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view

quartz2
- 작성일
- 2023.5.24
생각을 바꾸는 인문학, 변명 vs 변신
- 글쓴이
- 프란츠 카프카 외 1명
스타북스
고전 중의 고전 두 작품이 만났다. 소크라태스의 <변명>과 카프카의 <변신>이 그 주인공이다. 작가도 작품의 제목도 누구나 한 번 이상 들어보았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두 작품을 읽고 내용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나도 모름에도 아는 척하며 살아온 부류였다. 아니, 아는 줄 알았는데 이번 독서를 하면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내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찌 인간이 모든 작품을 섭렵할 수 있단 말인가 싶으면서도 내심 부끄러웠다.
두 인물이 시대가 상이하듯 작품 또한 서로 다른 양상을 지녔다. 전작은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론하는 과정이 다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변명 이후 독배를 마시고 이 세상을 떠났다. 기록을 남기고자 하여도 시간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즉,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글이 아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분주히 움직인 탓에 오늘날까지 읽히는 기록이 탄생할 수 있었다. ‘변신’은 글쓰기의 달인과도 같았던 카프카가 직접 저술했다. 보헤미아 태생,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 이렇게만 보아도 배경이 복잡한데, 하필이면 이 인물은 1800년대 후반에 출생했다. 당대 유럽대륙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이른 죽음 덕(?)에 유대인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변명이 굉장히 현실적이라면 변신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인간이 뜬금없이 끔찍한 벌레가 되는 일은 상상 속에서도 쉬이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이토록 다른 두 작품이지만 소재는 ‘죽음’으로 동일하다. 살아있는 인물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당당함을 선보인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예견돼 있는 듯한 죽음을 끌어안는다. 그에게 죽음은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되며, 그 순간 그의 고결함 또한 힘을 얻는다.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 또한 죽을 운명이다. 형식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벌레라는 껍데기에 담긴 내용물(그레고르)은 전과 다를 바 없지만, 가족을 비롯한 여타 등장인물들은 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 마치 돈 버는 기계처럼 지내왔던 그레고르는 역설적이지만 벌레가 됨으로써 끝이 없을 법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 노동이 곧 그레고르의 존재 이유였던 터라, 더는 노동할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가치를 상실하고야 만다. 외면을 뛰어넘어 혐오의 대상이기도 한 벌레와 그레고르는 동격이다. 정체성을 잃은 불쌍한 그레고르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다.
‘죽음을 말하는 철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이는 이 책의 부제이다. 이 부분을 염두 않고 책을 읽은 탓인지, 내게 두 장르 사이의 차이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측면이 보다 큰 울림을 선사했다. 세상과 타협 않고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인 소크라테스, 결과적으로는 죽음의 원인이 된, 가족 구성원에게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관한 그레고르. 둘 중 과연 정답이 존재할까를 놓고 나는 고민했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동일하지만 결코 동일한 죽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누구도 실체를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두려워했다 하여 비겁하다 손가락질할 순 없다. 죽음을 향해 지금 이 순간에도 걷고 있는 우리로선 앞서 죽음을 경험한 이들을 그저 경외로이 바라보는 게 행할 수 있는 전부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요상한 게 유행하고 있다. 부모를 비롯, 가까운 지인 등에게 “내가 만일 바퀴벌레가 되면” 어찌 대해줄 것인가를 묻는 그들의 의도가 그저 즐기기 위함만은 왠지 아닐 듯하다. 혹자는 이와 같은 행태를 “’나 얼마만큼 사랑해’의 현재 버전”이라 칭했다.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건 모두의 공통된 욕구다. 소크라테스처럼 굴든, 카프카의 창작 인물처럼 굴든은 어쩌면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그 순간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우리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죽음이라면, 비록 즐기진 못하겠지만 끊임없이 접함으로써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