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지니
- 작성일
- 2013.8.14
비정근
- 글쓴이
- 히가시노 게이고 저
살림출판사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야 워낙 많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어, 이제 미 출간 작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인데, 그의 초기 작품 중에 첫 출간되는 작품이라 기대를 많이 했다. 게다가 제목과 카피 문구인 <비정규직이 비정한 현실에 던지는 돌 직구!> 에서 묻어 나오는 분위기가 궁금증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다. 흠... 하지만 이건 뭐, 어린이용 추리소설 같다는 느낌이다. 여전히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있고, 기발한 트릭이 있지만.. 이건 좀 히가시노 게이고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찾아봤더니 이 작품은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잡지에 연재되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라고 한다. 그가 1985년 '방과후'로 데뷔했으니, 이 작품이 발표된 1997년도가 초창기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러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서, 미 출간 작이 궁금한 독자들이라면 읽어도 좋을 것 같고, 기존 그의 작품을 떠올리며 기대감을 가지고 읽게 되면 책장은 너무 금방 넘어가고, 다 읽고 나서 조금 맥이 빠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녀가 있다면, 아이에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입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제목부터 살펴보자. 제목인 "비정근(非情勤)"은 어감에서 묻어나는 느낌대로 비정규직이라는 뜻의 한자가 아니다. 무정하고, 목석 따위처럼 감정이 없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니 이 제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 독설도 툭툭 내뱉는,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라서 별 생각 없이, 애정이나 책임감 등 감정 없이 일한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실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주인공 '나'가 겉보기처럼 그렇게 비정하고 냉혹한 스타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주인공 '나'는 미스터리 작가가 되는 게 꿈인, 현재는 초등학교에서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는 인물이다. 정교사가 출산이나 병가, 혹은 그 외의 이유로 휴직을 할 때 대체교사로 두 세달 정도 근무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몇 달만 있으면 되는 학교이니, 그는 교육에 대한 사명감이나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괜히 나서서 골치 아픈 일 떠맡지 말고, 조용하고 무사히 기간만 채우자. 가 모토인 좋게 보면 쿨 한, 나쁘게 보면 성의 없는 비정규직 교사인 것이다. 이 단편집은 총 6개의 장과 특별 장 2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마다 그가 다른 학교에 부임하고, 가는 곳마다 의문의 살인이나 사고 등이 발생하는 식이다.
이치몬지 초등학교 5학년 2반에선 여교사가 살인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학생들의 왕따 문제가 언급된다. <6×3> 니카이도 초등학교 5학년 3반에선 지갑도난사건이 벌어지고, <1/64> 미쓰바 초등학교 5학년3반에선 전임교사의 자살사건을 수사중인 형사의 협조요청을 받고, 아이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10×5+5+1>시키 초등학교 6학년2반에선 여학생의 자살미수가 있었고, 아이들만의 독특한 게임으로 인한 의외의 결과가 도출되고, <우라콘> 고린 초등학교 6학년 3반에선 곧 있을 운동회와 수학여행 준비에 한참인데, 갑자기 수학여행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편지가 도착한다. <무토타토(ムトタト)> 롯카쿠 초등학교 6학년3반에선 독극물 사건이 벌어진다. <신(神)의 물>
아래를 봐. 사람들이 우글우글하지? 학교 운동장에도 있고 길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 달리는 차 안에도 다 사람이 타고 있지. 너희들도 저 아래로 가면 저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런 작은 존재인 한 인간의 다리가 빠르거나 느리거나, 배에 흉터가 있거나 말거나, 세상 전체로 보자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그런 사소한 일 하나로 웃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항상 너희들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야. 야노의 다리가 느리다거나 나카야마의 배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 따위 다들 금세 잊어 버려. 그런데 혼자서 끙끙대며 고민하는 거,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것들을 생각하란 말이야. 어떤 일이건 도망치면 안 돼. 도망쳐서 해결되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귀찮은 일은 절대 사양하고 싶고, 퇴근 후 학교 정문을 나왔으면 거기서 자신의 일은 끝난 거라는 게 '나'의 철칙이다.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야 어차피 두 세달 뒤면 서로 볼 일 없는 학생, 선생님들이기 때문에 관여하기가 싫은 것이다. 지나치게 쿨 해서 인정머리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는 그러나 수상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미스터리작가 지망생답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언제나 사건에 관여한다. 교육문제나 아이들 문제에 전혀 관심은 없지만, 오로지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데에는 관심이 있으니까 말이다. 오죽하면 학생 중 한 명이 "선생님 의외로 불량 선생님이네요."라고 얘길 할까.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불량이 아니면 이런 일 계속 못 해" 라고 학생에게 대꾸한다. 사실 이렇게 아이들을 대하긴 하지만, 숨겨진 트릭을 간파해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는 아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말을 빌리자면 "비정근(非情勤)이라고 했지만 이 선생님은 그다지 비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약간 열혈남아죠. 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은 ‘세상에 나쁜 놈만 있는 게 아니니 기운 내.’라는 게 아닙니다. 사건을 통해 ‘이 세상에는 이렇게 더러운 놈들도 있다, 그러니 지지 않도록 명심해라.’라고 가르쳐요. " 라고. 주인공 '나'의 캐릭터가 이제 좀 감이 잡힐 것이다. 비정규직 교사라는, 학교에 소속된 관계자이면서도 얼마 뒤엔 나가야 하는 외부인인 애매한 위치를 통해, 적당히 몸을 사리면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현재를 보여주면서 캐릭터의 성격을 구축하는 것이다. 사실 출판사의 책 소개 내용 중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 비견할 만한 하드 보일드한 캐릭터의 교사가 나타났다.>라는 부분 때문에 꽤나 기대를 했지만, 뭐 그래도 나름 투덜거리면서 결국 할 건 다하는 귀여운 캐릭터이긴 하다. 애초에 대상이 초등학생이었던 터라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었을 테니 작품 자체가 아쉽다기 보다, 출판사의 홍보문구가 너무 핀트를 어긋난 거 아닌가 싶다. 그 홍보문구만 아니었어도, 책을 읽고 실망하는 독자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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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