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가는 이야기
피오니즈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1.19

지난 주말 서울시립미술관에 갔습니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보기 위해서죠. 아내는 가끔 무슨 전시회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데, 사실 별로 땡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단 미술 쪽으로는 문외한인데다가, 본인은 정작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작품에 이런저런 찬사들을 주변에서 늘어놓으면 닭살이 약간 돋고 왠지 거부감도 살짝 드는 까칠한 성격 탓이죠.
암튼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귀가 솔깃하더군요. 이미 고인이 되시긴 했으나 동시대를 살아간 예술가인데다가, 그의 작품이 매우 '통속적'이라는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통속적'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다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왠지 저와 '통'하는 무언가가 있을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전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인거 같습니다만) 그의 작품의 특징은 「그동안 예술에서 표현의 소재가 되지 못했던 (미술 평론가들에게 무시당했던) 일상 속의 '평범한 물건'이나 '대중 스타'들의 그저 일상적인 모습을 작품의 경지로 올림으로서 평론가들로 하여금 '찬찬히 살필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이라는 표현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그의 시도가 매우 대담하고 시니컬하게 느껴져 잘 알지 못하는 그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껴왔습니다. 사실 뭐든 액자에 걸기만 하면 그것은 '특별한 것'이 되어 관심을 살 수 밖에 없는 대상이 되는 세간의 '통념'이 더 통속적인건 아닐까요? ㅋㅋ

그가 다루는 소재들은 매우 사소합니다. '이게 무슨 작품이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의 작품을 처음 평가한 나름 권위있는 누군가가 그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했다면, 그리고 그의 활동 초기 미술계에서 그런 평가에 동조했다면 우리는 '앤디 워홀'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아예 알 수 없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사소함의 미학'에서 '위대한 세계'로의 도약에는 '미국적 상황'이라는 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의 문화에 대해 약간의 열들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열등감이 서구의 전통적 예술체계와는 다른 독특함을 '대안적(대항적) 수단'으로 수용할 수 있는 '남다른 아량'과 '적극적 동기'로 작용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앤디 워홀'과 같이 서구 전통의 답습이 아닌 톡톡 튀는 남다른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가 더 미국적으로 느껴지고 애착이 가지 않았을까요?
전시회를 구경하면서 예술작품에 대한 감동(사실 거의 감동을 느끼지 않았습니다)보다는 앤디 워홀에 대한 '인간적 매력'에 끌린게 고인에 대한 불경(不敬)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생김새나 옷차림이나 하는 짓(?)이나 참 멋진 사내라는 생각이 든 전시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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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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