나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 즉, 우리는 정념이 아닌 덕과 악덕 때문에 칭찬이나 비난을 받는다.

중용은 어떤 상태인가?

도덕적인 덕이 정확하고 좋은 것이 되려면 중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정념에는 지나침과 모자람, 그리고 중간이 있다. 예를 들어 공포나 분노, 쾌락이나 고통은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 어느 경우도 좋은 것이 못된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마땅한 사람들에게,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이런 것을 느끼는 것이 중간이고 동시에 최선이다. 이것이 곧 덕의 특징이다.

“선하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요, 악하게 되는 길은 여럿이다.”

덕은 중용이다. 지나침과 모자람은 악덕의 특징이고, 중용은 덕의 특징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과 정념에 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정념의 경우 악의, 파렴치, 질투 등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다. 행동의 경우에도 간음, 절도, 살인 등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중용은 어떤 모습일까?

ex) 두려움이나 태연함의 중용은 용기다. 이 경우에 모자람은 무모함이며 지나침은 비겁함이다. 쾌락이나 고통의 중용은 절제이며, 그 지나침은 방종이나 방탕이다. 모자란 사람에 대한 명칭은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무감각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은 어떤 경우에는 모자람과, 어떤 경우에는 지나침과 더 대립한다. 예를 들면 용기는 그것의 지나침인 무모함이 아니라, 모자람인 비겁함과 더 대립한다. 무모함이 비겁함보다 용기와 좀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절제는 그것의 모자람인 무감각이 아니라, 지나침인 방종과 더 대립한다.
관계 있는 것모자람중용지나침두려움과 태연함비겁용기무모함쾌락과 고통무감각절제방종, 방탕돈인색관후낭비, 방탕명예와 불명예비굴긍지오만함, 허영노여움무성미, 무기력온화함성급함진리거짓 겸손진실허풍유쾌함무뚝뚝함재치익살심술궂음친절비굴, 아첨(중용과 더 대립되는 것을 굵은 글자로 표기)

어떻게 중용을 지킬 수 있을까?

중용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저 파도와 물거품을 피하여 배를 대어라.”처럼, 우선 중간의 것과 더욱 반대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양쪽 끝 가운데 하나가 더 그릇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덜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용을 잘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차선의 방법으로써 악이 가장 적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자기 자신이 어느 악덕에 쉽게 빠지는가를 잘 살펴봐야 한다.

모든 일의 중간 상태는 칭찬할 일이지만, 어떤 때는 지나친 쪽으로, 또 어떤 때는 모자란 쪽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가장 쉽게 중용과 옳은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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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도덕적인 덕

1. 용기

(편저자 요약)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도덕적인 덕은 정념에 대한 처신인 성품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의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했다. 그 다음 각각의 정념에 대한 처신 중 중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도덕적인 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제부터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인데, 그 첫 번째가 용기다.
용기는 두려움과 태연함의 중용이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한 것을 마땅한 동기에서, 마땅한 모습으로, 마땅한 때에 두려워하고, 또 태연한 마음을 갖는 일도 이와 같이 한다. 용기는 고귀한 것이고, 그 목적도 고귀하다. 용감한 사람이 무서운 것을 참고 견디면서 용기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은 고귀한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용기가 아닌 것들도 있다. 군인의 용기, 용병의 경험에서 나온 두려움 없는 행동, 격정, 낙관적인 사람들의 느긋한 태도, 그리고 위험을 알지 못해 용기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용기란 무엇일까?

- 용기는 두려움과 태연함의 중용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무서워하는 것들은 온갖 악을 포함하고 있다.
∴ 용기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할 만한 것만을 두려워한다.

- 용감한 사람은 어떤 경우의 죽음에 대해서나, 예를 들어 바다에서 죽든가 병들어 죽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 쓰지 않는다. 그러면 용감한 사람은 어떤 경우의 죽음에 마음을 쓸까? 분명히 가장 고귀한 죽음에 마음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의 죽음, 즉 전사(戰死)는 가장 크고 고귀한 위험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 그러나 가난, 사랑, 그 밖에 무엇이든지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하여 죽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고, 오히려 겁쟁이가 하는 행동이다. 골치 아픈 일을 피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탓이고, 이런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용기라고 잘못 불리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참된 용기가 아닌데오 용기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바로 군인의 용기, 용병의 용기, 격정, 낙관적인 행동, 위험을 모르는 데서 오는 행동 등이다.

- 군인의 용기
군인은 용감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처벌이나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혹은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얻게 될 명예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처럼 보인다.

용기는 고귀한 명예를 바라고, 비열한 불명예를 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들의 강요로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수치심이 아니라 공포심에서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고, 또 수치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이므로 참된 용사보다 못하다.

강요 때문이 아니라,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용감한 행위를 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따라서 군인의 용기는 진정한 용기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 용병의 용기

용병들은 훈련 받은 운동 선수가 훈련 받지 않은 선수와 싸우듯이 싸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람은 가장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무장을 가장 잘 갖추고 신체 단련이 가장 잘 된 사람이다.
하지만 용병도 위험률이 높아지고, 수가 줄고, 장비가 뒤떨어지면 겁쟁이가 된다. 실제로 헤르메스 신전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라. 기원전 353년 카이로네이아 싸움에서, 보이오티아에서 온 용병들은 앞장서서 도망쳤다. 그러나 징집된 군인들은 아크로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
이런 예에서 보듯 용병들은 불명예보다 죽음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용병의 용기는 참된 용기일 수 없다. 용감한 사람은 결코 이런 사람이 아니다.

- 격정

격정도 때로는 용기로 생각된다.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돌진하는 야수처럼, 격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용감한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용감한 사람 역시 격정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된 용기가 되려면 격정에 선택과 목적이 더해져야 한다. 사람도 짐승과 마찬가지로 노여울 때는 고통스럽고, 복수를 하고 나면 통쾌해진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싸우는 사람은 호전적이기는 해도 용감한 사람은 못 된다. 이들의 행동은 명예를 위한 것도, 순리에 따른 것도 아닌 강렬한 감정, 즉 격정에 따른 것뿐이기 때문이다.

- 낙관적인 행동

낙관적인 사람은 태연하다는 점에서 용감한 사람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낙관적인 사람은 자기가 가장 강하고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다.

용감한 사람은 예상한 일보다는 돌발적인 일을 더욱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마음의 준비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를 예상하여 낙관하는 낙관적인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리자 주)

- 위험을 모르는 데서 오는 행동

이들은 낙관적인 사람만도 못하며, 그러므로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용기와 고통은 어떤 관계인가?

용기는 두려움과 태연함에 관계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두려움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두려운 일에 부딪혀서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고 잘 견디는 사람이, 누구나 태연한 태도로 대응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태연함을 유지하는 사람보다 더 용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일을 잘 견뎌 내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따라서 용기는 고통을 포함하는 것이며,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다. 즐거운 일을 피하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것을 참고 견디는 일이 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덕을 온전히 가지고 있거나 현재의 삶이 행복할 수록 죽음은 더욱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편에서도 그는 용감하다. 아니, 이럴수록 더욱 용감할 것이다. 왜냐하면 용기 있는 사람은 그만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전쟁에서의 고귀한 행동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적에 도달한 경우를 빼면, 덕을 행하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 절제

(편저자 요약)
절제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중용으로, 특히 미각이나 촉각의 쾌락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돼지와 달리 미각 때문에 너무 많이 먹어서 병이 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먹지 않고 여러 날을 견디기도 한다. 절제는 이러한 인간의 특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절제와 반대되는 것에는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하는 방종과 육체적 쾌락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무감각이 있다. 그러나 무감각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주로 방종이 절제와 대립한다. 방종은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이므로 인간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절제하는 사람은 쾌락에서 마땅한 것을, 마땅할 정도로, 마땅히 해야 할 때 추구한다.

절제란 무엇인가?

절제 : 쾌락에 대한 중용, 방종도 같은 영역에서 나타남.

쾌락
- 정신적 쾌락 : 명예, 학문을 좋아하는 것 -> 절제한다거나 방종한다고 하지 않는다.
- 육체적 쾌락 -> 절제와 관련. but 모든 육체적 쾌락과 관련되는 것은 아님.
ex) 시각, 청각, 후각에 대해서는 해당 없음 but 고기나 화장품은 해당됨.
=> 음식은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
=> 다른 동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감각들.
-> 미각, 촉각
=> 다른 동물에게 없는 감각 but 미각은 절제와 별 관련이 없음

사람들은 언제나 촉각에서 오는 실제적 향락, 즉 음식물이나 성교같은 데서 얻는 향락에서 기쁨을 맛본다. 어떤 미식가가 자신의 목구멍이 학의 목구멍보다 길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그가 감촉에서 쾌락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방종과 관계가 있는 감각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동물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런 일에서 기쁨을 느끼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일을 좋아하는 것은 동물과 같은 것이다. 방종한 사람이 가장 중시하는 감촉은 몸 전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몸의 어떤 부분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절제와 반대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절제하는 사람은 이런 것들에 관하여 중간을 지킨다. 즉, 그는 방종한 사람이 가장 즐기는 것을 즐기지 않고-오히려 이런 것들을 혐오하며-좋아하면 안 되는 것들은 대체로 좋아하지 않으며, 또 좋아해도 되는 것이라도 지나치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들이 없을 때에도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설사 고통을 느낀다 해도 적당한 선을 넘지 않는다.

방종은 비겁보다 자신의 의지와 더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방종은 쾌락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비겁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데, 쾌락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고통은 우리가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종이 더 자신의 의지와 관계가 있으며, 더욱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인생에는 방종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많아서 습관이 되기도 쉽다.

3. 관후

(편집자 정리)
재물과 관련되는 중용은 관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며, 심지어 재물을 사람보다 귀하게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기도 하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적절하게 얻고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관후는 재물을 적절하게 얻고, 적절할 때에 사용하는 것과 관계있는 덕이다.
특히 관후한 사람은 줄 만한 사람에게, 줄 만한 양을, 줄 만한 때에 올바르게 준다. 반대로 재물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방탕이며,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것은 인색이다. 방탕과 인색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방탕은 주는 데에서 지나친 것이므로 관후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인색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인색이 관후와 더 대립된다. 관후와 비슷한 것으로 호탕이 있다. 호탕은 ‘소비에서의 관후’라고 할 수 있다.

관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재물에 대한 중용은 관후, 즉 너그럽고 후함이다. 관후한 사람은 어떤 다른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는 일, 특히 주는 일을 잘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방탕과 인색은 재물에 관련된 지나침과 모자람이다.

자신의 재물을 남에게 주는 사람은 관후하다는 말을 듣자면, 남의 재물을 갖지 않는 사람은 공정하다는 칭찬을 받을 뿐이다. 관후한 사람은 모든 덕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들은 이롭고 도움이 되는 존재이며,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덕이 있는 행위는 고귀하며, 또 고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덕이 있는 행위를 한다. 그러므로 관후한 사람은 다른 덕이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일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주며, 또 올바르게 준다. 즉, 그는 줄 만한 사람에게, 줄 만한 양을, 줄 만한 때에, 그리고 이 밖에 올바르게 주는 일에 맞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준다. 그리고 그는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서 준다.

관후와 반대되는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관후와 반대되는 것에는 인색과 방탕이 있다.

방탕한 사람이 인색한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방탕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반면 인색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이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색한 성질은 방탕과는 달리 고칠 수 없고, 방탕한 성질보다 더 깊이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혀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소비와 관련된 덕에는 무엇이 있을까?

호탕 역시 재물에 관한 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호탕은 관후와는 달리, 소비 행위와만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소비 행위의 규모가 관후보다 훨씬 크다. 호탕은 ‘큰 규모에서의 알맞은 소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소비하는 사람, 그때의 사정, 그리고 소비 대상에 적절한 것이어야만 한다.

호탕한 사람은 자신의 일에 돈을 쓰지 않고 공공의 일에 돈을 쓴다.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결혼식이나 이와 비슷한 경우에만 호탕하게 돈을 쓴다.

4. 긍지

(편저자 정리)

긍지는 명예와 관계되는 중용으로, 자부심과 비슷하다. 명예는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긍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잘 파악하여 서두르거나 흥분하는 일 없이 고귀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귀하게 여긴다.
반면에 긍지가 지나친 경우에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보다 더 높게 자신을 평가하여 거만해지고, 긍지가 부족한 경우에는 자신의 가치보다 자신을 낮게 여겨 비굴해지며,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겨 명예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긍지에 더 반대되는 것은 거만보다는 비굴이다. 비굴이 거만보다 더 흔하고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만이나 비굴이 악덕인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긍지는 무엇일까?

명예와 관련이 있는 중용은 긍지다. 긍지는 ‘정신이 크다.’라는 뜻으로, 자부심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긍지 있는 사람은 자신이 큰 일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또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자기의 덕에 비추어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도, 이성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작은 일에 잘 어울리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제하는 사람이기는 해도 긍지 있는 사람은 못된다. 마치 조그마한 사람이 단아하고 어여쁠 수는 있으나 아름다울 수는 없듯이, 긍지에는 큰 것과 관련이 있는 위대함이 포함되어 있다.

긍지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큰 명예에 관심을 두고, 사소한 명예는 무시한다. 그러므로 부나 권세, 그리고 모든 행운이나 불운에 대해서 자기의 마음을 잘 가눈다. 그래서 행운을 만나도 지나치게 좋아하지 않고, 불운을 만나도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는 명예에 대해서도 그것이 큰일이나 되는 것처럼 처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세나 부는 명예를 주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명예조차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이러한 사람에게 다른 것들은 더욱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래서 긍지 있는 사람을 거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좋은 조건들도 가지고 있으면서 선한 사람은 더욱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덕이 없으면 그러한 좋은 조건들도 아무 소용이 없다. 좋은 조건들을 가졌으나 덕이 없는 사람은 거만하고 예의가 없다. 그는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긍지 있는 사람이 남을 무시하는 경우에는 그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정당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긍지와 관련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긍지가 부족하면 비굴하고, 지나치면 쓸데없이 거만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거만보다는 비굴이 긍지와 더 반대된다. 왜냐하면 비굴이 더 흔하고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5. 온화함

(편저자 요약)

우리는 생활 속에서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거의 화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하는 일과 관련된 중용이 바로 온화함이다. 즉, 마땅히 화를 내야 할 때 마땅한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이 온화함이며, 노여움을 표현하는 올바른 태도다. 이에 비해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은 성급함이라 할 수 있고, 화를 내는 데에 모자란 것은 무성미라고 할 수 있다. 온화함에 대해서 더 반대되는 것은 성급함이다. 성급함이 더 흔하고, 성급한 사람이 더 거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화함은 노여움과 관계된 중용이다. 사실 온화함이라는 말은 모자람 쪽에 가까운 것이지만, 여기에 꼭 알맞은 명칭이 없고 양 극단에도 적절한 명칭이 없기 때문에 온화함으로 중간 상태를 나타내고자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자란 쪽에도 적절한 명칭이 없다. 다만 지나친 쪽은 ‘성급함’, 곧 ‘화를 잘 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연히 노여워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당연히 노여워해야 할 사람에게, 적당하게, 적절한 때에, 적당한 시간 동안 노여워하는 사람은 칭찬받는다. 이런 사람이 온화한 사람이요, 그의 온화함은 칭찬을 받는다. 즉, 온화한 사람은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순리에 따라 옳은 태도로 노여워해야 할 일에 적당한 시간 동안만 노여워한다.
그러나 따져 보면 그는 오히려 모자란 방향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온화한 사람은 원수를 갚기보다는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화함의 모자람은 그것을 ‘화를 잘 안 냄’, 즉 ‘무성미’ 또는 ‘화낼 줄 모름’ 등 어떤 것으로 부르든 간에 모두 비난을 받는다. 왜냐하면 노여워해야 할 일에 대해서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고 할 수 잇기 때문이다.

온화함의 덕과 비교해서 더 나쁜 것은, 노여움이 부족한 것보다는 오히려 지나친 것이다. 세상에는 화를 내는 경우가 더 흔하고,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더욱 거북하기 때문이다.

6. 사교상의 덕

(편저자 요약)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우리도 가족, 친구, 선생님, 또는 사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생활에서 어떤 사람은 남들과 좋은 만남을 가져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데 비해, 어떤 사람은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위해 필요한 중용의 덕을 우애, 진실함, 재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지나침은 아첨, 허풍, 익살이고 모자람은 버릇 없음, 거짓 겸손, 무뚝뚝함이라고 하였다.

우애는 무엇과 관계되는가?

중간 상태가 권장할 만한 것인데, 이 중간 상태란 칭찬할 만한 것은 올바르게 칭찬하고, 꾸짓을 만한 것은 올바른 태도로 꾸짖는 것을 말한다. 이 상태를 나타내는 정확한 표현은 없지만, 우애가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에 대한 사랑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정과는 다르다. 즉, 이러한 상태인 사람이 모든 일에 올바른 태도로 임하는 것은 누구를 미워하거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생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실성이 왜 필요할까?

진실성은 자신이 맺은 약속이나 계약을 얼마나 진실하게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들에서도 얼마나 공정하게 행동하는가와 관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에도 진실하게 행동한느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중대한 일이 생겼을 경우 더욱 진실하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허위 그 자체를 싫어하므로,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중요한 순간에는 더욱더 그런 허위를 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실을 말할 때에도 약간 소극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속이 깊어 보인다.

별뜻없이 과장되게 보이려 하는 사람은 멸시를 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사람은 악한 사람이기보다는 허튼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목적이 있어서 큰소리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세상의 호평이나 명예 때문에 큰소리치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낫지만, 돈이나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 때문에 큰소리치는 사람은 추악하다. 이것은 마치 거짓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사람과 세상의 칭찬이나 이익 때문에 거짓말하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재치는 왜 필요할까?

의젓한 사람, 또는 점잖은 사람은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답게 말하며,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인다. 점잖은 사람의 농담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농담과 다르며, 교육받은 사람의 농담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농담과 다르다. 그가 하는 농담은 천박하지 않고, 은근히 비치는 풍자와 같다. 그가 귀를 기울이는 농담도 역시 그가 말하는 농담과 같은 종류다. 그러나 그는 야유와 같은 농담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야유는 일종의 우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젓한 사람이라 부르건, 재치 있는 사람이라 부르건 이러한 사람이 바로 중용을 지키는 사람이다.

반면에 익살꾼은 자기 해학의 노예다. 그는 남을 웃길 수만 있다면 자신이나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입에 올리거나 귀 기울이지 않을 말까지도 한다. 그리고 무뚝뚝한 사람은 사교에서 아무 쓸 데가 없다. 그는 사교에 기여하는 바도 전혀 없이 모든 일을 언짢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식과 오락은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므로 무뚝뚝한 사람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삶에서 사람들과 사귈 때 필요한 중용은 세가지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사람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진실성)만 진실과 관계되고, 다른 두 가지(우애, 재치)는 유쾌함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유쾌함과 관계되는 이 두 가지 중용 가운데 하나는 인생의 사회적 관계에서 발휘되고, 다른 하나는 농담에서 발휘된다.

7. 수치심, 부끄러움을 아는 것

(편저자 요약)

앞에서 살펴본 덕 외에 특히 젊은이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자기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아직 덕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쳐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따라서 잘못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고칠 수 있다. 그래서 맹자도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수오지심’이 의로움의 발단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자기 행동을 항상 되돌아봐야 한다.

- 수치심(염치)을 하나의 덕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품이라기보다 감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치심을,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공포심과 비슷하게, 불명예에 대하여 느끼는 공포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수치심은 모든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고, 다만 젊은이들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감정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아 잘못을 저지르는데, 수치심이 이것을 억제해 준다.

- 부끄러움은 좋지 못한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에게는 속할 수 없다. 그러나 좋지 못한 행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진짜로 추악한 행위이건, 그저 일반적으로 보기에 추악한 행위이건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든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다.

8. 정의

(편저자 요약)

우리가 누군가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때, 과연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고 정의롭다고 말하는 짓일까? 대개 그것은 옳은 일을 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바로잡으려는 것과 관계가 있다. 또한 법을 통해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도 정의다. 왜냐하면 법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정의이고, 법을 어기는 것은 정의롭지 못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정의는 덕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의 선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정의는 부분적인 정의로 구분할 수 있다. 즉, 명예와 돈, 공동소유물 같이 공동체에서 분배되는 것과 관계되는 분배 정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바로잡는 시정 정의, 교환 관계에서의 균등을 추구하는 교환 정의, 공동체에서의 균등한 자유와 관련된 정치적 정의가 그것이다.

정의의 뜻은?

먼저 정의(正義)는 어떤 행위와 관계가 있으며, 어떤 종류의 중용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의를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하고, 옳게 행동하게 하며, 또 옳은 것을 원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의 뜻을 알기 위해 먼저 정의롭지 못한 여러 가지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욕심이 많고 불공정한 사람은 모두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법을 지키는 사람과 공정한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고, 법을 따르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법은 경우에 따라 모든 사람들, 또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제정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국가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조건들이 많아지게 하는 행위를 옳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우리 이웃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덕이며, 가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정의 속에는 모든 덕이 다 들어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정의의 덕이 완전한 까닭은 그 덕을 가진 사람이 그 덕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웃을 위해서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덕 가운데 정의만이 ‘다른 사람을 위한 선’으로 여겨진다. 정의는 지배자이건 동료이건 관계없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악의 사람은 자신의 악함을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친구들에게까지 미치는 사람이고, 반대로 최선의 사람은 자신의 덕을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 모두에게까지 미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덕의 일부가 아니라 덕 전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의에 반대되는 정의롭지 못함은 악덕의 일부가 아니라 악덕 전체다.

좁은 의미의 정의롭지 못함은 명예나 금전과 관계되고 그 동기가 이익에서 오는 쾌락이지만, 넓은 의미의 정의롭지 못함은 선한 사람과 관련된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분적인 정의와 부분적인 정의롭지 못함에 대해, 그리고 부분적인 옳음과 부분적인 옳지 않음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분적인 정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분배 정의

옳지 않은 사람, 또는 옳지 않은 행위는 모두 불공정하거나 불균등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불균등 사이에는 하나의 중간이 분명히 있다. 이 중간이 바로 균등이다. 즉,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는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균등이 있다. 그런데 옳지 않음이 불균등이므로, 옳음은 균등이다.

(분배에서의) 옳음이란 일종의 비례라 할 수 있다. 비례는 비율과 비율의 균등성이며, 적어도 네 항으로 성립한다. 즉, 균등한 사람들과 분배되는 사물들의 관계에서 ‘사람A:사람B = 사물C:사물D = 사람A+사물C:사람B+사물D'의 식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A항의 B항에 대한 관계는 C항의 D항에 대한 관계와 같고, 또한 A항의 C항에 대한 관계는 B항의 D항에 대한 관계와 같다.

옳지 않은 일은 어떤 항이 지나치게 커지고 다른 항이 지나치게 작아질 때 일어난다. 이 경우에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너무 많은 선을,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은 너무 적은 선을 얻는다. 악의 경우에는 상황이 이와 반대인데, 보다 작은 악이 보다 큰 악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을 선택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더욱 큰 선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옳음의 한 종류인 분배 정의다.

시정 정의

시정 정의에서의 옳음은 분배 정의와는 다르다. 시정이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거나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공공의 소유물을 나눌 때는 위에서 말한 분배 정의의 비례를 따른다. 즉, 공공의 재화는 당사자들이 거기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 옳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정의도 사실 일종의 균등인데, 이때의 비례는 산술적이다.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히고 다른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었을 경우, 또는 어떤 사람이 살해하고 다른 어떤 사람이 살해당했을 경우, 가해와 피해는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런 경우 가해자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손실이 균등해지도록 해야 한다.

교환 정의

모든 물품은 어떤 한 가지로 계산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한 가지가 실상 모든 것을 연결해 주는 수요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서로 물품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균등하게 필요로 하는 일이 없다면 교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돈이 계약에 의해 수요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 말은 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며, 또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도 소용없게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정의

정치적 정의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공동생활에서의 균등함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정의란 법적으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의롭지 못함과 관련이 있다. 법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 행해지는 경우에 옳음과 옳지 않음을 판단한다.
또한 우리는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옳은 이치에 따라 지배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사람이란 원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움직이기 때문에 폭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정의에는 본성적인 것도 있고 인위적인 것도 있다. 본성적인 것이란 어디서나 같은 힘을 갖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인위적인 것은 본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었던 것이나 일단 정해진 다음에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옳은 행위와 옳지 않은 행위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행할 경우에만 판단할 수 있다. 무의식적인 행동은 우연히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옳은 행위라거나 옳지 않은 행위라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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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지적인 덕

(편저자 요약)

앞서 우리는 사람은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아닌 중간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중간적인 것, 즉 중용이 올바른 이치에 이르는 큰 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 올바른 이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정신의 덕은 도덕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나누어진다. 도덕적인 덕은 선택과 관계된 성품의 상태인데, 좋은 선택을 하려면 이치도 옳아야 하고 욕구도 바른 것이어야 한다. 지적인 덕은 긍정과 부정을 통해 정신이 진리를 얻도록 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학문적 인식, 기술,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이성이 그것이다. 도덕적인 덕이 주로 습관의 결과라면, 지적인 덕은 주로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지적인 덕이란?

이성적인 부분의 기능은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부분으로 하여금 진리를 잘 인식하게 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지적인 덕이다. 정신으로 하여금 긍정과 부정을 통하여 진리를 얻게 하는 상태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학문적 인식, 기술,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이성이 그것이다. 그럼 이 상태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학문적 인식이란?

모든 학문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그런데 가르친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이미 알려진 것’에서 출발한다. 때로는 이미 알려진 사실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이끌어 내는 귀납을 통해서, 때로는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증명하는 연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학문적 인식은 또한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어떤 사람이 일정한 방식으로 확신을 가지고 근본 명제(가장 먼저 제시되는 원칙이나 원리)를 분명히 인식했을 때, 그는 학문적 인식을 가진 것이다.

기술이란?

기술이란 ‘참된 이치에 따라 제작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모든 기술은 생성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리고 제작자가 목적을 가지고 제작하려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잘 만들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둔다. 기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생성하는 것들’ 또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생성하는 것들’과는 관계가 없다. 기술은 제작과 관련된 것이지, 행동과 관계된 것은 아니다.

실천적 지혜란?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는 어떤 특수한 점에서, 예를 들면 어떤 것이 건강과 체력에 좋은가 따위에 관해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훌륭하게 살피고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깊이 있게 잘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이나 기술이 아니다. 학문적 인식이 아닌 까닭은 각각의 행위를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기술이 아닌 까닭은 행동과 제작이 서로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혜는 ‘인간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참된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다.

실천적 지혜란 ‘인간적인 선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참된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하겠다.

이성이란?

학문적 인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들에 관한 이해다. 그리고 논증의 결론들과 모든 학문적 인식은 여러 근본 명제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학문적 인식의 근본 명제 자체를 아는 것은 학문적 인식일 수도 없고, 기술일 수도 없고, 실천적 지혜일 수도 없다. 학문적 인식은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고, 기술이나 실천적 지혜는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근본 명제들은 지혜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학문적 인식, 실천적 지혜, 이성 중에서 근본 명제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이성이다.

철학적 지혜란 무엇인가?

철학적 지혜는 모든 학문적 인식 가운데 가장 완성된 것이다.

철학적 지혜를 지닌 사람은 근본 명제들에서 이끌어 낸 명제뿐만 아니라, 근본 명제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러므로 철학적 지혜는 이성과 학문적 인식이 합쳐진 것이며,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지혜를 ‘가장 고귀한 것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정치의 기술이나 실천적 지혜를 최선의 지식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철학적 지혜는 언제나 같은 것을 다루고, 실천적 지혜는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을 다룬다. 이런 까닭에 하등동물조차도 어떤 것들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실천적 지혜는 행동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경우와 개별적인 경우 모두에 해당되지만, 특히 개별적인 경우를 더 중시한다. 그래서 실천적 지혜는 철학적 지혜보다 더 위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의술이 건강보다 우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실천적 지혜는 철학적 지혜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지, 철학적 지혜에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지적인 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해력과 관계있는 것은 실천적 지혜와 관계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해력과 실천적 지혜가 같은 것은 아니다. 실천적 지혜는 명령을 내리는 것인 데 반해 이해력은 그저 판단만 하는 것이다.

판단력은 공평한 것을 올바로 가려내는 힘이다.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것은 참된 것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는 어떤 관계인가?

지적인 덕의 효용성

철학적 지혜는 행복을 만들어 낸다. 철학적 지혜는 전체 덕의 일부이기 때문에, 철학적 지혜를 마음의 상태로서 소유하고 활동시키면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일이든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인 덕을 모두 실천해야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덕은 우리에게 올바른 목적을 목표로 삼게 하고, 실천적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게 하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혜가 바로 이 능력은 아니지만, 영리함이 없다면 실천적 지혜는 바르게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영리가 실천적 지혜의 상태가 되려면 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실천적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

실천적 지혜 없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또 도덕적인 덕이 없이는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또 덕이 없으면 선택을 올바로 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실천적 지혜가 없어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덕은 목적을 결정하고, 실천적 지혜는 목절을 실현시켜 주는 것들을 실행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적 지혜가 철학적 지혜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실천적 지혜는 철학적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기도록 마음을 쓰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철학적 지혜를 위하여 명령하는 것이지, 철학적 지혜에 대하여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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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자제와 쾌락

(편저자 요약)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까지 주로 추구해야 할 목표나 성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이와 반대로 피해야 할 성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피해야 할 도덕적 성품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악덕과 자제력 없음, 그리고 짐승 같은 상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악덕은 지금까지 살펴본 덕의 반대이므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제력 없음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것들을 살펴본 뒤 자제와 밀접히 관련 있는 쾌락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검토한다.

자제

우리가 피해야 할 도덕적 성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악덕과 자제력 없음과 짐승 같은 상태다. 이 세 가지에 반대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즉, 악덕의 반대는 덕이고, 자제력 없음의 반대는 자제다. 그리고 짐승 같은 상태의 반대는 초인간적인 덕, 즉 영웅적이고 신적인 성질의 덕이다.

- 자제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문제 제기

1. 판단을 올바르게 내리는 사람이 자제력 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
- 어떤 사람은 인식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
ex) 소크라테스 : 자제력이 없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
누구도 자신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오직 무지에 의해서만 그런 행동을 한다고 보았다.
=> 하지만 사실을 관찰해 보면 이런 생각은 잘 맞지 않는다. 욕정에 빠지는 사람은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빠진다. 또 술을 마시는 것이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다.

2. 만일 자제할 줄 아는 아는 사람에게 강하고 나쁜 욕정이 있다면, 절제하는 사람은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절제하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거나 나쁜 욕정이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런 욕정들이 없을 수 없다.

3. 만일 자제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억지 의견이나 모든 억지 의견을 받아들이게 한다면, 더구나 그것이 그릇된 의견마저 받아들이게 한다면 그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4. 확신이 있어서 쾌락을 추구하고 선택하는 사람은 자제하지 못한 탓에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낫다. 왜냐하면 자제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확신 있는 사람보다 그 잘못을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5. 만일 자제력 없음과 자제력 있음이 모든 일과 다 관계가 있다면, 무조건적인 의미에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모든 것에 있어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어떤 사람을 무조건적인 의미에서 자제력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제’에 대한 생각(위 문제 제기에 대한 이해)

1.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알고서 그렇게 행동하는가, 아니면 모르고 행동하는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알고 행동하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사람이 자제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치에 어긋나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자제하지 못하는 감정 상태가 생기는 이유는 참된 의미의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감성적 인식만을 지니기 때문이다.

2. ‘무조건적인 의미에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있는가?
- 쾌락 가운데 어떤 것은 필수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선택할만한 것이지만 지나침으로 흐를 수 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육체적인 쾌락은 필수적인 것이다. 반면에 승리, 명예, 부, 좋고 쾌감을 주는 것과 비슷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선택할 만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과 관련하여 올바른 이치를 어기고 지나침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무조건적으로 자제력이 없다고 하지 않고, ‘돈이나 명예, 분노 같은 면에서’, 즉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자제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과는 다르다.
그러나 절제나 방종과 관련 있는 육체적 쾌락에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어기면서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다.
육체적 쾌락과 관련해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과 방종한 사람은 동일하다.

참을성은 쾌락에 저항함으로써 생기고, 자제는 쾌락을 극복함으로써 생긴다. 이런 이유로 자제력 있음이 참을성 있음보다 더 바람직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항하여 충분히 이겨내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고 나약한 사람이다.

자제와 자제력 없음도 이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강렬하고 지나친 쾌락이나 고통에 졌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일 그가 저항을 했는데도 졌다면, 사실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견딜 수 있는 쾌락이나 고통에 저항하지 않고 진 사람은 한심한 사람이다. 물론 그것이 유전이나 질병 때문이라면 경우가 다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제력이 없는 것과 악덕은 서로 다르다. 자제력이 없는 것은 악덕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제력이 없는 것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악덕은 선택에 의한 것이다. 물론 자제력 없음과 악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행위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는 육체적 쾌락을 확신 없이 추구하는 반면, 방종한 사람은 그런 쾌락을 확신을 가지고 추구한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뉘우칠 줄 알지만, 방종한 사람은 뉘우칠 줄 모른다. 그래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쉽사리 마음을 돌리고 태도를 바꿀 수 있지만, 방종한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쾌락

- 다양한 의견들

1. 쾌락은 결코 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 모든 쾌락은 본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과정인데, 과정은 목적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 과정은 집 자체와 같지 않다. 또 절제 있는 사람은 쾌락을 피하며, 사려 깊은 사람은 고통이 없는 것을 추구하지, 쾌락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쾌락은 사유하는 데 방해가 된다. 가령 육체적인 쾌락이 그런 경우다.

2. 쾌락 가운데 일부만 좋은 것이고, 대부분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 쾌락 가운데는 사실 야비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또한 해로운 쾌락도 많으며, 그 중에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도 있다는 거다.

3. 쾌락이 선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 쾌락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 두 가지 의미의 선
-- 무조건적인 선
--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경우에만 선 :
=> 쾌락에도 그런 구별이 있을 수 있다.

목적이 과정보다 더 중요하다고 해서, 쾌락보다 더 좋은 것이 반드시 있어야한 한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과정이 아니고, 또 모든 쾌락이 과정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은 오히려 활동이요. 목적이다. 쾌락은 우리가 어떤 능력을 발휘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쾌락이 자기 자신과 다른 목적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본성을 완성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쾌락만이 자기 자신과 다른 목적을 갖는다.

한편 쾌락을 주는 것들 가운데 불건전한 것도 있기 때문에 쾌락이 나쁘다는 의견은, 건강에 좋은 것들 가운데도 돈벌이에 나쁜 것이 있기 때문에 건강을 위하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 주장과 비슷하다. 실천적 지혜나 그 밖의 어떤 상태도 그것에서 생기는 쾌락 때문에 장해를 입지 않는다. 관조(觀照 :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함)나 공부를 통해 얻는 쾌락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잘 관조하게 하고,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게 한다.

쾌락이 곧 선은 아니고, 또 쾌락이라고 해서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산다는 것과 쾌락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활동이 없으면 쾌락도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그에 따르는 쾌락 때문에 완전하게 된다.
그런데 활동에는 그 좋고 나쁨에 있어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즉, 어떤 활동은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고 어떤 활동은 피해야만 하며, 또 다른 활동은 선택할 만한 것도 피해야만 할 것도 아니다. 따라서 쾌락에도 여러 차이가 있고, 이에 따라 우열이 결정된다. 그래서 관조나 사색이 주는 쾌락이 감각이 주는 쾌락보다 높다. 또한 감각이 주는 쾌락에서도 시각이 촉각보다 높으며, 청각과 후각이 미각보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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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우애

<편저자 요약>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해도, 만약 친구가 없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재물이나 권세도 남에게 그것을 베풀 기회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덕을 친구들에게 베풀 때 가장 좋고, 가장 칭찬을 받을 것이다. 또 친구는 어려울 때 유일한 피난처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가? 친구에게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주로 세 가지, 즉 이익, 쾌락, 그리고 선을 위해서 친구를 사귄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물론 선을 위해 친구를 사귀는 것이고, 이런 사귐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친구를 얻고, 또 내가 좋은 친구가 되려면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애란?

우애, 즉 ‘필리아’는 덕은 아니지만 덕을 포함하고 있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사실 친구가 없다면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가졌다 하더라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애는 또한 국민들을 단합시키기 때문에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정의보다 이것에 더 마음을 쓴다. 왜냐하면 단합은 우애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며, 입법자들은 이것을 가장 소중한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친한 사람들 사이에는 정의가 새삼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의 가장 참된 형태는 우애의 성질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우애는 꼭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으며, 친구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우애의 종류

우애의 종류는 사랑하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모든 대상이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할 만한 것’만이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사랑할 만한 것은 좋은 것, 즐거운 것, 또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쓸모가 있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선이나 쾌락이 생기는 것’이라 여겨지므로,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한 것은 선과 쾌락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일반적인 선’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한 선’인가? 이 둘은 가끔 충돌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선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만한 것이고, 자신을 위한 선은 각자에게만 사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데, 이것은 결국 마찬가지다. ‘사랑할 만한 것’은 곧 ‘사랑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사랑에는 세 가지 근거가 있다. 무생물에 대한 사랑에는 우애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또 그 무생물에게 선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친구에게 어떤 것을 원할 때는 그것이 친구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나는 선을 원하는데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는 경우는 우애가 아니며, 그냥 상대방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애란 서로 선의를 주고받을 때 생겨난다.

- 상대방의 쓸모 있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
: 상대방에게 얻을 어떤 좋은 것 때문에 사랑하는 것. 또는 쾌락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도 이와 같다.

완전한 우애는 덕에 있어 서로 닮은 선한 사람들 사이의 우애다. 그들은 상대방이 선한 사람인 경우에만 서로 좋은 것을 원하며, 그들 자신 또한 선한 사람이다. 자기 친구를 위해서 좋은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참된 의미의 친구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애는 그들이 선한 동안 유지된다. 그리고 선은 오래 지속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우애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주는 것에 깃들여 있는 듯하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기쁨으로 여기는 어머니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머니들은 자식이 어머니에게 해드려야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하더라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애와 비슷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애와 비슷한 것으로는 호의와 합심, 자기애가 있다. 먼저 호의는 우애와 비슷하긴 하나, 우애와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호의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 사람에게도 가질 수 있고, 또 상대방이 내가 호의를 느낀다는 것을 알지 못해도 성립하지만, 우애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호의는 애정과도 다르다. 애정과 같은 강렬함이나 욕망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정은 친한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호의는 갑자기 생기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치 눈으로 보는 즐거움이 연애의 시작이듯이 호의는 우애의 시작이다.

합심도 우애와 비슷하다.
그런데 합심은 선한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늘 합심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한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항상 옳은 일을 추구하므로,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사람들은 서로 친구가 될 수도 없고, 합심도 아주 적은 정도로밖에 할 수 없다.

이제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남을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비판하면서 이런 사람을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에는 기분 나쁘게 여기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략)
그러나 이것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가장 좋은 친구란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따라서 나를 가장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애는 왜 필요한가?

사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요, 그 본성이 남과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는 친구나 착한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에게도 당연히 친구가 있어야 한다.

좋지 못한 사람들의 우애는 결국 좋지 못한 것이 된다. 그들은 마음이 들떠 있어서, 나쁜 짓을 할 때 쉽게 마음이 맞아서 서로 상대방을 닮아가게 되어 함께 악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한 사람들의 우애는 좋은 것이고, 그들이 서로 사귐으로써 이 선은 더욱 커진다. 그들은 상대방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본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에게서 좋은 일이.”라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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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다시 행복에 대하여

(편저자 요약)
이제까지 우리는 도덕적인 덕, 지적인 덕, 자제와 쾌락, 우애 등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남은 것은 행복의 본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본성인 이성에 따르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이성에 따르는 삶은 무엇일까?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최고의 행복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활동이다. 만일 행복이 어떤 상태라고 하면, 그것은 식물인간처럼 일생 동안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도 속하고, 또 큰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활동에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람직한 것도 있고,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도 있다. 행복은 분명히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다. 행복은 또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 바람직한 활동은 그 활동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활동이다. 덕이 있는 행동이 바로 이러한 활동이다. 고귀하고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이와 같이 행복이 덕을 따르는 활동이라면, 당연히 그것은 최고의 덕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최고의 덕은 우리들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과 관련되는 덕이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을 지배하고 이끌며, 우리로 하여금 아름답고 신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하는 부분은 이성이다. 그러므로 고귀한 덕을 따르는 이성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인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덕을 따르는 이성의 활동은 관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활동이 최선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우리 속에서 최선의 것이며, 또한 이성의 대상은 인식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 최선의 것이다. 둘째로는 이 활동이 가장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무엇을 하는 것보다도 진리를 관조하는 일을 가장 연속적으로 할 수 있다.
행복에는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는데, 덕에 따른 활동 가운데 철학적 지혜의 활동이 가장 즐거운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 즉 철학은 그 순수성과 신뢰성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리고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성의 활동은 관조하는 것으로서, 그 진지함에 뛰어난 가치가 있다. 또한 행복한 사람에게 속한 모든 성질과 연관되어 있다. 즉, 이성의 활동은 그 자신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자신에게 고유한 즐거움, 스스로 만족함, 한가함, 진지함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활동은 모든 생애에 걸쳐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인간이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인간 속에 잠재된 신적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라고 하면, 이성을 따르는 생활은 인간적인 생활이 아니라 신적인 생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인간이나 인간적인 일을, 또 죽어 없어질 따름이니 죽어 없어질 것들을 생각하라.”는 충고를 따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신을 영원한 존재가 되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성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이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
인간의 모든 활동 가운데 신의 활동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바로 관조이고, 이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관조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행복해진다.

국가의 역할

덕에 관해서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덕을 실천하거나, 또는 선하게 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살펴서 그것을 직접 해 봐야 한다.
말로만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 수는 없다. 물론 덕에 관한 이야기가 청소년들 가운데 덕스러운 사람들을 격려하고 자극하며, 또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나 고귀한 것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덕을 소유하도록 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많은 청소년들을 격려하여 고귀하고 선하게 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양심에 지배받기보다는 공포심에 지배를 받고, 나쁜 행위도 그 행위가 나빠서라기보다는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욕구에 따라 살기 때문에 자신의 쾌락과 그 쾌락의 수단을 추구하며, 이에 반대되는 고통은 피한다. 또 고귀하고 참으로 즐거운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것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구는 대개 말보다는 강제에 굴복한다. 따라서 올바른 법률 밑에서 양육되지 않으면, 어릴 때부터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올바른 훈련을 받기도 어렵다. (중략) 따라서 그들의 양육과 여러 가지 일은 법률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습관이 되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에 바른 양육과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도 각기 덕이 있는 행위를 하며, 그것에 습관이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법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생활 전체에 관한 법률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말해 생활 전체에 관한 법률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보다는 피할 수 없는 일을 따르고, 또 고귀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하기보다는 처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입법자는 마땅히 사람들을 설득하여 덕을 따르게 해야 하며, 또 고귀한 일을 하도록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가지 습관이 형성되어 이미 훌륭하게 된 사람은 이러한 여러 가지 법과 규율을 잘 따라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습관을 기르며,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살려면, 이성과 올바른 명령에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명령에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명령에는 이러한 힘이나 구속력이 약하다. 법률은 구속력이 있으며, 또한 실천적 지혜와 이성에서 우러나오는 규칙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의 충동에 반대한느 사람을 미워하는데, 이 미움은 당연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법률이 자기 충동에 반대되는 좋은 일을 명령한다고 해서 귀찮게 여기는 일은 없다.

국가의 통치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의 타락한 형태에도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 통치 형태는 군주제, 귀족제, 그리고 재산 능력에 기초를 둔 유산자제(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 형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화제라고 부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군주제이고, 가장 나쁜 것은 유산자제이다. 군주제가 타락하면 참주제가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1인 지배의 정치 체제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참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추구한다. 군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돌본다. 따라서 참주제는 타락한 정치 형태 중에서 최악의 형태다.
귀족제는 그 통치자들의 악덕으로 인해 과두제로 타락한다. 과두제에서는 국가에 속하는 것을 제멋대로 분배한다. 즉, 좋은 것을 전부 혹은 대부분 자기가 갖고, 관직을 언제나 같은 사람들에게 주며, 무엇보다도 재물에 연연한다.
유산자제는 민주제로 타락한다. 사실 이 둘은 거의 비슷하다. 유산자제는 다수의 지배를 이상으로 하며, 재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여긴다. 한편 민주제는 다른 타락한 정치 형태들보다는 덜 나쁘다. 시민들 스스로의 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뽑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국가의 통치 형태에 대해서만 간략히 이야기했고, 정치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른 책(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말함)에서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