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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앙마
- 작성일
- 2023.9.8
진지하면 반칙이다
- 글쓴이
- 류근 저
해냄
그대 부디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면 언젠가 우리도 반드시 꽃으로 피어 마주 볼 날 있으리. 사람아.('그대 부디 살아 있으라' 중)
존버.
어느 순간부터 버티는 게 일상인 삶이 되어 버렸다. 억울해도 버티고 비굴해도 버티고 부조리해도 버티고 그리워도 버티고 그냥 존x 버티는 것 외에 남은 것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버텨 보자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 외에는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격려라도 하면 다행이지. 시인에게 미안하다. 사회가 해야할 일까지 떠맡겨 버렸으니 참으로 미안하다.
고맙고 미안하다.
증오와 갈등과 혐오와 분노와 탐욕과 폭력과 음모와 천박과 이기와 파렴치의 각축장 한가운데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불길하게도 일찍 피어난 봄꽃들이 다 질 것이다. 나는 살아남은 나를 가엾어하며 슬퍼하며 또 한잔해야지. 이 술집엔 순 늙고 진 이웃들만 앉아 있다. 순한 초식동물들 같다. 눈물겹다.('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중)
시인은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잘 안다.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더불어 웅크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웅크린 무덤 위에 소위 성공했다는 자들이 우뚝 서긴 하겠지만 무덤 속에는 무덤 속 나름의 아늑함이 남아 서로의 삶을 지탱해준다.
또 고맙고 미안하다. 시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었다.
아는 게 많은 사람보다 느끼는 게 많은 사람이 훨씬 더 이 세계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저절로 하느님의 마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착하게 살아남는 시간' 중)
아는 게 많다는 것을 자랑말자. 느끼지 못하는 게 늘어감을 슬퍼하자.
시인의 마음이 많이 아팠겠다.
'사랑해요'라는 말 / 참 오래 견딘 말.('참 오래 견딘 말')
오래 견뎌야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기다리면 보람이 있는 말이, 버틸만한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이 아닐까.
'사랑해요'라는 말. 그래도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말.
나에겐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가 많이 남아 있다.('어떠한 시도 오지 않는 새벽' 중)
기왕이면 같이 불렀으면. 기왕이면 아름다운 노래였으면.
먼 데서 오는 구원을 위해 자기 내부의 의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생은 공허하지 아니한가.('제 힘껏 살아내다' 중)
멀리 있지 않은 것을 멀리서 찾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애처로운가.
가까운 곳에 있던 것을 이미 멀리 떠나보낸, 그러면서도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더더더 안타까운가.
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전자를 포기하지 못해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만다.
개에게도 하는 것을 나는 왜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가. (중략)내가 아직 가야 할 사람이 멀었기 때문. 여기서 사람까지가 멀었기 때문이다.('아직 사람에 닿지 못했기 때문' 중)
나아가면 닿을 날이 올 수는 있을까. 적어도 시인은 가 닿을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시인에게 또 한번 미안하다.
이제 그만 진지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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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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