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구름책방
- 작성일
- 2023.9.28
수도회, 길을 묻다
- 글쓴이
- 최종원 저
비아토르
나를 비롯한 대다수 개신교인들에게 수도회, 혹은 수도원은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주제다. 사회를 등지고 자기들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무슨 도를 닦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실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 전통에서 이런 생각은 당연히 조금은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 역사 속 수도회 전통을 통시적으로 훑어보는 이 책에서, 수도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오해임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수도회는 세속화의 물결에 넘어가는 “제도 교회”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이건 최초의 수도사들이 출현한 시점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금욕적인 삶을 통해 자기 완성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재림의 긴박성을 믿고 이에 따라 살기를 원했던 이들이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필연적으로 이어질 세속화의 위협을 예지하고 이를 피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회라고 불릴 만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은둔자들로 대표되던 초기 수도적 삶은 이제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를 돌보고(또, 서로를 감시/경계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수도원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베네딕투스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수도규칙. 기도와 노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규칙서는 중세 기간(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도회들의 표준규칙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애초에 세속화를 경계하면서 시작된 수도회였지만, 그렇게 모인 수도원이 각종 기부 등으로 너무 부유해져버린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이니 시토회니 하는 수도회들도 모두 처음에는 청빈과 경건을 강조했으나, 그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결국 애초의 이상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탁발 수도회였다. 말 그대로 구걸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존해 생존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의 이상을 설파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프란체스코 수도회. 이들은 앞선 수도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측면이 강했던 데 반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도회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빈을 위한 구걸은,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에 의지하는 평안한 삶으로 변질되었다. 이미 프란체스코 생전부터 청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싸웠고,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한 온건파가 승리한다. 다시 한 번 초기의 이상이 희미해진 것.
이런 일은 수도회 역사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된다. 혹자는 ‘그것 봐라’, ‘처음부터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와 같은 논조로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보인다. 처음부터 수도회 운동은 제도 교회의 한계로 인한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수도원의 역할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각 시대의 교회가 놓친 부분을 일깨웠다면 수도회 운동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당연히 수도원 해체에 대해서도 조금은 다른 말을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즈음 유럽 각지에서는 수도원 해체가 연달아 발생했다. 물론 당시의 여러 수도원은 지나치게 부유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기득권층과 밀착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수도원 해체로 이어지는 것도 이해할 만한 수순이었다. 저자도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제도 교회의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수도회가 사라지면서, 교회가 국가에 더욱 밀착해버리는 결과가 나왔다. 이제 제도 교회의 문제를 삶으로 반박하고 교정의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자리가 비게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각국의 개신교회는 국교회로 전환되는 일이 많았다. 칼뱅의 스위스 개혁교회도, 루터의 독일 교회도, 잉글랜드의 교회나 북유럽의 여러 교회들이 다 그랬다. 그리고 교회가 국교회화가 유발한 문제는 오늘의 유럽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수도회 운동의 오늘에 관해서도 제법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회퍼나 토머스 머튼 같은 인물들에게서 현대의 수도회 운동의 자취를 찾고, 라브리 공동체나 떼제 공동체에서 그 실천을 발견한다. 물론 이런 운동들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과거의 수도회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당대 제도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지적하고 나름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면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제도 교회와 수도회 운동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살펴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각 시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이에 대한 수도회 운동의 반응에 주목하며 읽어보는 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좀 더 밝히 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좀 더 천천히 읽으면서 내용을 함께 나눠봐도 좋을 듯.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