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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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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징비록
글쓴이
류성룡 저
더스토리
평균
별점9.5 (11)
노누사



 

  전국시대 제나라는 연나라 침략에 한 때 까지 쫓겼다가 각고의 노력끝에 국토를
다시 수복했다
. 어려웠던 때를 잊지 말고 경계하자는 의미에서 에 있었음을 잊지 말자는 물망재거, 4자 경구가 탄생한 배경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5천년 한민족 전쟁사에서
임진전쟁은 역사상 유례없는 총체적 난국의 전란이었다
. 이미 400년 이상 오래된 古事라 하더라도 우리는 물망임진을
되새겨 임진전쟁의 교훈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초판본 징비록]
서애 유성룡이 임진전쟁 개전 전부터 종전까지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 수필집이다
. 서애 선생은 잘못을
징계하여 미래 후환을 삼가케 하는 기록이라는 취지에서 
[징비록]이라 명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합병을 제안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개전
초기 졸전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오랜 전란으로 말미암아 가족의 인육에 의존했을 만큼 아비규환에 시달렸던 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을 시종일관 곳곳에서
담담하고 진솔하게 밝혀 나간다
.

 

  [징비록]
읽으면서 
어찌하면 이토록 처참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전란 발발후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여 명나라와 합병을 염두에 둬야
했던
3개월 간의 전쟁양상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暗將밑의 오합지졸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는 형세였다. 단언컨대, 한민족 전쟁사에서 임진전쟁에 비할 수 있을 만큼 낯 부끄러운 전쟁은 없었다. 국지적 전투에 한정할 경우 참혹한 패배를 겪은 사례는 꽤 있다고구려 동천왕의 기병 2만명이 위나라 관구검이 이끄는 보병 1만명에
거의 전멸당하다시피 패배한 일이 한 예이다.
위나라 병력이 과소평가되었을 개연성이 있겠지만 최소한 두차례 앞선 전투에서 위병 6천명을 사상케한 대승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전투에서 4천명 보병에 기병 1.8만명이 몰살당하는 역대급 반전이었다. 이처럼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특정한 전투는 적지 않지만 전쟁에서 일방적이고 낯뜨거울 정도로 밀린 경우는 선뜻 손꼽아 보기 어렵다.
하물며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임진난 중에 일어난 칠천량 해전과 용인전투처럼 황망하게 패배한 전투를 찾기가 힘들다.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 광교산 전투를 거론해야 이에 비견할 만하다. 임진전쟁은 전쟁준비부터 장수선발과 국지적 전투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개전 초기 조선이 일방적으로 패주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누구나 거론하듯 개국후 200년동안
나라의 명운을 걸만한 강력한 외침이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文을 숭상하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있었다
.

 

  오래 전에 일어난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민낯에서 서애 선생의 유지대로 뒷날의 근심을 잊지 않고 삼가하기 위해 되새겨야 할 사항 몇 가지를 이 책의 기록에
근거하여 정리해 본다
.

 

  첫째, 임진전쟁은 일본이 전격적으로 기습한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어느 정도 방비도 마련하였다
.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황윤성과
김성일의 상반된 의견충돌은 임진전쟁 개전 가능성에 대한 판단에서 지엽적인 부분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찍이 조선이 무릅꿇고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동참하라는
정명항도국서를
보내지만 조선의 극심한 반발을 예견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로 순화하여 조선에 전달하였다. 진의를 파악하느라 시간을 보냈어도 이미 침공의사가 있음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쟁 초기 특히 엄청난 위력을 뽐냈던
조총의 존재도 대마도주를 통해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 50여 보의 짧은 유효 사거리와 재장전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당시 화승총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한게 문제였다
. 일찍이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최강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기마부대를 조총부대로 전멸시킨 효과적 전술을 완성시켰는데 조선이 이를 모를 뿐이었다
. 덩사 조선은
중신들이 격론끝에 일본이 명을 치려고 조선을 침공할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였다
. 또한
삼도 지방 주요 군사거점 지역에 성을 개보수하고 군량미를 비추하는 등 준비기간이 다소 부족했을 지라도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둘째, 예측불허 기습에 허를 찔린 게 아니라면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패배를 거듭한 원인은 무엇때문인가?
질문은 다소 군사 전략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주제이다
. 서애 유성룡은 저서에서 군사편제를 진관체제로
전환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임진전쟁을 연구한 다수 학자들도 제승방략의 전략적 결함을 지적한다. 제승방략은 지방 군현 단위별로 산재된 병력을 일정한 군사거점에 대규모로 집결시킨 후 중앙군과 함께 파견된 사령관이
현지에서 지휘하는 편제이다
. 이 편제는 대규모 전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건곤일척의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2선 방어를 구축할 전력이 부재하고 위급한 시기에 사령관이 부재할 경우 대부대를 통솔할 대안 마련이 쉽지 않다는
결함을 갖는다
. 실제로 임진전쟁에서 신립 장군의 정예부대가 탄금대에서 몰살당하고 선조를 호위하기 위해 모인
삼도 지방군
5만명이 용인전투에서 패배를 한 후 한동안 조선군이 지리멸렬했다는 사실에서 제승방략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진관체제 역시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전쟁의 성격을 띤 임진전쟁에 적합하다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진관체제는 지방 현단위 이하 군사들을 지방의 여러 거점별로 조직화하여 인접한 진관 군사조직이 연계하여 쳐들어오는
적과 맞서는 체제이다
. 진관 단위 병력은 임진왜란 초기 조선에 상륙한 각각 2~3만에 육박하는 1, 2 ,3군의 정예대군을 맞서기에 역부족인
규모이다
. 제승방략과 진관 모두 각기 장점과 결함을 가지고 있기에 실제 전장에서는 장수의 능력과
병사들의 반복훈련을 통한 전술 구사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 특히 원정군에 비해 전투가 벌어지는 지형을
충분히 이해하는 현장 적응력이 조선군이 내세울 유일한 강점이었는데 정작 조정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지휘관들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그 결과 지형지물과 병사들에 대해 숙지하지 못하여 전력 최적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는 그나마 각 진관별로 현지부대 지휘관이 주둔하는 진관체제가 그나마 나을 수 있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

 

  임진전쟁 당시
조·일 양국의 병력 규모는 조선군이 중앙군
2.5
만명, 정군 12.5만명, 수군 3만명
등 총
18만명, 일본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1 1.9만명, 가토
기요마사의
2 2.3만명,
시마즈 요시히로의 4 1.7만명, 수군 1만명 등 총 17만명이
전장에 동원되었다
. 전체 병력규모만 보면 조선군의 병력이 뒤쳐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한 것은  병력이 전략적으로 운용되지 않았고 훈련마저 부족하여 정예화되지 않았던
탓이라 하겠다
.

 

  조정의 군사적
무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
전쟁중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 신상필벌 원칙으로 군대기강과 규율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그러나 아군을 반란군으로 몰아 세워 몰살시킨 우복룡을 안동부사로 승진시키거나
패전을 거듭하던 차에 적군
60여명을 베어 사기를 드높인 신각을 군율을 어겼다는 허위보고에 속아 사형시킨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 설상가상으로 무책임하게 도망가거나 졸전을 벌인 인물들을 재등용하거나 중용하는
등 문신을 우대한 사회 풍토에서 역량있는 무신이 흔치 않았던 인물난까지 겹쳐 제대로 전략적 대응을 할 수 없었다
.
결국 무기력한 패배의 원인은 문약하고 무능력한 조정에 있었다고 단정할 만 하다.

 

   세째, 탄금대에서 전멸한 신립 장군의 전술적 오판이다. 신립을 지지하는 이들은
일찍이 북방에서 강력한 기병술로 오랑캐를 섬멸하여 조선 제일 명장으로 떠오른 신립이 궁기병 위주로 편성된 경군

8
천명의 특성을 감안하여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일 수 밖에 없었다고 옹호한다. 조령에서 방어선을
펼쳤을 경우 기병대를 활용하기 어렵고 우회로로 진격하는 일본군이 배후를 칠 경우 포위될 위험도 고려했어야 한다는 응원도 덧붙인다
. 그러나 중앙군이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지원온 지방정군 8
보병을 감안했다면 적어도 험준한 조령에서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후방 부대로 기병이 주둔하는 게 더 유효한
전략 전개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 특히나 전투가 벌어진 당일 비가 내려 탄금대 벌판이 진창으로 변했다는
사실에서 신속하게 기동하는 속도전이 생명인 기병 위주로 결사항전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 결과적으로 신립의 부대가 궤멸된
다음에는 이렇다 할 방어선이 없어 왜병들은 무주공산인 한양에 이어 평양성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하였다
. 사태가 심각해지자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하였다
.

 

   네째, 왜군이 선조가 있는 의주를 향해 진격하지 않고 평양성에 수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전세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왜군이 평양성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배경은 우선 심유경의 강화협상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심유경이 평양성에 진주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본국과 조율한 다음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2개월
동안에 양국이 전투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 심유경이 약조한 날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일본군은
여전히 평양성에 머물렀다
. 경상우수사 원균이 개전하자 마자 도망치는 통에 1만명의 병사와 전선과 화포가 유실되는 어처구니 없는 전력약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수군이 이순신의 지휘아래 남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은 수륙병진 전략과 보급물자 조달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 수군의 활약과 함께 6월 이후로 지방군과 의병이
승전보를 올리며 후방을 교란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무사했다는 점과 명나라 군대가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황이 일방적 수세에서
대등하게 바뀌게 되었다
여기서 평양성 탈환 과정이 매우 아쉬웠다. 도주하는
적을 제 때에 추격했더라면 자연스럽게 한양을 점거하던
4군까지 패퇴시켜 적의 주력부대를 경상도 이남으로
밀어낼 수 있었는데 자신의 안위를 우선한 장수의 용렬함로 인해 실기하였다
.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이여송 제독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평양으로 되돌아 간 후 강화협상에 나서,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사실상 끝낼 수 있는 천재일우 기회마저 놓치게 되었다
.

 

  디섯째, 임진전쟁을 생생한
기록한
[
징비록]은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 전쟁의 참화 속에 죄없는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왜군이 피해가 컸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 성안에 있는 민간인들을 남김없이 학살하곤 했다. 식량이 부족하여 노약자들은 도처에서 아사했고 병자들이 지척에 깔렸으며 먹을 것이 모자라자 가족의 인육을 먹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 나라가 부강하여 외적이 침입하지 않았던들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장면이겠는가. 원군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대 중 일부가 점령군처럼 약탈을 자행하는 일은 다반사요, 국지전투에서 몇 번의 패배를 빌미로 전투에는 소극적이었다. 역시 원군은
외국군대일 뿐이다
. 아무리 우방의 戰禍를 돕는다고 하지만 원군을 끝까지 믿어 그들이 구원해 주리라 믿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
.

 

  부국강병과 자주국방이
가능하려면 시의적절한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유능한 전략지휘 체제하에 훈련되고 조직화된 정예부대와 충분한 보급물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
특히 현대전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해야 한다. 우수한 성능의 첨단
전략무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방위사업이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몇 년 전 국방비리 뉴스가 줄을 이었다.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KFXF35 스텔스전투기 직도입 대비 비효율적이라 평가되고 수리온
헬기
, K2 전차 등 대표적 한국형 무기 개발과정에서 치명적 결함이 발견되곤 했다. 막대한 국방예산이 각종 스캔들과 비리로 낭비되는 정황이 뚜렷했다. 한때
인터넷에서 군대 내무반 교체사업관련 비리 가능성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 1,150개 대대급 부대 내무반 교체사업에 69,700억원이 집행된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1개 대대를 대략 600명으로 잡으면 대략 인당 1천만원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인당 점유면적이 대략 2평 정도로 제공된다 하니 평당 500만원 단가이다. 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에 평당 5백만원이면 어지간한 아파트 건축비에
맞먹는 금액이다
. 군 내부반 시설이 중급이상의  아파트 수준이라고 하면 군필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부정이 없다고 해도 적절한 에산통제가 이루어지는지 회의가 들 만한 사안이다. 국방비리와 방위사업 부정은 만의 하나 전쟁이 일어날 때 국방전력을 크게 훼손하는 치명타이다. 국방비리야말로 내란죄에 준하도록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징비록]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다.

 

  미국과 중국, G2의 패권 다툼이 끝나지 않을 듯이 치열하다. 북한 비핵화를 중심
축으로 동북아 정세마저 복잡하다
. 이 와중에 일본은 과거사를 빌미로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기는 커녕 한국에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는 경제보복을 도발하고 있다
.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 정치권은 타협없는 극한의 소모적인
정쟁만을 일삼는다
. 냉정한 정세분석과 주변국의 이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외교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파적 사익에 앞서 국익을 헤아리는 지혜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지성을 가진 사상가로 재평가받고 있는 서애 유성룡이 후대에 남긴 국가와 민생을 헤아리는 21세기
懲毖일 것이다
.

 

 



오탈자

pp. 80.  도순변사가께서는 -> 도순변사께서는

pp. 86.  탄했하고 -> 탄핵하고

pp. 132  알리 위해 -> 알리기 위해

pp. 189. 날마다 내고 -> 날마다 내리고

pp. 191. 제독 이여송이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 본문이 아닌 대표문장으로 글자크기 조절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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