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Felix
- 작성일
- 2014.9.25
작은 위로
- 글쓴이
- 이해인 저
열림원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고개를 숙이고, 감나무에는 해질녘의 빛을 닮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참나무와 밤나무 아래에는 짙은 갈색의 도토리와 밤송이가 바닥을 뒹굴고, 벚나무 잎들은 하나둘씩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다. 밝은 갈색의 갈대가 바람에 눕는다. 가을에 색깔이 있다면 아마도 이 책 표지색과 같지 않을까?
가을만큼 시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 또 있을까? 오랜만에 시집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10년 전에 가르침의 보답으로 어느 지인에게서 받았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배움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지인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는 나 자신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고나 할까? 수녀님의 시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나는 참 이기적이지요?/('용서의 꽃'중에서) 40-41p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상대방이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되면 난 속으로 끙끙 앓고, 상대방과의 소통을 거부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은 곧 내 마음을 서서히 좀먹고 괴롭게 만든다. 그럴 때면 참 속상하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미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용서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22절]에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결국은 마지못해 용서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용서 또한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은/억지 부리지 않아도/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나를 내어주려고/내가 타오르는 빛//"고맙습니다"라는 말은/언제나 부담 없는/푸르른 소나무 빛/나를 키우려고/내가 싱그러워지는 빛//"용서하세요"라는 말은/부끄러워 스러지는/겸허한 반딧불 빛/나를 비우려고/내가 작아지는 빛/('말의 빛'중에서) 54-55p
말에도 빛이 있다면 좋은 말은 아름답고 예쁜 빛이 되고, 그렇지 못한 말은 못나고 흉한 빛이 될 것이다. 항상 좋은 말로 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아름답고 예쁜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감정에 휘둘려 못나고 흉한 빛을 이리저리 내뿜을 때가 적지 않음을 느낀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용서하세요' 란 말이 새삼 아름답고 곱게 느껴진다. 말이 곧 빛이 될 수 있음을 보면서, 말의 소중함을 다시 되새겨본다.
이기심을 적당히 숨긴/사랑의 모습으로/그럴듯한 보호색을/만들어갈 때마다/나는 내가 싫고 흉해/얼굴을 돌린다/('보호색'중에서)
남들에게 보여지고 싶어하는 내 모습으로 보호색을 만들고,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보호색 뒤에 감추곤 한다. 단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색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지만 그 보호색 뒤에 이기심이 있고,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면 성찰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순간순간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을 돌리고 싶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힘들고 고달팠어도/함께 고마워하고/앞으로 살아갈 날들이/조금은 불안해도/새롭게 기뻐하면서//우리는 서로에게/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중에서) 115-116p
가을하늘은 유난히 더 맑게 느껴진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다. 하늘은 더욱 높아보이고 더욱 파랗게 보인다. 가을바람은 더욱 상쾌하게 느껴진다. 무더운 여름의 그 땀방울을 식히려는 듯 서늘하지만 시원하다. 맑고 선명한 가을하늘과 시원하고 상쾌한 가을바람처럼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함께 고마워하고 새롭게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무릎과 이마를 다친/어느 날 밤/아프다 아프다/혼자 외치면서/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편할 때는 잊고 있던/살아 있음의 고마움/한꺼번에 밀려와/감당하기 힘들었지요/('아픈 날의 일기'중에서) 144p
몸이 아프고 나서야 꼭 생각이 난다. 평소에 건강을 잘 챙겼더라면 하는 후회와 함께. 하지만 아프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평소 별 어려움없이 잘 움직여주었던 몸에 대한 감사와 함께. 내가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 또한 평소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 난 뒤라야 절로 나온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
4년 전에 새로 개정판이 나왔다. 바뀐 표지보다 가을을 담고 있는 듯한 이 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지금 읽고 있는 시어는 이 책을 처음 읽었던 10년 전의 시어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시는 삶을 살아온 그 시간만큼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는 읽는 순간 매번 나에게 다르게 다가오기에 읽고 또 읽는 지도 모르겠다.
수녀님의 시를 읽을 때면 느껴지는 것은 두 가지다. 자신에 대한 쉼없는 성찰과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그렇기에 시를 읽는 그 순간 만큼은 그것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짐을 느낀다. 나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따뜻함은 곧 위로가 된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때 위로를 받듯이. 수녀님의 시를 통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으며, 나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나마 되어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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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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