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Felix
- 작성일
- 2021.6.2
천국의 열쇠
- 글쓴이
- A.J. 크로닌 저
바오로딸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다. 청주교구의 '김웅렬 신부님'의 강론말씀 영상이다. 어느날 신부님의 강론말씀중에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이셨던 고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님의 성소(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동기가 언급되었다. 사제가 된 동기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책이 바로 '천국의 열쇠'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사제와 수도자로 성소를 받았다고 한다. 신부님도 이 책을 10번이나 반복해서 읽으셨다고 한다.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친걸까? 이 책의 무엇이 그토록 삶의 방향을 바꿀만큼 송두리째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이 책은 프랜시스 치점이라는 한 영국 신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신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서의 사목활동 그리고 중국에서의 기나긴 선교사목을 담고 있다. 오랜세월 중국에서의 사목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국후 지난 일을 회고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느님! 당신은 저에게 무(無)에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저의 허영, 저의 고집 센 인간적인 교만에 대한 대답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일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투쟁하겠습니다. 절대로 도중에서 그만두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절대로!" 284p
주임신부로서 첫 부임지인 중국의 파이탄에 도착했을때 신부는 큰 충격을 받는다. 분명히 멋진 성당이 있을 자리에는 지붕이 달아나고 담이 허물어진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폐허속에 단 한 채의 외양간만이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나라면 아마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망연자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국으로 전보를 보내서 이런 상황을 알리며 적극적인 원조를 강하게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부는 이것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겸손하게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늘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부딪힌다. 때로는 하느님의 뜻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를때 그 결과는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는 것을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
"그건 좋은 일이 못 됩니다. 나쁜 일이에요. 당신이 그럴 마음도, 신심도 갖고 계시지 않은 걸 알면서도 당신의 소망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내게 아무 빚진 것도 없어요. 자, 돌아가주시오." 329p
신부는 돈이 많은 상인인 자 씨의 병든 아들을 치료해준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자 씨가 신자가 되겠다고 하자 신부는 거절한다. 중국에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며 선교했던 그였다. 자씨가 스스로 신자가 되겠다고 찾아왔으니 마치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같이 이처럼 큰 수확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신부는 그럴수 없다고 말한다. 마음속에서는 강한 유혹이 올라왔지만 자씨의 불순한(?) 의도를 신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
신부의 선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나라면 이게 왠 횡재냐며 자 씨를 덜컥 받아들였을 것이다. 진정으로 신자가 되겠다는 마음이 없어도 그저 신자수를 늘리는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진실하고 싶은 신부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루에도 여러번 선택의 기로에 설때마다 유혹을 느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때로는 내게 편안하지 않은 것을, 보다 어려운 것을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늘 내게 편안하고 보다 쉬운 것을 선택한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그녀는 두 손을 비틀며 울었다. "하느님, 설마, 당신이 이런 심한 짓을 허락하실 리는 없습니다." 415~416p
자 씨의 도움과 기부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신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그저 망연히 섰다. 수녀들은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왜 이런일을 당해야 하냐고. 성당은 산처럼 쌓인 흙더미와 기둥들과 산산조각이 난 유리들로 변해버렸다. 파이탄에 처음 도착했을때처럼 다시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무너진 성당을 보며 나 자신도 허망함을 느꼈다. '하느님도 참 너무 하시지'라는 생각과 함께. 계속되는 비로 무너지고 만 성당은 그러나 10분만 늦게 나왔어도 아마 신부와 수녀들을 삼켜버렸을 것이다. 성당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신부와 수녀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앞으로 파이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느님은 신부와 수녀들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이니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전에 읽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하느님은 왜 고통당하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실까? 왜 그냥 보고만 계실까? 하는 생각을 했었었다. 일본도 그랬지만 우리도 조선시대에 4대박해를 톻해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배교보다 순교를 택한 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기쁘게 목숨을 바쳤다. 하느님은 그 순간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함께 계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게 되었다.
결코 녹록치 않는 삶속에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레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많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그 고통과 시련을 일부러 주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내가 선택한 고통과 시련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 등 -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온 세계 교회가 서로 미움을 버리고 하나가 되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세계는 살아서 숨을 쉬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억의 인간이라는 세포에 의해 건강이 유지되고 있으니, 그 하나하나의 작은 세포인 우리 인간의 마음들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것이다. 563~564p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메세지가 아닐까? 신약성경 마르코복음 12장 29절에서 31절 말씀에 첫째가는 계명과 둘째가는 계명에 대해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저자도 이 것이 가장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도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똑같이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자기와 똑같은 인간의 피와 눈물로써 잔치를 올리며 즐거워하다니, 이 무슨 일인가! 하느님은 결코 이렇게 만드시진 않았다... 아니 하느님 같은 것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심한 절망감에 떨어진 그는 검은 그림자처럼 덮쳐오는 무서운 의심을 쫓아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587p
선교지에서의 삶이 어느정도 평화로움을 맞는가 싶더니, 피크스 목사 부부 일행과 함께 와이주 장군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고문이고 고통이었다. 인간은 고통앞에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 천주교 4대박해때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배교자들도 분명이 있었다. 기쁘게 순교한 이들도 있었지만, 고문과 매질에 속절없이 무너져서 어쩔 수 없이 배교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배교한 이들에게 어떻게 돌을 던지겠는가?
신부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지만 같은 인간의 폭력성과 잔악함에 곧 심한 절망감에 떨어진다. 하느님이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는 물음은 끊임없이 있어왔고, 많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 물음을 던지게 했다. 설령 하느님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이 의심과 물음은 죽는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믿는 이들을 괴롭히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씌여진 책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도 주었지만 비판도 감수해야 했다. 공의회 이전만 하더라도 교리는 오로지 믿는 이에게만 구원은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공의회 이후에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겨 구원은 믿지 않는 자에게도 주어진다고 바뀌었다. 그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았다면 비록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하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교리는 가르친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김웅렬 신부님의 말씀처럼 이 책은 시대를 앞서간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느님께 순간순간 바치는 신부의 화살기도들은 내 마음을 후벼팠고 내리 꽂혔다. 신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매달리며, 매순간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까지 아주 적은 음식과 불편한 바닥에서의 잠자리를 고수하며 가난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았다. 늘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신부의 삶이 큰 감동으로 물밀듯 밀려왔다.
이 책이 그토록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인 프랜시스 치점 신부를 통해서 저자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반대로 위대하고 숭고할 수 있다는 것과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왜 이 책이 수많은 이들을 사제와 수도자로 이끌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며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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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