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부터 불안의 조짐은 보였다. 오로지 공부를 잘 해야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직, 간접적으로 들었다. 남들처럼 공부를 닦달하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내면화된 학습은 어느 순간부턴가 강요가 되어 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성공이라면 성공이고 실패라면 실패다. 모든 평가는 상대적이므로 나의 입시 결과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쨌건 긴긴 시간 동안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나는 수학능력시험의 종료와 함꼐 지쳐버렸다. 고작 19살에 불과한 아이가 마치 마약이라도 한 것마냥 멍한 표정을 한 채 몇 달을 지냈으니 말 다했다. 대학생활 초창기엔 마냥 좋았다. 시험은 여전히 스트레스로 다가왔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을 오롯이 내 몫으로 활용할 수 있단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나는 현실감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다들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느라 휴학을 밥 먹듯했고, 심지어 우리나라를 떠났다. 누가 더 자극적인 경험을 하나 내기라도 하듯 그들이 각종 체험의 연속인 나날들을 보내는 동안 나는 수능 만점자들의 고백마냥 학교 수업에 충실했고, 대학 도서관이 구비해놓은 책으로 공부를 했다.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비참했다. 학교생활이 좋았을 뿐 무엇이 되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좌초했다.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어도 졸업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놓은 이들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결정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졸업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4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그저 젊고 능력 없는 게 죄라는 태도로 살았다. 그 이후로는 그럼 해피엔딩이냐? 물론 아니다. 이보다 더 안정적일 순 없다는 직장을 가졌으나 그보다 앞서 부모가 사회생활을 접었고, 얼떨결에 나는 가장이 되었다. 그동안 돈에 쪼들렸던 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심보였던지 이것저것 긁어모으는 취미가 생긴 나는 매달 궁핍을 호소하기 바쁘다. 다 큰 자녀가 부모 부양은커녕 매달 돈 없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니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이번달에도 어김없이 눈치를 보느라 흰머리가 늘었다.
나의 삶은 내 어리석음의 결과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일찌감치 학교공부를 내던졌더라면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거다. 공부로는 안 되니까 틀에 박히지 않은, 어쩌면 조금은 요상하기까지 한 직장에 종사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삶이 조금은 흥미로워졌을지도 모른다. 삶의 최소한만을 위해 소비하고 나머지는 지독한 구두쇠의 모양새로 쟁여놓았더라면 지금 겪고 있는 정서적인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일 마치면 바로 집으로, 주말에도 오로지 집에서 보내는 단조로운 삶에 내가 얼마나 만족할 수 있을진 미지수이나 적어도 돈 때문에 작아지진 않을 것이다. 근데 나처럼 어리석은 이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다. 오죽 많았으면 내 나이 또래의, 불운하기 짝이 없는 삶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들도 제법 여럿이다. 예전에는 너무도 당연했던 일들이 꿈꿔서는 안 되는 특권이 된 지금, 인간은 인간이 아닌 듯 살아간다. 그래서 서울, 그것도 성공적인 삶을 반영한다는 한복판 광화문에는 인간 아닌 좀비가 매일 퀭한 모습을 하고 활보한다. 그들의 하얀 와이셔츠는 창백한 피부빛을 닮았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출근하고, 때론 식사도 제 때 하지 못한다. 세상은 그것을 젊은날의 패기이자 열정으로 포장한다. 그런데 열정의 주체인 나는 전혀 뜨겁지가 못하다. 오히려 삶의 의욕을 잃었다며 불평하고, 건강을 잃었다며 불안해 한다. 우리의 삶은 책의 초반부를 장식한 에피소드와 닮은꼴이다. 나도 상대도 글러브를 착용한 채 서로를 노려본다. 아폴로의 강력한 주먹 한 방에 휘청이기를 대체 몇 차례나 했던가. 쓰러질 거 같지만 버티어야 한다며 악을 쓴다. 비틀거리는 내게 정신을 차리라며 코치는 고함을 외친다. 다 졌다 싶은 순간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나조차도 이해가 힘들 정도의 강펀치를 휘두른다. 기대한 건 아닌데 코트 위에 드러누운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난 이겼다. 비로소 승자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근데 승자가 된 그 순간부터 내게는 방어전을 준비해야만 하는 의무가 부과된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일인자가 되었기 때문에 행복할 줄 알았더니 아니다. 언젠가는 나보다 더 강한 놈(!)이 등장하리라는 확신에 시달린다. 다시금 불안에 빠져든다. 아, 이놈의 세상에서 대체 누가 행복하단 말인가. 강자는 강자대로 불안에 떨고, 약자는 약자대로 고뇌한다. 세상은 참 이상한 곳이다.
근데 의외다 싶을 정도로 지금의 '탈진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쉽다. 남들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예스(YES)를 외칠 때 노(NO)를 외치면 된다. 싸움은 상대의 주먹을 받아칠 때 일어난다. 한 대 맞았더라도 반응하지 않으면 싸움은 결코 발생할 수가 없다. 말로는 쉽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미는 게 죽을 만큼 어려울 거 같진 않다. 그렇지만 실상은 아니다. 나는 그리 한다고 쳐도 내 자녀까지 그렇게 하라고는 말 못하겠다. 출신학교가, 소유한 자본의 양이 바로 권력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건 왠지 폭력같다. 결국 내가 불행했고 자녀 또한 불행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릇된 길을 강요한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너도 그래야만 한다, 그나마 공부가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등 감언이설(?)을 남발하면서 한 때 내가 가장 싫어했던 '거짓말 하는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 모두는 좀비다. 인간답게 살길 꿈꾸면서도 인간다워질 방법은 두 귀를 틀어막아 듣지 않는다. 내가 불행했으니 너도 불행해야 한다는 분명 아니건만, 불행은 정상이고 행복은 비정상이라는 식으로 몰고 간다. 그렇게 현대인들은 모조리 불행을 맛본다. 왜 이러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살아야 정상 같아서 난 오늗로 남들처럼 불행을 추구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면 '그래, 바로 이거야'를 속으로 외친다. 때론 이렇게까지 내 모습이 극적이었나를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좀비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과거 내가 혐오했던 형태의 삶에 근접하기 바쁘다. 그나마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꿈꾼다. 근데 마음이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내 자녀는 나와 달랐으면 좋겠다며, 나도 못한 공부를 자녀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와 친구하지 마, 좁은 집에 사는 아이와 놀지마 등등. 당신의 그 말이 내 자녀의 심장을 겨누는 검일지도 모른다는 거, 당신은 아는가. 나는 좀비여도 내 자녀는 인간으로 살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라도 지녔다면 고민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