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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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글쓴이
크리스토퍼 클라크 저
책과함께
평균
별점8.3 (12)
파란흙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간략하게 소개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전세계가 관여된 전쟁에 대한 기록치고는 간략하기가 이를 데 없다. 좀 더 길게 정리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1014쪽에 달하는 두터운 책 <몽유병자들>의 저자는 마침 백과사전에서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라고 한 1903년의 세르비아 국왕 시해 사건부터 다루기 시작한다. 전쟁이 터지기 십 년 이전부터 전쟁의 기미와 단서들을 끌어 모은 셈이다.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전후하여 어떤 것들이 얽히고 설키어 있을 것인지에 대해 그야말로 하나의 트리거에 불과한 것을 사건의 이유로 단정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고자 하는 태도에 우선 신뢰가 갔다. 그리고 잘 썼다. 번역도 좋다.

세르비아 국왕 시해 사건은 이후 세르비아의 정치적 상황을 배태한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쿠데타와 쿠데타로 정권이 이어져나가면서 세르비아의 고통 받는 국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범슬라브주의라고 하는 민족정신의 기치였다. 대(大) 세르비아의 복원에 대한 염원은 신화적 과거에 투영한 서사 민요를 통해 반외세 항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름의 강대국에서 프랑스라는 강대국으로 의지처를 옮기면서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반환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더욱 급진화된 민족주의자들은 흑수단으로 널리 알려진 ‘단결 아니면 죽음’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903년 국왕 시해의 주동자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청년 보스니아’라는 단체의 활동가가 오스트리아인인 보스니아 총독을 자살 공격한 이후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적 테러리즘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세르비아가 돌려받고자 한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의 차기 황제인 태자가 방문하기로 결정되자 당연한 수순으로 흑수단을 중심으로 암살이 계획되었다.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을 수 있다.’ 

저자의 시선은 이 암살을, 파시치 수상을 필두로 한 세르비아 정부를 포함한 세르비아 안팎의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향했다. 심지어 이 황태자가 온건하고 개혁적인 정책을 펼 것으로 알려지자 세르비아 내의 강경한 기조가 허물어질까 두려워한 측면도 있었다는 부분까지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모두가 전쟁이 내다보이는 이 계획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머뭇거리거나 모른 체 하거나, 에두른 정보를 애매하게 흘리는 동안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정한 이념 따위는 개나 줘버린 상황이었다. 민족주의는 이용 대상에 불과했다.

저자에 따르면 실체조차 모호한, 국민의 감성을 좌지우지하는 대 세르비아의 구호는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하는 왕좌를 차지했고, 이것을 지킨다는 명분만 있으면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게 전쟁이라고 해도 말이다. 오스만으로부터 얻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소유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악의 축으로 규정된 것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1939년 헝가리 작가 미아이 버비치는 군주국의 붕괴를 반추하며 이렇게 썼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지난날 우리가 증오했던 것을 상실해 후회하고 그것을 되찾고 싶어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독립했지만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벌벌 떨 뿐이다.’ 실제로 ‘세르비아로부터 자두나무 한 그루, 양 한 마리’(p.206)도 원하지 않으며 전쟁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거듭 표명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제위 계승자를 저격한 어린 청년들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이 전쟁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막론하여 극단주의자들에게 찍힐 것을 두려워하는 수상, 중요한 사항을 누락하거나 도외시한 부주의한 외교관, 전쟁 영웅이 되어 사랑을 쟁취하려는 숱한 인간들이 개입해 있었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에 이어 멀리 일본까지 제국의 확장에 열을 올렸고, 독일은 오히려 이 경쟁에서 후발주자였다. 이합집산과 이중 삼중의 편 먹기가 난무했다. 이 두꺼운 책은 이렇게 각 열강들이 표면적으로 손을 잡았다가 놨다가 하는 이야기에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다 추적하기에는 뇌에 과부화가 걸릴 지경이다. 결론은 이토록이나 숱한 요소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얽혀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찬찬히 끝까지 읽는 일을 숙제로 남겨 놓고(제1차 세계대전 연구자들은 침을 흘리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좀 길다. 많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이렇다. 그리하여, 어처구니 없게도 전쟁이 터졌다는 것. 그리고 그 전쟁의 여파는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 더 중요한 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 누구 하나의 똑 부러지는 잘못이 아니기에, 그 하나를 붙들고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그러는 일 자체가 부질없다는 것.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국의 이익이라고 하는 지상명제가 있고, 돌아온 민족주의의 감성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대내외적으로 평화의 수호자로 자처해야 하는 대의명분이 있고, 판단에서 실수를 할 여지가 많은, 자신만의 신념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이 있고, 고래로부터 굳건히 섬을 이루는 우중이 있고,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어라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기꺼이 그 일을 할 우국지사들이 쇠털같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이 모든 가치들이 이현령비현령이고 보니 참,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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