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piacol
- 작성일
- 2015.4.16
모비 딕
- 글쓴이
- 허먼 멜빌 저
작가정신
의외로 《모비 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난 포경업이라는 것도 생소했고 흰 고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전혀 몰랐었다. 하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완역본이 아닌 간략본으로 읽고 줄거리만 아는 수준이었다. 《모비 딕》을 꼭 읽어봐야 겠다고 다짐한 건 예전에 수강한 글쓰기 강좌에서 강사가 언급한 대목 때문이었다. '본인의 삶을 투자해서 만든 작품을 먼저 읽자.'
조지 오웰과 같이 작가 허먼 멜빈은 고래를 잡으러 직접 포경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거기서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두말할 것 없이 생생했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지원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배 내부의 구조, 다양한 역할을 하는 선원들에 대한 설명, 고래를 잡는 과정,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과정 등 내가 배에 승선해서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간간이 등장하는 삽화는 글로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이해를 도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낫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랄까? 상상력을 가미할 필요가 없는 실제 도구나, 기구, 공간을 말로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삽화가 없는 《모비 딕》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대충 모양새만 갖춘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당시 그들이 사용한 기구의 원리를 이해하고 제작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다. 지금처럼 흔한 기중기 하나 없어도 권양기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배를 눕히고 세워가며 포경선을 수리하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래 잡이에 관한 모든 것,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포경선 수리, 126쪽 ~ 127쪽
행여나 이 책이 딱딱한 설명으로만 가득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면 그런 생각은 어서 거둬들여야 한다. 엄연히 이 책은 소설로 분류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녹록치 않다. 물론 모든 문장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체험을 바탕으로한 구체적인 문장들이 속사포처럼 나오다가도 참신한 비유가 녹아든 문장의 향연이 펼쳐지고 또 깊은 사유가 담긴 문장들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우연은 한편으로는 필연이라는 직선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제한을 받고 측면에서는 자유의지가 그 움직임을 한정하지만, 그래서 필연과 자유의지의 지시를 받지만, 우연도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지배하면서 사건의 최종 형태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316쪽
너는 마치 원둘레가 중심에 충실하듯 충실한 놈이구나. 725쪽
역사적 인물, 사건에 대한 비유가 역주로 표시되어 나타나면 나의 무지함에 한숨만 절로 나온다. 책 끝에 미주로 처리한 역주는 도통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작 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손에 꼽을 수준으로는 무리였다. 작가와 같은 시대의 인물들을 거론하니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책이 출판된 당시(1851년) 독자들은 당연한 듯 알고 있지 않았을까? 희곡 형식으로 구성된 장은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 그 장면의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몇 쪽에 걸친 흰색에 대한 고찰은 평범한 소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표현에 대한 의지가 충만했다.
모비 딕(에이해브 선장이 집요하게 쫓는 향유고래인 흰 고래를 지칭)을 찾아내는 일이 요원한 일이 듯 고래 몸통만한 책을 묵묵히 읽는 일도 상당한 인내를 요구했다. 700쪽이 넘어가서야 모비 딕과 한 판 승부가 시작될 조짐을 느꼈다. 작살이 박힌 고래가 빠른 속도로 도망가 듯, 책장을 넘기는 속도 또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줄거리가 궁금할수록 몰입감은 높아지고 애가 타는 쪽은 나였다. 이 절정의 구간은 생각보다 짧았고 아쉬움을 어루만져줄 결말은 있긴 있나 싶을 정도로 더욱 짧았다. 인물의 미묘한 심리나 복잡한 구성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서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고래라는 소재에 역사, 철학, 종교, 동물학을 엮어 고래학을 빚어내고 그 기반을 소설의 형태로 구성한 작가의 역량에 감탄할 뿐이었다. 포경업과 포경선에 관한 앎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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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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