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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해숙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8.7.23
장도영
1923년 평북 출생. 일본 토요대학(동양대학) 사학과 재학중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9년 수도사단 제 9 연대장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1950년 10월 준장 진급, 제 6사단장. 12월~1월,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냄 1952년 육군 소장 진급 1953년 제 8 사단장 1954년 제 2군단장 1954년 10월 육군 중장 진급 1957년 육군참모차장 1959년 제 2군 사령관 1961년 2월 육군참모총장 1961년 5월 육군참모총장,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부장관, 계엄사령관 1961년 7월 9일 반혁명음모 모의로 체포 8월 예편 1962년 형집행정지, 미국으로 유학 현재 미국 거주
보시다시피 장도영은 한국전쟁때 사단장으로 복무하였고, 그 이후 순조롭게 진급하였으며, 1961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그런데 이 사람, 박정희와는 1950년부터 아주 끈끈한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전력때문에, 또한 여순반란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았던 사실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구명운동때문에 형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편되었었는데, 50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소령으로 복직하게 된다. 이 때 힘을 쓴 것이 장도영이었다. 단지 동정심의 발동으로 박정희의 복직을 주선한(회고록 '망향'에서) 그는 그 뒤로도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문제시될때마다 그를 감싸주었다. 그래서 박정희도 이 사람을 은인으로 생각하였다.
1961년 1월 참모총장에 임명된 장도영은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가 보고되어 문제시될때마다 수상 집무실에 불려가서는 장면 수상에게 '제가 총장 자리에 있는 한 그런일은 없읍니다.' 라는 말을 하며 수상을 안심시켰다. 아마도 박정희가 설사 일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이 설득하게 되면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5. 16이 터지자 그는 상당히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박정희는 5월 15일 저녁에 장도영에게 '혁명'을 지지해 달라는 전문을 보내게 된다. 전문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지금 자료로서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장도영은 전화통화를 통해 박정희에게 '자진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말을 들을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16일 자정을 기해 김포의 공수단, 6군단 포병단, 제 1 해병여단이 서울을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으며, 새벽 3시 40분에는 6군단 포병단이 육군본부를 점령하였다. 장도영은 공수단과 해병대 병력을 막기 위해 헌병대 김석률 대위가 지휘하는 헌병 소대 병력과 2대의 GMC 트럭을 한강교에 배치하였다. 대체 1000여명이 넘는 쿠데타 군을 막기 위해 1개 소대 병력을 보낸다는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처사라 하겠는데, 결국엔 쿠데타군과 이 방어 병력이 4시 20분경 충돌하였고 중과부족이었던 헌병대는 후퇴하였다. 새벽 5시까지는 서울특별시 경찰국, 중앙청, HLKA 방송국(현재 KBS), 태평로 국회의사당 등 주요 목표가 점령되었고, HLKA의 새벽방송을 통해 이른바 혁명공약이 방송되기에 이른다. 것도 장도영 의장의 성명으로.
그런데 이때 장도영의 행동은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총장으로서 무언가 확실한 입장을 취하여 쿠데타를 진압하던가, 아니면 혁명을 지지하여야 할 것인데, 5월 16일 하루동안 장도영은 육군본부에 모여있던 박정희와 혁명주체들에게 자진해산과 원대복귀를 또한번 종용하였으며, 게다가 아침에는 청와대로 박정희와 함께 대통령을 만나기까지 하였다. 그 동안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1군 휘하 36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진압하자.'고 건의하였고(이건 대통령에 의해 보기좋게 거절당하였다.), 1군 사령관인 이한림 중장은 원주 1군 사령부에서 혁명을 진압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장도영은 이른바 혁명 주체로 불리던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었고, 총장실 주변에서 이들은 난동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결국 그는 4시 30분경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락하였고, 곧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이 되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부탁으로 그는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1961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청 앞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가두 행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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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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