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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87
- 작성일
- 2021.4.8
황야의 이리
- 글쓴이
- 헤르만 헤세 저
을유문화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상화 속의 괴테와 교수에게 작별을 고하고 현관 옷걸이에서 내 물건들을 챙겨 들고 얼른 집에서 나왔다. 내 영혼 속에서는 심술궂은 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고, 두 하리 사이에 격렬한 연극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저 즐겁지 않은 저녁 시간이 모욕을 당한 교수보다는 내게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교수에게는 그것이 실망, 작은 불쾌감 정도를 의미하겠지만, 내게는 최종적인 실패와 도주, 시민적이고 도덕적이고 학문적인 세계와의 작별, 황야의 이리의 완승을 의미했다.
--- p.122
헤르미네의 왼 젖가슴 아래에는 새로 생겨난 동그란 얼룩이 하나 보였는데 거무스름한 그 자국은 파블로가 곱게 빛나는 이빨로 물어 놓은 사랑의 상처였다. 나는 그 얼룩이 있는 곳을 주머니칼로 날이 쑥 들어갈 정도로 깊게 찔렀다. 헤르미네의 희고 부드러운 피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만약 모든 상황이 약간만 달랐더라면, 모든 것이 조금만 다르게 진행되었더라면, 나는 키스를 하면서 그 피를 핥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두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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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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