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글]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여우같은북극곰공주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3.7.10



이런 가족사진이 생긴 것 만으로도 그의 삶은 기적에 가깝다. 아들 키요시가 태어나던 순간, 아이를 꼭 안아줄 수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20분 넘게 아들과 눈을 맞추며 부성애를 전했다. 요즘은 침대에 아이와 함께 셋이 누워 살을 부비는 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닉 부이치치는…
‘뉴욕타임스’에 글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자. 희소병으로 팔다리 없이 태어나 8세 이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도전정신으로 장애를 극복했다. 정상인들과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장까지 지냈고 대학에서 회계학과 재무학을 복수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비영리 단체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을 만들고 전 세계를 돌며 희망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발가락으로 전동 휠체어 스위치를 밀며 기자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기자는 짧지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악수를 청할 수는 없으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얼른 일어나서 그의 휠체어가 테이블 앞에 자리 잡는 것을 도와줘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기자가 어떤 제스처를 취할 겨를도 없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사랑해요” 하면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눈을 꼭 초승달처럼 뜨고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 정말 맑아서, ‘처음에 만나면 어떤 제스처로 대할까’ 긴장했던 마음이 확 풀렸다. 그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한 것 아닌가 싶어 ‘아차’ 싶기도 했다.
닉 부이치치는 지난 2010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당시 자신의 저서 『닉 부이치치의 허그』 출간을 기념해 방한했다. 그는 여러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 비록 팔다리가 없지만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는지 들려줬다. 그는 축구를 하고 낚시를 즐기며 다이빙과 윈드서핑 마니아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팔과 다리를 갖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집 책장에는 멋진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다. 두 다리로 걷게 되는 날 신으려고 마련해둔 좋은 신발이다. 그는 이렇게 기적을 믿으며 살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다며 늘 환하게 웃는다.
닉 부이치치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유명한 강연 영상이다. 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발가락으로 전자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운다.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진지한 얼굴로 “만일 쓰러지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다. 그는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고는 “나는 넘어졌고 팔다리도 없다. 일어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절망하겠지만, 백번이든 천번이든 노력하면 방법이 생긴다”고 말하며 몸을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는 벽쪽으로 기어가서 이마로 벽을 딛고 몸을 뒤틀어 힘겹게 다시 일어선다. 강연을 듣던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눈물을 보인다. 닉 부이치치가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힘들어도 주저앉지 말고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보라며 청중을 독려하는 그의 강연은 때론 재밌고 때로는 엄숙하다.
하지만 2013년의 닉 부이치치는 도전적인 인생관 말고 다른 키워드로 읽어봐야 한다. 최근 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지난해 결혼했고 올 2월에는 아빠가 됐다. 기자는 방한 일정 중 서울 온누리교회 강연과 기자회견장에서 두 번에 걸쳐 그를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가족 얘기를 제일 먼저 꺼냈다. 그에게 새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두 번의 만남과 그의 새 저서를 통해 아빠 닉 부이치치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안아주지 못하지만, 그만큼 눈을 맞춰주겠다
“아기가 정말 귀여워요. 이제 석 달 됐는데 키가 66cm입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95cm밖에 안 되거든요(웃음). 조만간 제 아들이 아빠 키를 넘어설 것 같아요. 요즘 며칠 동안 계속 외국 강연을 다녔더니 아내와 아들이 무척 보고 싶어요. 이제 5일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식구들을 만날 수 있어요(웃음).”
그는 자신의 작은 키를 농담 소재로 삼아 자신과 마주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이런 화법은 그의 특기다. 평소 외국 강연을 다니다 공항에서 입국 심사가 늦어질 때면, 그는 담당 직원에게 “혹시 내 비자 ‘지문’에 문제가 있나요?”라며 농담을 던지곤 한다. 팔다리가 없다는 것이 요즘의 그에겐 아무런 시련도 아니라는 증거다.
서른둘 청년 닉은 육체적인 장애를 완전히 극복한 게 맞다. 하지만 아빠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는 ‘테트라-아멜리아’라는 희소병을 갖고 태어났다. 유전병은 아니지만(그의 부모는 모두 정상인이다) 선천적인 질환이어서 아이도 그 병을 가지고 태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고민이 굉장히 많았다.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인지, 혹시 팔다리 없이 태어나도 가족 간의 믿음과 사랑이 변함없을 것인지…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다행히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을 거라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고 그 결과에 따라 2세를 갖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몸이 불편해도 조건 없는 사랑을 줄 수 있고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되뇌었다. 인공 수정이 아니라 자연스런 부부 관계로 인한 임신을 꿈꿨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아빠들은 대개 태어난 아이와 처음 만날 때 아이를 받아들고 품에 안아본다. 세상에 찾아온 아이와의 의미 있는 첫 대면식이다. 그렇다면 닉 부이치치는 아들과 처음 만난 순간에 어떤 의식을 치렀을까.
“아이가 태어날 때 아내와 같이 있었어요. 첫 울음을 터뜨리기 바로 전에 나를 보고 웃어준 것 같아서 무척 기뻤습니다. 다른 아빠라면 아이의 손과 발을 만져보고 비록 어색한 폼이지만 따듯하게 안아줬겠죠.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아시다시피 그럴 수가 없었어요(웃음). 대신 아들의 눈을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줬습니다. 20분 가까이 계속 눈을 맞췄어요. 정말 감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요즘은 아이 옆에 같이 누워 몸을 비비면서 교감을 나눠요. 나와 아내가 아들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눕습니다. 아이가 때로는 내게, 때로는 엄마에게 몸을 기대요. 그렇게 세 식구가 서로를 느끼고 있으면 그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지요.”
그는 아들 키요시가 매사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늘 아이의 눈을 보며 격려하고, 아빠로서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안아주지 못하는 대신 수시로 눈을 맞추는 것이 그의 양육 노하우다.

그는 지난해 2월 일본계 여성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했다. 최근 출간한 새 저서 『닉 부이치치의 플라잉』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속과 겉이 모두 아름다운 여자와의 만남을 생각하기 어려웠고,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중 누구도 부이치치의 팔다리가 없는 것을 염려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를 더 가꾸겠다
그는 지난해 2월 일본계 여성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이로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끌렸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몰라 한동안 변죽만 울리다 우연한 계기로 인연이 다시 닿아 연인이 됐다.
그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최근 출간한 새 저서 『닉 부이치치의 플라잉』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속과 겉이 모두 아름다운 여자와의 만남을 생각하기 어려웠고,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중 누구도 부이치치의 팔다리가 없는 것을 염려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연애를 시작할 때, 닉 부이치치는 이미 유명한 강연자였다.
그는 예비 처가 식구들이 자신을 겉만 번지르르한 유명 인사로 볼까 봐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여느 커플과 똑같이 연애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이 많이 뛰었어요. 사랑을 시작할 때는 매일 문자를 주고받았고요. 한 번에 서른 개 이상은 기본이었고, 1000개 가까이 문자를 주고받은 날도 있어요. 문자를 150개쯤 보내면 발가락에 쥐가 나기 시작해요(웃음).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열네 살 소년이든 예순네 살 할아버지든 일단 불꽃이 튀면 반응은 한결같아요. 어떻게 하면 심지에 불을 당긴 상대와 함께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하느라 다른 일에 집중할 여유가 없죠. 내가 그랬어요. 무슨 일을 하든 그녀 생각이 났어요.”
팔다리가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아무리 깊이 사랑한대도 쉬운 결정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카나에 미야하라는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을까. 두 사람이 결혼을 생각할 즈음 닉 부이치치의 부모가 그녀에게 물었다.
“만에 하나 팔다리가 없는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녀는 “닉을 깊이 사랑하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도 그렇게 키우겠다”고 대답했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서 닉 부이치치에 대한 사랑이 읽힌다.
“다섯 아이가 전부 팔다리 없이 태어난대도 똑같이 사랑하겠어요. 저는 훨씬 쉬울 거예요. 두 분은 느닷없이 닉을 만났지만 저에게는 아이들이 보고 따를 롤 모델이 있으니까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닉 부이치치는 부모님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에 관해서는 때로는 지나칠 만큼 방어적이 되는 어른이었다. 그 마음을 움직일 아가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나에 미야하라는 그의 부모를 감동시켰다. 며칠 후 닉은 바다 위 요트에서 그녀에게 청혼했고 두 사람은 7개월 후 결혼했다.
그는 결혼 후 삶을 보는 자신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한동안 다른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면, 요즘은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새삼 느꼈단다.
“아내와 같은 길을 걷게 됐잖아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나를 더 잘 가꾸고 싶어요. 과로하거나, 잘 안 먹는다거나 운동을 게을리 하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몸을 괴롭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감정을 잘 조절하고 늘 배려하고 격려하며 내 식구들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마음도 크고요. 아빠가 되면서 가족이 하나가 되는 것, 서로 격려하고 희망이 되어준다는 것을 확실하게 더 느꼈어요.”
그는 이번 방한 기간에 가진 강연과 기자회견에서 ‘Great love story’나 ‘True love’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늘 웃음이 번졌고 “어떻게 미인 아내를 만났느냐”는 물음에는 “아주 좋은 질문”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팔다리가 없는 대신 긍정의 에너지를 가진 그에게 새 가족은 마치 천군만마처럼 보였다. (미인과 결혼한 비결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넘어지고 실패해도, 백번이라도 다시 도전하겠다
사람들은 요즘도 ‘호주판 오체불만족’인 닉 부이치치의 에너제틱한 인생을 보면서 많은 메시지와 울림을 얻는다. 그는 중국 쓰촨성 지진 현장을 찾아 생존자들 앞에서 희망을 강연하고 삶의 의욕을 잃은 노숙자들에게도 자기 몸을 내보이며 열정을 되찾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 희망을 말하기까지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슈퍼히어로처럼 보지만 내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어릴 때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내 인생에서 언제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어요. 아이들과 다른 내 모습을 처음 인식한 순간 절망을 맛봤어요.”
8세 때, 그는 삶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신에 대해 분노했고,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했다. 인생이 두렵고, 나약해졌으며 항상 절망에 빠져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살을 생각하며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뛰어들기도 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발견해 목숨을 건졌다. 그 뒤로도 두 번 더 자살을 기도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소년을 구한 것은 그의 부모였다. 성직자 출신인 그의 부모는 평소 아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늘 눈을 마주치며 항상 ‘잘했다.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다’며 칭찬해줬다. 이 말들이 가슴에 씨앗처럼 내려 열매를 맺었다. 결국 닉 부이치치는 13세 즈음부터 자신의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정신적으로 극복해나갔다.
부모님은 그가 장애인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진학할 것을 원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을 너무 인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나가길 바랐다. 그러고는 아들이 성장할 때마다 점점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하도록 도왔다. 그는 부모님의 권유로 대학에서 회계학과 재무학을 복수 전공했고, 운동장에 나가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두 개뿐인 발가락으로 전자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췄으며 윈드서핑과 다이빙 같은 액티비티에도 도전했다. 지금까지 그가 도전해서 실패한 스포츠가 없다.
“여러 번 실패하고 넘어졌어요.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할 때도 있고요. 하지만 백번이라도 다시 시도해요.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그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해요. 이겨내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어요. 고대 감옥에서는 죄수들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놨대요. 그런데 이 쇠사슬을 오래 차고 있으면 나중에 그걸 풀어줘도 사람들이 못 뛴대요. 한 번도 뛸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죠. 늘 언젠가는 뛸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쇠사슬에 묶여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안 돼요. 아이에게도 그 얘기를 많이 해주고 싶어요.”
‘희망 전도사’라는 단어가 한편으로는 식상하게 들리겠지만, 닉 부이치치를 설명하는 데 이것보다 확실한 말은 없다. 그는 “우울한 마음을 먹은 채로 팔다리를 갖느니, 우울함 없이 맨몸으로 지내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아빠가 되어 돌아온 서른둘 청년의 열정적인 일상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기획 / 이한 기자 이석창(인턴기자) 사진 / 홍하얀(studio lamp) 닉 부이치치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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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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