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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glespr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7.11.28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연재를 시작하기 전, 편집자와 필자로서 최초로 안면을 트는 자리였고, 아직 추운 3월 초순이었다. 약속을 하기 위해 통화를 했는데, 전화기 건너편에 들려오는 자신만만하고 거침없는 목소리에 나는 약간 주눅이 든 상태였고, 그런 모습을 혹시나 내비칠까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책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거든!’ 하는 당돌한 마음이 있었다(알고 보니 정말 턱도 없는 오만함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CBS 로비를 서성이고 있었고, ‘짠~’ 하고 그녀가 등장했던 거다.
그날 그녀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며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두 눈은 뭔가를 탐색하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었고, 매주 한 편씩 메일로 전해지는 그녀의 칼럼을 보며 또 그 칼럼이 묶여진 책 『침대와 책』을 읽으며, 그 글을 쓴 ‘정혜윤’이라는 사람이 내내 궁금했다. 여기저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자신만의 책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그 많은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 책들을 부둥켜안고 바야흐로 몸을 섞어서 자신을 느끼고 타인을 느끼는지, 책 속에서 귀중한 ‘인생의 힌트’를 길어 올리듯 타인의 빛나는 정신을 길어 올리는 그녀의 심장, 그녀의 마음가짐, 그런 것들 말이다. 이 인터뷰는 이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아주 아주 거친 보고서가 될 듯하지만, 당신이 그녀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정혜윤 PD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하찮은 인터뷰 기사가 만드는 선입견 같은 것은 필요없기 때문에(오히려 방해가 된다). 정혜윤 PD가 ‘고정관념’ 없이 타인과 세상을 대하듯이 말이다.
『침대와 책』이 나온 연유
“책이 나왔는데, 기분이 어때요?”
“글을 쓰면 YES24에서 책을 준다고 해서 책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었어요. 책 받을 욕심에 2주일에 한 번 쓰라는 것을 일주일에 한 번씩 썼죠. 처음에는 정말 책 낼 생각이 없었거든요. 어떤 진지함도 없이 오직 즐거움과 욕심으로만 썼는데 이렇게 책으로 이렇게 묶여 나오니까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
이 글이 실제의 나와 아주 근접해 있어요. 나보다 점잖은 나나, 의젓한 나나, 현명한 내가 아니라 딱 나. 종알종알거리는. 정말 어떤 매체에 게재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종알종알 말해주는 심정으로 썼어요. 친한 사람 옆에 딱 달라붙어서 얘기하는 그런 자세로 쓴 거예요.
그래서 글도 아주 빨리 썼고, 책 이야기와 감정만 넘실넘실대는 충만함으로 일을 했어요. 이 글을 쓰면서 이 책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책을 생각하고, 또 받을 책을 기대하고 이 모든 감정이 엉켜 있었던 거예요. 머리 속이 바빠지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머릿속이 너무 바빴어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도 내가 안 쓴 구절, 쓰지 않은 책이 생각나면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거죠. 맙소사, 나구나! 이런 마음.”
“책 나오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우리 엄마! 필자 소개문에도 썼지만 우리 엄마는 자식들이 책 읽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또 격려했어요. 얼마만큼 그랬나 하면 보통 식탁에서 책 보고 신문 보고 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행동이잖아요. 우리 집은 그게 너무 당연했어요. 밥 먹을 때도 책 보면서 먹고.
책이라는 것이 거의 생활 필수품인 거죠.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처럼. 그렇다고 책을 가지고 심오한 얘기를 한다든가,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 적도 없고. 다만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몸에 달라붙은 거예요.
‘요즘 읽는 책은 뭐예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듯이 책을 손에 쥐고 있더라고요. 점심을 먹으러 누구랑 나갈 때 핸드폰과 함께 화장품 파우치가 아니라 책을 들고 나가는 거야. 나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책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지만 ‘엄지와 검지 사이’라는 이 생생한 표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꼭 챙겨요. 한 권만 챙기면 불안한 거야, 혹시 너무 빨리 읽어버리면 어떡하나, 만에 하나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그래서 꼭 두 권을 챙겨요. 원래 백이 있고, 항상 쇼핑백 하나를 더 들고 출근하는데 거기에는 책을 담아요. 겨울에는 쇼핑백 대신에 장바구니로 바꿔볼까 해요. 찢어질까 봐.(웃음)”
“더는 없어요?” 라디오 PD 정혜윤과 책
그런 사람이 있다. 아주 아주 순수하고 진실되고, 너와 내가 뒤섞여버리는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을 아는 사람. 그 순간이 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맛본 사람. 그것이 진짜 제대로 된 인생의 그 무엇임을 아는 사람. 그 찰나의 순간이 주는 감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대할 수 있다. 그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겨우 겨우 그 순간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그녀에게 라디오는 책과 동일하다. 어쩌면 사람과도 동일할 것이다.
“‘당신은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읽었어?’라고 묻는다면, 라디오는 사실 책의 매체예요. 끊임없이 누군가를 불러내서 당신의 입장과 당신의 세계관을 묻는 직업이잖아요. 그것을 매일 누군가에게 들어야 하기 때문에 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사람을 놓치지 않아요. 그것을 내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해오면서 (그녀는 1993년부터 라디오 피디 일을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장르의, 너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관심사를 어디에 두고, 거기에 얼마나 집중하느냐의 문제를 보게 되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나한테 항상 주는 것은 어떤 순간에 사람들이 확 미쳐버리면 큰다는 것. 적어도 어떤 사람이 성숙하거나 달라지려고 할 때, 그 순간을 내가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가장 빛나는 부분이 있다, ‘너는 원래 그런 애야.’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이 사람이 언제 한 번 빛났나.’ 요걸 보는 게 굉장히 흥미롭고 그 순간을 한 번 봐버리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돼요. 사실은… 그런 식으로 트레이닝이 된 거예요. 그 사람을 불러내서 ‘더는 없어요?’라고 물어보고.
나는 ‘더는 없어요?’가 너무 좋아요. 작가들이 나한테 하는 말이 나와 프로그램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고요. 질문을 하는 방식이 ‘예의 없음'인데 사회적인 어떤 것을 고려해서 돌려 말하지를 않아요. 확 본질을 물어봐 버리는 거예요. 그 본질을 물어보는 행위는 무엇을 말하느냐면 ’A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를 더 알고 싶다, 더 근본에 다다르고 싶다.‘ 이런 것이 있었고, 그 과정에 만약 그분이 책을 쓴 사람이라면… 나는 책만큼은 사람들이 가짜로 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요. 책만큼은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봐 줘. 나는 이런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어.’ 이런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자기가 꿈꾸는 자기가 나와요. 나는 그런 게 대단히 좋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는 것이 굉장히 좋았고 그래서 책을 보는 양이 직업상 많아지는 거예요.”
“PD님 글을 읽다 보면, 타인에 대하여 굉장히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고정관념 없이 대한다는 그런 느낌?”
“저는 사람들에게 별로 실망을 안 해요. 응시를 할 수 있지만 실망은 안 하는 것이, 사실은 어느 정도 나는 고정관념이 없는 거 같아요, 수많은 자아가 있고 어느 한 시기에 그 자아를 봤고 다른 시기에 다른 자아를 봤다고 해서 실망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싫어요. 삶의 다양성? 그것이 어느 정도는 에로틱해요. 그 감정 자체가. 고정관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강하지 않은 내가 있고 상대방이 있고,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소통이 되는 것, 그것이 굉장히 좋고 나 같은 경우는 책이 매개가 된 것이 굉장히 많아요. 사람을 만날 때 처음에 대화를 트는 방식이 있잖아요. 축구일 수도 있고, 야구일 수도 있고… 나의 경우는 압도적으로 책과 유년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이에요. 서해안의 노을을 봤다거나 갯벌을 봤다거나 이런 사람 보면 무조건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책에 대해서도 ‘뒤라스를 좋아해.’ 그러면 확 호기심이 생겨요.
또 너무나 반대로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책을 좋아하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로 연출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연출은 나한테 너무 쉬워요. 아주 즐겁기 때문에 쉬워요.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우리 사이에는 너무나 무궁무진한 얘기들이 있는 거예요.”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Go, Go, Go….
“읽는 것과 자기 현실을 연결시키는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면, 읽는 것 따로 자기 사는 것 따로일 수 있는데 내가 라디오 시사 피디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한 거였다고 생각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배추값이 폭락했어요. 농민들이 밭도 갈아엎고, 시위도 하고…. 나는 농촌 출신이어서 이런 뉴스를 들으면 너무나 안타까운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 뉴스가 진짜 피가 흐르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게 할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인물을 찾는 거예요. 새벽에 트럭에 배추를 싣고 팔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농부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죠. 신문기사가 있고, 내가 있고, 내가 찾아야 하는 인물이 있는 거예요. 이 사이에 현실이 있는 거죠. 이런 식의 방송을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찾았어요. 그 농부가 해가 질 때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쓴 편지를 우리가 결국은 받게 되었어요. 그것을 방송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결국은 내가 읽는다든가, 뭘 이해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들의 이야기로 끌어들어야 한다, 이것이 그때 당시 나에게 중요한 단서가 되었어요. 내가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여기와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말한 힌트 같은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나는 제일 싫어하는 말이 전화 걸 때 ‘지금은 연결될 수 없으니….’ 너무 화가 나요. 어떻게 연결이 안 된단 말이에요. 난 연결되는 게 좋거든요. 연결하라. 연결하라…. 난 그 말이 참 좋아요.”
“라디오 PD는 어떻게 되셨나요?”
“원래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언론사 시험을 계속 보다가 CBS 기자 시험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촌오빠가 CBS는 이번에 여기자를 안 뽑으니까 직종을 바꾸라고 하더라고요. 동생한테 사람 적은 곳으로 내고 오라고 시켰는데, 피디로 원서를 내고 왔더라고요. 시험을 쳐서 붙었고 그래서 피디가 되었어요.
합격을 하기는 했는데 피디가 준비된 것은 아니었잖아요. 첫 방송이 남북이 동시에 진행한 광복절 행사였는데 그날을 잊지 못해요. 갑자기 이불장의 솜이불을 꺼내서 솜이불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라디오를 틀어는 놨지만 끄지는 못했어요. 듣고는 싶은데 너무 창피한 거야. 단지 한 장의 솜으로는 부족했고, 왜 부족했느냐면 내가 열심히 준비는 했어요. 통일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수많은 입장, 입장이 있었는데 없었던 것이 뭐였느냐면 그게 결국은 우리의 이야기예요. 내가 만드는 시사프로그램의 공통점이 박사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면 누구든 귀를 기울이는 방송을 해보자.
박사님들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은 그다지 정돈되지 않았고, 나조차 정돈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아는 체를 하며 방송을 했는가… 그 부끄러움이 아주 아주 오래갔어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는 자세만은 가지지 말자.”
깊이, 더 깊이…
“정말로 다양한 책,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책들을 많이 알고, 또 읽으시는 것 같아요.”
“책을 다량으로 무조건 사는 편이에요. 책 속에서 언급되는 책은 웬만하면 읽으려고 해요. 무엇을 얻어야겠다는 식의 목표를 가지고 책을 읽지 않아요. 순간에 아주 집중하고, 책을 가지고 노는 편이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보다 책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더욱 신나했는데, 요즘 재미있게 읽는 책 안 물어보느냐며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모옌이라는 작가가 쓴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티엔탕 마을은 마늘종을 기르는 마을인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래요. 풍년이 들어도 못 살고, 흉년이 들어도 못 살고. 아주 아주 가난한 마을에서 굉장히 실한 여자애를 사랑하는 남자애가 나와요. 이 남자애가 여자애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해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고 첫날 벌판에서 밤을 보내는데, 여자애가 저만치 있는 남자의 등짝을 보는데 그 거리만큼 그 남자애가 누군지 모르겠는 거예요. 너무 먼 거야. 그런데 남자애가 돌아서서 자신을 주물러주고 ‘힘들지.’ 하면서 위로해주면서 또 그 만큼의 거리는 없어지고…. 이러한 복잡한 심정에 놓일 때 초록 불빛이 돌아다니는데 반딧불이었어요.
결국 둘은 잡혀서 남자는 죽도록 맞고 여자애도 질질 끌려가는데, 남자가 맞을 때 이 여자도 오빠 발에 채이면서 본 것이 그 초록 불빛! 남자가 맞는 순간 여자가 하려는 행동이 그 불빛을 잡는 거예요. 저 불빛을 잡을 수 있으면… 잡을 수 있으면…. 그 불빛을 잡는 장면이 난 참 좋은 거야. 뭐라도 하나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불빛 같은 것 하나 잡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심정.”
“피디 님 글 읽다 보면 밑에 깔려 있는 정서가 슬픔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나는 되게 예민한 사람이고 여린 사람이라서 사람을 자꾸 응시하는 사람은 슬프게 되는 거 같아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하’ 하고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순간 그녀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져 오는 듯했다.) 형식적으로 굉장히 자주 웃고 유머러스하고 소위 말하는 까부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렇게 까부는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사람들은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하므로 유머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죠. 나는 유머러스한 언니의 속마음이 보이는 거예요. 저 언니가 외로워서 저렇게 유머를 하고 있구나. 그 유머가 슬픈 거예요.
나는 사람을 취약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또 누군가가 그 사람을 원하면 너무나 쉽게 부풀어 오르는 존재라 생각해서 취약함과 과장되는 것, 그 간극이 보이는 거예요. 그건 누구에게나 있어요. 이게 정말 나한테는 우주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사람이 자기 내부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건 즐겁고 흥겨운 우주가 아니죠. 흥겹게 건너야 하는 우주긴 하지만. 그거랑 하늘을 보는 것은 같다고 생각해요. 우리, 이해할 수 없잖아요. 별을 몇 개나 이해하겠어요. 그러니 계속 봐야 하는데 우리 내부에도 우주가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으세요?”
“이 글을 연재하기 전에, 단 한 번 출판 제의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제목이 ‘내가 죽기 전에 같이 술을 마셔보고 싶은 남자’라는 책이었는데 그 리스트가 소설가였어요.
1등이 칼 세이건! 우주로부터 뭔가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고 왜 인간과 인간이 하늘을 봐야하는가를 끝없이 설명하려 한, 그 시기의 칼 세이건이 너무나 궁금해요. 두 번째가 폴 오스터. 세 번째는, 원래는 에코였는데 지금은 성적 매력이 많이 떨어져서 그래서 지면 인터뷰로 하기로 했어요. 하하하. 밀란 쿤데라인데요. 나는 개인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연애 소설로 읽혀요. 이만큼 여자를 잘 아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랑에 대해서도 이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 한동안 외신을 볼 때 밀란 쿤데라가 사망하면 어떡하나, 죽기 전에 한 번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얘기를 했더니 책을 한 번 내보자고 누가 제안해서 크게 기뻐했더니 그 다음에는 연락이 없더라고요.(웃음)
하여간 그런 사람들을 상상해요. 이런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관점을 가졌을까… 그 사람의 관점을 예측하는 거죠. 어떤 사람의 정신의 일관성을 예측하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인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세계, 아주 뛰어난 어느 작가의 세계를 완전히 내 안에 갖게 되면 나의 미토콘드리아도 좀 자라지 않을까? 이런 것…. 미토콘드리아라는 말, 너무 예쁘죠.”
“책에 실린 23편의 글 중에서 가장 아끼는 글은 무엇인가요?”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왜요?”
“쓰는 동안 내 마음이 성장했다고나 할까요?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기분…. ‘그래, 그렇게 하자.’라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어요. 글들이 모두 색깔이 다르잖아요. 푸념일 때도 있었고, 애교일 때도 있었고, 수많은 감정이 있는데, 그것만큼은 내가 ‘그래, 이렇게 하자.’라고 나한테도 속삭여 주는 느낌….
그리고 사람들은 이 글을 안 좋아할 수 있지만, 보르헤스가 나오는 글. 보르헤스를 알게 되고, 작별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면서,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못 하겠는 거예요. 이 글을 쓰면서 정말 ‘그래.’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어요. 나는 작별 인사가 너무 좋아.”
그녀는 그녀의 글 <세월은 가고, 헛되이 나이 들어가거나 늙어간다고 느낄 때> 편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느 날 보르헤스는 델리아란 여자와 오후 다섯 시에 11번가의 모퉁이에서 헤어졌다. 그들 사이엔 자동차와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고 그녀는 손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일 년 후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어느 날 그 사실 때문에 밤의 산책을 나가지 못한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는 작별하지만 내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록 자신들이 우연적이고 덧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불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별 인사라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
사소한 작별 인사 하나조차도 불멸을 믿는 행위라는 걸 알게 된 나는 그 뒤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하지는 못 한다. 발뒤꿈치를 들고 상체를 크게 흔들고 손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휘청거림을 만들며 작별 인사를 한다. 매 불멸의 순간에 나를 최대한 각인시키고 싶다. 네 눈동자에 나를 새겨놓고 싶다. 매 순간.」
그녀는 나의 최초의 질문 “새 책이 나오고 기분이 어땠느냐?”라는 그 질문에 “이게 나야.”라고 대답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자신의 한 시기가 조금 정리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는 느낌, 그런 처연한 기분이 들었다 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앞에 두고 “발뒤꿈치를 들고 상체를 크게 흔들고 손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휘청거림을 만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그런 모습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즐겁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깔깔 웃기도 하며 이리저리 감정이 뒤섞이며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녀가 건네 준 트레이싱 페이퍼(tracing paper)로 된 그녀의 명함을 바라본다. 다른 사물과 나를 단절시키지 않고, 뿌옇게 비추어주는 트레이싱 페이퍼. 그녀는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즐겁게, 생활의 일부로 읽었고 그 이야기를 종알종알 들려주고 있지만, 우리가 그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교훈은 이 트레이싱 페이퍼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자기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버려, 자기를 매개로 다른 사물을 비추어내는 트레이싱 페이퍼. 그러므로 트레이싱 페이퍼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끝이 없다. 우주가 끝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없는 것처럼.
그날 그녀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며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두 눈은 뭔가를 탐색하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었고, 매주 한 편씩 메일로 전해지는 그녀의 칼럼을 보며 또 그 칼럼이 묶여진 책 『침대와 책』을 읽으며, 그 글을 쓴 ‘정혜윤’이라는 사람이 내내 궁금했다. 여기저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자신만의 책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그 많은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 책들을 부둥켜안고 바야흐로 몸을 섞어서 자신을 느끼고 타인을 느끼는지, 책 속에서 귀중한 ‘인생의 힌트’를 길어 올리듯 타인의 빛나는 정신을 길어 올리는 그녀의 심장, 그녀의 마음가짐, 그런 것들 말이다. 이 인터뷰는 이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아주 아주 거친 보고서가 될 듯하지만, 당신이 그녀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정혜윤 PD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하찮은 인터뷰 기사가 만드는 선입견 같은 것은 필요없기 때문에(오히려 방해가 된다). 정혜윤 PD가 ‘고정관념’ 없이 타인과 세상을 대하듯이 말이다.
『침대와 책』이 나온 연유
“책이 나왔는데, 기분이 어때요?”
“글을 쓰면 YES24에서 책을 준다고 해서 책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었어요. 책 받을 욕심에 2주일에 한 번 쓰라는 것을 일주일에 한 번씩 썼죠. 처음에는 정말 책 낼 생각이 없었거든요. 어떤 진지함도 없이 오직 즐거움과 욕심으로만 썼는데 이렇게 책으로 이렇게 묶여 나오니까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

이 글이 실제의 나와 아주 근접해 있어요. 나보다 점잖은 나나, 의젓한 나나, 현명한 내가 아니라 딱 나. 종알종알거리는. 정말 어떤 매체에 게재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종알종알 말해주는 심정으로 썼어요. 친한 사람 옆에 딱 달라붙어서 얘기하는 그런 자세로 쓴 거예요.
그래서 글도 아주 빨리 썼고, 책 이야기와 감정만 넘실넘실대는 충만함으로 일을 했어요. 이 글을 쓰면서 이 책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책을 생각하고, 또 받을 책을 기대하고 이 모든 감정이 엉켜 있었던 거예요. 머리 속이 바빠지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머릿속이 너무 바빴어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도 내가 안 쓴 구절, 쓰지 않은 책이 생각나면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거죠. 맙소사, 나구나! 이런 마음.”
“책 나오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우리 엄마! 필자 소개문에도 썼지만 우리 엄마는 자식들이 책 읽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또 격려했어요. 얼마만큼 그랬나 하면 보통 식탁에서 책 보고 신문 보고 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행동이잖아요. 우리 집은 그게 너무 당연했어요. 밥 먹을 때도 책 보면서 먹고.
책이라는 것이 거의 생활 필수품인 거죠.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처럼. 그렇다고 책을 가지고 심오한 얘기를 한다든가,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 적도 없고. 다만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몸에 달라붙은 거예요.
‘요즘 읽는 책은 뭐예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듯이 책을 손에 쥐고 있더라고요. 점심을 먹으러 누구랑 나갈 때 핸드폰과 함께 화장품 파우치가 아니라 책을 들고 나가는 거야. 나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책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지만 ‘엄지와 검지 사이’라는 이 생생한 표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꼭 챙겨요. 한 권만 챙기면 불안한 거야, 혹시 너무 빨리 읽어버리면 어떡하나, 만에 하나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그래서 꼭 두 권을 챙겨요. 원래 백이 있고, 항상 쇼핑백 하나를 더 들고 출근하는데 거기에는 책을 담아요. 겨울에는 쇼핑백 대신에 장바구니로 바꿔볼까 해요. 찢어질까 봐.(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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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없어요?” 라디오 PD 정혜윤과 책
그런 사람이 있다. 아주 아주 순수하고 진실되고, 너와 내가 뒤섞여버리는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을 아는 사람. 그 순간이 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맛본 사람. 그것이 진짜 제대로 된 인생의 그 무엇임을 아는 사람. 그 찰나의 순간이 주는 감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타인을 대할 수 있다. 그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겨우 겨우 그 순간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그녀에게 라디오는 책과 동일하다. 어쩌면 사람과도 동일할 것이다.
“‘당신은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읽었어?’라고 묻는다면, 라디오는 사실 책의 매체예요. 끊임없이 누군가를 불러내서 당신의 입장과 당신의 세계관을 묻는 직업이잖아요. 그것을 매일 누군가에게 들어야 하기 때문에 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사람을 놓치지 않아요. 그것을 내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해오면서 (그녀는 1993년부터 라디오 피디 일을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장르의, 너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관심사를 어디에 두고, 거기에 얼마나 집중하느냐의 문제를 보게 되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나한테 항상 주는 것은 어떤 순간에 사람들이 확 미쳐버리면 큰다는 것. 적어도 어떤 사람이 성숙하거나 달라지려고 할 때, 그 순간을 내가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가장 빛나는 부분이 있다, ‘너는 원래 그런 애야.’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이 사람이 언제 한 번 빛났나.’ 요걸 보는 게 굉장히 흥미롭고 그 순간을 한 번 봐버리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돼요. 사실은… 그런 식으로 트레이닝이 된 거예요. 그 사람을 불러내서 ‘더는 없어요?’라고 물어보고.
나는 ‘더는 없어요?’가 너무 좋아요. 작가들이 나한테 하는 말이 나와 프로그램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고요. 질문을 하는 방식이 ‘예의 없음'인데 사회적인 어떤 것을 고려해서 돌려 말하지를 않아요. 확 본질을 물어봐 버리는 거예요. 그 본질을 물어보는 행위는 무엇을 말하느냐면 ’A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를 더 알고 싶다, 더 근본에 다다르고 싶다.‘ 이런 것이 있었고, 그 과정에 만약 그분이 책을 쓴 사람이라면… 나는 책만큼은 사람들이 가짜로 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요. 책만큼은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봐 줘. 나는 이런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어.’ 이런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자기가 꿈꾸는 자기가 나와요. 나는 그런 게 대단히 좋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는 것이 굉장히 좋았고 그래서 책을 보는 양이 직업상 많아지는 거예요.”
“PD님 글을 읽다 보면, 타인에 대하여 굉장히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고정관념 없이 대한다는 그런 느낌?”
“저는 사람들에게 별로 실망을 안 해요. 응시를 할 수 있지만 실망은 안 하는 것이, 사실은 어느 정도 나는 고정관념이 없는 거 같아요, 수많은 자아가 있고 어느 한 시기에 그 자아를 봤고 다른 시기에 다른 자아를 봤다고 해서 실망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싫어요. 삶의 다양성? 그것이 어느 정도는 에로틱해요. 그 감정 자체가. 고정관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강하지 않은 내가 있고 상대방이 있고,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소통이 되는 것, 그것이 굉장히 좋고 나 같은 경우는 책이 매개가 된 것이 굉장히 많아요. 사람을 만날 때 처음에 대화를 트는 방식이 있잖아요. 축구일 수도 있고, 야구일 수도 있고… 나의 경우는 압도적으로 책과 유년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이에요. 서해안의 노을을 봤다거나 갯벌을 봤다거나 이런 사람 보면 무조건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책에 대해서도 ‘뒤라스를 좋아해.’ 그러면 확 호기심이 생겨요.
또 너무나 반대로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책을 좋아하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로 연출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연출은 나한테 너무 쉬워요. 아주 즐겁기 때문에 쉬워요.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우리 사이에는 너무나 무궁무진한 얘기들이 있는 거예요.”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Go, Go, Go….
“읽는 것과 자기 현실을 연결시키는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면, 읽는 것 따로 자기 사는 것 따로일 수 있는데 내가 라디오 시사 피디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한 거였다고 생각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배추값이 폭락했어요. 농민들이 밭도 갈아엎고, 시위도 하고…. 나는 농촌 출신이어서 이런 뉴스를 들으면 너무나 안타까운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 뉴스가 진짜 피가 흐르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게 할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인물을 찾는 거예요. 새벽에 트럭에 배추를 싣고 팔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농부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죠. 신문기사가 있고, 내가 있고, 내가 찾아야 하는 인물이 있는 거예요. 이 사이에 현실이 있는 거죠. 이런 식의 방송을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찾았어요. 그 농부가 해가 질 때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쓴 편지를 우리가 결국은 받게 되었어요. 그것을 방송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결국은 내가 읽는다든가, 뭘 이해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들의 이야기로 끌어들어야 한다, 이것이 그때 당시 나에게 중요한 단서가 되었어요. 내가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여기와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말한 힌트 같은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나는 제일 싫어하는 말이 전화 걸 때 ‘지금은 연결될 수 없으니….’ 너무 화가 나요. 어떻게 연결이 안 된단 말이에요. 난 연결되는 게 좋거든요. 연결하라. 연결하라…. 난 그 말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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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PD는 어떻게 되셨나요?”
“원래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언론사 시험을 계속 보다가 CBS 기자 시험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촌오빠가 CBS는 이번에 여기자를 안 뽑으니까 직종을 바꾸라고 하더라고요. 동생한테 사람 적은 곳으로 내고 오라고 시켰는데, 피디로 원서를 내고 왔더라고요. 시험을 쳐서 붙었고 그래서 피디가 되었어요.
합격을 하기는 했는데 피디가 준비된 것은 아니었잖아요. 첫 방송이 남북이 동시에 진행한 광복절 행사였는데 그날을 잊지 못해요. 갑자기 이불장의 솜이불을 꺼내서 솜이불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라디오를 틀어는 놨지만 끄지는 못했어요. 듣고는 싶은데 너무 창피한 거야. 단지 한 장의 솜으로는 부족했고, 왜 부족했느냐면 내가 열심히 준비는 했어요. 통일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수많은 입장, 입장이 있었는데 없었던 것이 뭐였느냐면 그게 결국은 우리의 이야기예요. 내가 만드는 시사프로그램의 공통점이 박사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입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면 누구든 귀를 기울이는 방송을 해보자.
박사님들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은 그다지 정돈되지 않았고, 나조차 정돈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아는 체를 하며 방송을 했는가… 그 부끄러움이 아주 아주 오래갔어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는 자세만은 가지지 말자.”
깊이, 더 깊이…
“정말로 다양한 책,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책들을 많이 알고, 또 읽으시는 것 같아요.”
“책을 다량으로 무조건 사는 편이에요. 책 속에서 언급되는 책은 웬만하면 읽으려고 해요. 무엇을 얻어야겠다는 식의 목표를 가지고 책을 읽지 않아요. 순간에 아주 집중하고, 책을 가지고 노는 편이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보다 책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더욱 신나했는데, 요즘 재미있게 읽는 책 안 물어보느냐며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모옌이라는 작가가 쓴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티엔탕 마을은 마늘종을 기르는 마을인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래요. 풍년이 들어도 못 살고, 흉년이 들어도 못 살고. 아주 아주 가난한 마을에서 굉장히 실한 여자애를 사랑하는 남자애가 나와요. 이 남자애가 여자애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해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고 첫날 벌판에서 밤을 보내는데, 여자애가 저만치 있는 남자의 등짝을 보는데 그 거리만큼 그 남자애가 누군지 모르겠는 거예요. 너무 먼 거야. 그런데 남자애가 돌아서서 자신을 주물러주고 ‘힘들지.’ 하면서 위로해주면서 또 그 만큼의 거리는 없어지고…. 이러한 복잡한 심정에 놓일 때 초록 불빛이 돌아다니는데 반딧불이었어요.
결국 둘은 잡혀서 남자는 죽도록 맞고 여자애도 질질 끌려가는데, 남자가 맞을 때 이 여자도 오빠 발에 채이면서 본 것이 그 초록 불빛! 남자가 맞는 순간 여자가 하려는 행동이 그 불빛을 잡는 거예요. 저 불빛을 잡을 수 있으면… 잡을 수 있으면…. 그 불빛을 잡는 장면이 난 참 좋은 거야. 뭐라도 하나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불빛 같은 것 하나 잡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심정.”
“피디 님 글 읽다 보면 밑에 깔려 있는 정서가 슬픔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나는 되게 예민한 사람이고 여린 사람이라서 사람을 자꾸 응시하는 사람은 슬프게 되는 거 같아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하’ 하고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순간 그녀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져 오는 듯했다.) 형식적으로 굉장히 자주 웃고 유머러스하고 소위 말하는 까부는 언니가 있었는데 그렇게 까부는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사람들은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하므로 유머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죠. 나는 유머러스한 언니의 속마음이 보이는 거예요. 저 언니가 외로워서 저렇게 유머를 하고 있구나. 그 유머가 슬픈 거예요.
나는 사람을 취약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또 누군가가 그 사람을 원하면 너무나 쉽게 부풀어 오르는 존재라 생각해서 취약함과 과장되는 것, 그 간극이 보이는 거예요. 그건 누구에게나 있어요. 이게 정말 나한테는 우주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사람이 자기 내부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건 즐겁고 흥겨운 우주가 아니죠. 흥겹게 건너야 하는 우주긴 하지만. 그거랑 하늘을 보는 것은 같다고 생각해요. 우리, 이해할 수 없잖아요. 별을 몇 개나 이해하겠어요. 그러니 계속 봐야 하는데 우리 내부에도 우주가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으세요?”
“이 글을 연재하기 전에, 단 한 번 출판 제의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제목이 ‘내가 죽기 전에 같이 술을 마셔보고 싶은 남자’라는 책이었는데 그 리스트가 소설가였어요.
1등이 칼 세이건! 우주로부터 뭔가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고 왜 인간과 인간이 하늘을 봐야하는가를 끝없이 설명하려 한, 그 시기의 칼 세이건이 너무나 궁금해요. 두 번째가 폴 오스터. 세 번째는, 원래는 에코였는데 지금은 성적 매력이 많이 떨어져서 그래서 지면 인터뷰로 하기로 했어요. 하하하. 밀란 쿤데라인데요. 나는 개인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연애 소설로 읽혀요. 이만큼 여자를 잘 아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랑에 대해서도 이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 한동안 외신을 볼 때 밀란 쿤데라가 사망하면 어떡하나, 죽기 전에 한 번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얘기를 했더니 책을 한 번 내보자고 누가 제안해서 크게 기뻐했더니 그 다음에는 연락이 없더라고요.(웃음)
하여간 그런 사람들을 상상해요. 이런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관점을 가졌을까… 그 사람의 관점을 예측하는 거죠. 어떤 사람의 정신의 일관성을 예측하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인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세계, 아주 뛰어난 어느 작가의 세계를 완전히 내 안에 갖게 되면 나의 미토콘드리아도 좀 자라지 않을까? 이런 것…. 미토콘드리아라는 말, 너무 예쁘죠.”
“책에 실린 23편의 글 중에서 가장 아끼는 글은 무엇인가요?”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왜요?”
“쓰는 동안 내 마음이 성장했다고나 할까요?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기분…. ‘그래, 그렇게 하자.’라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어요. 글들이 모두 색깔이 다르잖아요. 푸념일 때도 있었고, 애교일 때도 있었고, 수많은 감정이 있는데, 그것만큼은 내가 ‘그래, 이렇게 하자.’라고 나한테도 속삭여 주는 느낌….
그리고 사람들은 이 글을 안 좋아할 수 있지만, 보르헤스가 나오는 글. 보르헤스를 알게 되고, 작별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면서,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못 하겠는 거예요. 이 글을 쓰면서 정말 ‘그래.’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어요. 나는 작별 인사가 너무 좋아.”
그녀는 그녀의 글 <세월은 가고, 헛되이 나이 들어가거나 늙어간다고 느낄 때> 편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느 날 보르헤스는 델리아란 여자와 오후 다섯 시에 11번가의 모퉁이에서 헤어졌다. 그들 사이엔 자동차와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고 그녀는 손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일 년 후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어느 날 그 사실 때문에 밤의 산책을 나가지 못한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는 작별하지만 내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록 자신들이 우연적이고 덧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불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별 인사라는 것을 고안해낸 것이다.”
사소한 작별 인사 하나조차도 불멸을 믿는 행위라는 걸 알게 된 나는 그 뒤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하지는 못 한다. 발뒤꿈치를 들고 상체를 크게 흔들고 손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휘청거림을 만들며 작별 인사를 한다. 매 불멸의 순간에 나를 최대한 각인시키고 싶다. 네 눈동자에 나를 새겨놓고 싶다. 매 순간.」
그녀는 나의 최초의 질문 “새 책이 나오고 기분이 어땠느냐?”라는 그 질문에 “이게 나야.”라고 대답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자신의 한 시기가 조금 정리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는 느낌, 그런 처연한 기분이 들었다 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며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앞에 두고 “발뒤꿈치를 들고 상체를 크게 흔들고 손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휘청거림을 만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그런 모습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즐겁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깔깔 웃기도 하며 이리저리 감정이 뒤섞이며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녀가 건네 준 트레이싱 페이퍼(tracing paper)로 된 그녀의 명함을 바라본다. 다른 사물과 나를 단절시키지 않고, 뿌옇게 비추어주는 트레이싱 페이퍼. 그녀는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즐겁게, 생활의 일부로 읽었고 그 이야기를 종알종알 들려주고 있지만, 우리가 그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교훈은 이 트레이싱 페이퍼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자기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버려, 자기를 매개로 다른 사물을 비추어내는 트레이싱 페이퍼. 그러므로 트레이싱 페이퍼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끝이 없다. 우주가 끝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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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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