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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로
- 작성일
- 2015.2.14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 글쓴이
- 김경주 저
열림원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에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제목이 참 아름답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 주인공 장만옥이 실루엣처럼 흐릿해진 사랑을 회상하며 읊던 대사이다.
많은 시집을 읽었지만 시극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보았다. 소낙비가 서리 낀 창문을 때리 듯 김경주 시인의 글은 음미할 때마다 머릿속 나의 이미지를 가차 없이 때리고 있었다.
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좋은 물건을 고른 것처럼 “아~! 이거 물건인데, 물건이야!”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왠지 스산하고 어둡고 차가운 시적 이미지, 그와 대비되는 백색의 눈이 그로테스크하고도 미묘한 아픔을 더욱더 배가 시키는 배경이 되는 듯 했다.
눈 내리는 밤, 버려진 바닷가의 작은 파출소, 하반신이 마비되어 고무튜브를 낀 채 바닥을 기어 다니는 김 씨, 그리고 그 김 씨를 등에 업고 음산한 파출소로 등장하는 직원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상처와 아픔을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묻으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또렷해지고 마는 아이러니!
“손을 밟히면 하늘을 올려다보죠, 하늘에 물고기들이 날아다녔어요”
김 씨 옆을 지나가는 행인들, 그들은 바닥에 기어가는 김 씨의 손을 밟고 지나간다. 왜 손을 밟는지 그게 고의인지 아니면 무의식 중에 일어난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김 씨 손의 밞힘이 바로 인간의 시선보다 아래에서 지낼 수 밖에 없는 세상과 하늘에 날아 다니는 물고기가 있는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되고 김씨는 모든 세상을 아래에서 굽어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아픔을 통해 동경하지만 단순 한 동경일 뿐, 그 아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씨 뿐만이 아니라 파출소 직원도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자폐인 아이가 있었고 어느날 집을 나간 아이는 시신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아내마저도 생을 포기해버린다.
김 씨가 파출소 직원에게 자신의 무릎에 누워보라고 한다. 거절하던 파출소 직원이 앙상하고 부드러운 김 씨의 무릎을 벤다. 그럼으로써 둘의 고통은 “공간”에서 “시간의 정적”속으로 고요히 고요히 스며들어 둘을 동화시키게 된다.
이제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는 그런 아픔은 없다. 시간의 정적, 눈 내리는 그 차가운 이미지를 멈춰버리게 하는 시간의 정적 동안에는 말이다.
이런 시적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시극을 읽다 보니 하루 종일 그 차갑고도 고독한 이미지들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의 멈춤, 그리고 이미지의 돌출, 그리고 상처와 아픔의 공유가 나를 아직도 괴롭히고 있다.
좋은 시적 어구들이 이미지와 상처를 더욱더 차갑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도 슬픔마저 함께 떠나진 않는 법이니까 살아야지,”“제 고향은 감정이에요”“눈을 이렇게 만지고 있으면 하늘 냄세가 나요.”
차가운 바닥, 그 보다 더 아래로 추락해봐야지 그때서야 자신의 가슴이 가장 따뜻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득한 고요의 순간을 우리에게 잠시나마 선사해주는, 언어의 표면적인 의미의 파괴가 진정한 그 언어의 의미를 되살려준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두더지가 땅을 파면서 하늘로 승천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세상엔 남몰래 흘린 눈물이 더 따뜻하다는 것을, 그리고 소리 없이 바닥에 무수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김경주 시인의 시극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차가운 백색의 눈에 아픔이 잠시나마 묻히면서 시간의 정적을 경험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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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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