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해 여름은 마치 독을 푼 안개 속을 헤치며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목이 타들어가듯 아팠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렸고, 이명이 들렸다. 혼란스럽고, 욕지기가 났다. 슬픔의 안개 속에는 날카로운 죄책감의 가시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비나가 살해당했을 때 나는 그곳으로부터 160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곁에서 그애를 지켜주지 못한 게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그건 내가 할 일이었으니까. 그애가 위험에 닿지 않게 중간에서 막아주는 일, 충격을 흡수해주는 일, 그애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일.              p.27

이름부터가 '비상구'였지만, 우리가 비상 탈출하려는 대상은 화재가 아니었다. 아니, 맞았는지도 모른다. 일상이라는 불은 때로 짙게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우리를 질식시켰다. 우리는 바텐더로 일하고, 데이트를 하고, 때로는 학교에 다니고, 때로는 안 다니면서 자립해보려던 너무 어린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와 싸우고, 실직하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또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들면서. 리아와 나는 도저히 숨을 못 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서로의 방에 불쑥 찾아가 "화재 비상구?"라고 물었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p.152~153

사랑에는 여러 종류의 형태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루어지는 거의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과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꽃 튀기는 사랑, 가족 간에 느끼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사랑, 그리고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친구 간의 사랑이다. 특히나 여자들의 우정은 조금 더 애틋한 뭔가가 있다. 그녀들은 자매처럼 가깝고, 엄마처럼 서로를 돌보며, 상대의 행복을 내 행복만큼이나 온 힘을 다해 바라는 영혼의 단짝이다. 일탈의 공모자이자 실패의 목격자이기도 하고, 한 시절을 공유하는 과거이자 영원히 그리울 미래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여자들의 우정에 내재한 다양한 감정과 그 복잡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인 릴리 댄시거는 어린 시절부터 각별하게 친하고 서로를 아꼈던 사촌 동생 사비나의 죽음 이후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깊은 상실감을 겪는다. 겨우 스무 살이었던 사비나는 자기 집에 가던 중 현관문 앞 몇 발짝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살해당했다. 그리고 13년이 지나서 오랜 애도의 결과물로 이 책을 썼다. 사바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유년 시절의 친구, 학창 시절의 친구 등 각각의 시기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추억을 담았다. 서로가 있어 세상에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서로가 있어 불안 속에서도 살아낼 수 있었던 순간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누구나 자신의 내밀한 우정에 대해 떠올리게 만들어 주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겪어온 우정의 연대기이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을 건너온 이의 회고록이기도 한 이 책을 통해 각자의 소중한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