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사진
두리해숙
  1. 기본 카테고리

이미지










      장도영과 박정희, 그리고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장도영


 


1923년 평북 출생.


일본 토요대학(동양대학) 사학과 재학중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9년 수도사단 제 9 연대장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1950년 10월 준장 진급, 제 6사단장.


          12월~1월,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냄


1952년 육군 소장 진급


1953년 제 8 사단장


1954년 제 2군단장


1954년 10월 육군 중장 진급


1957년 육군참모차장


1959년 제 2군 사령관


1961년 2월 육군참모총장


1961년 5월 육군참모총장,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부장관, 계엄사령관


1961년 7월 9일 반혁명음모 모의로 체포


          8월 예편


1962년 형집행정지, 미국으로 유학


현재 미국 거주


 


  보시다시피 장도영은 한국전쟁때 사단장으로 복무하였고, 그 이후 순조롭게 진급하였으며, 1961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그런데 이 사람, 박정희와는 1950년부터 아주 끈끈한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전력때문에, 또한 여순반란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았던 사실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구명운동때문에 형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편되었었는데, 50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소령으로 복직하게 된다. 이 때 힘을 쓴 것이 장도영이었다. 단지 동정심의 발동으로 박정희의 복직을 주선한(회고록 '망향'에서) 그는 그 뒤로도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문제시될때마다 그를 감싸주었다. 그래서 박정희도 이 사람을 은인으로 생각하였다.


 


  1961년 1월 참모총장에 임명된 장도영은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가 보고되어 문제시될때마다 수상 집무실에 불려가서는 장면 수상에게 '제가 총장 자리에 있는 한 그런일은 없읍니다.' 라는 말을 하며 수상을 안심시켰다.  아마도 박정희가 설사 일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이 설득하게 되면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5. 16이 터지자 그는 상당히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박정희는 5월 15일 저녁에 장도영에게 '혁명'을 지지해 달라는 전문을 보내게 된다. 전문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지금 자료로서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장도영은 전화통화를 통해 박정희에게 '자진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말을 들을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16일 자정을 기해 김포의 공수단, 6군단 포병단, 제 1 해병여단이 서울을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으며, 새벽 3시 40분에는 6군단 포병단이 육군본부를 점령하였다. 장도영은 공수단과 해병대 병력을 막기 위해 헌병대 김석률 대위가 지휘하는 헌병 소대 병력과 2대의 GMC 트럭을 한강교에 배치하였다. 대체 1000여명이 넘는 쿠데타 군을 막기 위해 1개 소대 병력을 보낸다는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처사라 하겠는데, 결국엔 쿠데타군과 이 방어 병력이 4시 20분경 충돌하였고 중과부족이었던 헌병대는 후퇴하였다. 새벽 5시까지는 서울특별시 경찰국, 중앙청, HLKA 방송국(현재 KBS), 태평로 국회의사당 등 주요 목표가 점령되었고, HLKA의 새벽방송을 통해 이른바 혁명공약이 방송되기에 이른다. 것도 장도영 의장의 성명으로.


 


   그런데 이때 장도영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총장으로서 무언가 확실한 입장을 취하여 쿠데타를 진압하던가, 아니면 혁명을 지지하여야 할 것인데, 5월 16일 하루동안 장도영은 육군본부에 모여있던 박정희와 혁명주체들에게 자진해산과 원대복귀를 또한번 종용하였으며, 게다가 아침에는 청와대로 박정희와 함께 대통령을 만나기까지 하였다. 그 동안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1군 휘하 36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진압하자.'고 건의하였고(이건 대통령에 의해 보기좋게 거절당하였다.), 1군 사령관인 이한림 중장은 원주 1군 사령부에서 혁명을 진압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장도영은 이른바 혁명 주체로 불리던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었고, 총장실 주변에서 이들은 난동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결국 그는 4시 30분경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락하였고, 곧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부탁으로 그는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1961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청 앞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가두 행진에서


 








5월 18일에 찍힌 사진 두장.


 


[출처] 장도영과 박정희, 그리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작성자 최재원


 


 


 









  5월 16일 오후 4시 30분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받아들임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장도영은 18일 육사생도들의 혁명 지지 가두 행진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친애하는 사관생도 여러분! 이 뜻있는 목표에는 추호의 의혹과 동요와 의심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어데까지나 민주주의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뒷받침이 되고……(후략)

1961. 5. 18.


육사생도 혁명 지지 가두시위에서,


중장 장도영


 


  과연 그가 원했던 정부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자서전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군사혁명을 지지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진위는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참여했던 군사혁명위원회가 군정의 연장을 획책하는 등 반민주적 행위를 여럿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곧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계엄사령관, 국방부 장관, 내각 수반, 육군참모총장을 모두 겸임하며 한국 최고의 권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의 2공화국 헌법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존재였고 실권은 모두 수상이 거머쥐고 있었는데, 내각수반 자격으로 장도영이 그 실권을 모두 거머 쥔 것이었다. 아니, 거머 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도영은 사실상 '얼굴마담'격이었던 것이다. 5. 16. 당시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혁명 주체들에게 그의 지위에 대한 의문을 품도록 만들었고, 또한 그의 독단적인 태도는 당시 중령급이 다수였던 육사 8기생들에게는 거슬리는 것이었다.(그의 독단적 행위가 무엇인가 하면: 비상계엄을 아무런 의논 없이 경비계엄으로 변경한 것(단기 4294년(1961년) 5월 27일 12시), 아무런 상의 없이 미국 방문을 요청 한 것)


 


 특히 더 문제되는 것은 육사 5기생들과 육사 8기생들간의 갈등이었다. 김종필을 선두로 한 8기생들은 중앙정보부(이건 김종필이 창설했으니 더 말 할 것도 없다.)등의 요직을 장악해 나가면서 최고회의를 주도해 나간다. 그런데 이게 5기생들 보기에 영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 5기생들, 특히 문재준 대령(헌병감), 송찬호 준장, 박치옥 대령(공수단장), 이회영 대령(의장 비서실장)은 장도영과는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8기생들은 이들을 고깝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갈등이 눈에 띄게 불거져 나온 것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제정 때였다. 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군사정부의 잠정적 헌법으로,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헌법교수였던 한태연 교수와 이석제 중령(그는 가난한 군인생활을 견디다 못해 고등고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헌법을 한태연 교수의 교과서로 공부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이 초안을 마련했었다. 의회에서 제정된 법이 아니므로, 사실상 한국에서 행정명령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유보한 최초의 사례였다.(이 법은 이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이 제 2공화국 헌법과 대치될 경우에 비상조치법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었다. 국민의 기본권 일부가 이 비상조치법에 의해 유보되었었다.)


 


  이 법의 조문 중 다음과 같은 조문이 바로 갈등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제4조 (최고위원)


   ①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의 이념에 투철한 국군현역장교중에서 선출된 최고위원으로써 조직한다.
   ②최고위원의 정수는 20인이상 32인이내로 한다.
   ③최고위원의 선출은 최고위원 5인이상의 추천에 의하여 재적최고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써 한다.
   ④최고위원은 내각수반과 군무를 제외한 다른 직무를 겸할 수 없다. 단, 의장인 최고위원은 내각수반을 제외한 타직을 겸할 수 없다.


 


   제 4조 4항. 최고위원은 내각수반과 군무를 제외한 다른 직무를 겸할 수 없다. 단, 의장인 최고위원은 내각수반을 제외한 타직을 겸할 수 없다.


  누구를 겨냥한 조항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정도로 명백하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았던 장도영 중장에게서 내각 수반과 최고회의 의장을 제외한 타직을 박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5기생을 주축으로한 이북-장도영파는 이 조항의 삭제를 획책하였으나 결국 1961년 6월 6일 새벽에 무수정 통과되어버렸다. 이에 분개한 장도영은 사석에서 박정희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고 하며, 약 10일간 칩거해 버린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력이었다. 앞에서 8기생들이 중정의 주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중앙정보부 활동의 근거를 제공할 중앙정보부법이 막강한 권한을 중정에 부여하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정보사건에 관한 수사기관 지휘권(이는 검찰까지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다.), 중정의 수사에 대한 국가기관의 협조의무(이는 국가기관인 대통령까지도 중정에 협조해야 한다는 해석을 가능케 하여 논란이 되었다.)등의 조항은 5기생들이 보기에 법률 자체가 문제이기도 했지만 8기생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느낄만도 했다.


 


  더군다나 김종필은 5기생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짓을 많이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들을 분노케 했던 것은 바로 박치옥, 문재준 등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감시였을 것이다. 이쯤 해서 그들은 참을 수 있는 한계상황에 도달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점화 코일을 당긴 것은 8기생으로 보인다. 당시 문재준 대령은 헌병감으로써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의 명령에 의해 비리 장교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김형욱이 이 비리 장교로 정리된 장교들 중 한명을 중앙정보부에 천거하여 임용되게 한 것이다. 중정요원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은 전술한 바 있고, 그것이 문재준을 더욱 격노케 했던 것 같다.


 


  이래서 문재준은 김종필을 '혼을 낼'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이란 것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7월3일 새벽2시에 헌병대 병력으로 잠든 김종필을 체포한다. 그를 헌병감실로 연행한다. 이 연락을 받으면 박치옥은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중앙정보부 건물을 포위한다. 그런 뒤에 출근하는 박정희 장군에게 사태를 보고한다.


  그 직후 정보부장에 김윤군 해병준장의 선임을 건의하고 앞서 문제가 되었던 중정의 막강한 수사권을 박탈하도록 건의한다.


 


  문재준은 박치옥의 동의 직후에 헌병대 휘하의 CID(방첩대) 병력에 대기명령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이 계획이 새어 나가 김종필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1961년 7월 2일 밤, 김종필의 명령하에 중정요원들이 문재준 대령, 박치옥 대령, 이회영 대령 등을 체포하였고, 사태가 이리 되자 이미 마음 속으로 사퇴를 결정하고 있던 장도영 중장은 다음날 바로 사퇴성명을 내고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7월 9일, 비로소 최고회의의 발표에 의해 장도영과 그의 측근들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장도영은 자택에서 연금중이고 나머지는 수사중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그 때 최고회의 내에서 권력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의 전개는 뻔한 것이라 해도 무방했다. 혁명재판소에서 장도영은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 잠시 형을 살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고 도미하여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3.04.26

댓글 0

빈 데이터 이미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두리해숙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09.3.27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09.3.27
  2. 작성일
    2008.12.30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08.12.30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08.12.30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08.12.30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33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15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210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