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읽고 있는 책

지니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7.7.20
앉은 자리에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듯이 읽어 버리고 싶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작품도 있다. 나에게 하루키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 그리고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나도 모르게 늦추곤 했다.
지상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떤 존재에게 내밀한 연대감을 느끼게 하는 게 바로 문학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어떤 문장, 어떤 행간에서 그 시절의 내가 보인다. 극중 인물과 내가, 전혀 공통점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눈에 띄지 않는 보석 같은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한참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대다 '아 내가 지금 참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으로 자세를 바로 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 하루키의 이번 신작에서도 부디 그런 순간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기사 단장 죽이기>를 읽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 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러나 이치에 맞건 아니건,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발휘하는 것은 대개 결과뿐일 것이다. 결과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실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가려 내기란 쉽지 않다. 원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거야' 하고 남에게 보여주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론 원인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달걀을 깨뜨려야 오믈렛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장기튀김처럼 하나의 장기짝(원인)이 다시 옆에 있는 장기짝(원인)을 넘어뜨리고, 넘어진 장기짝(원인)이 다시 옆에 있는 장기짝(원인)을 넘어뜨린다. 그것이 연쇄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이 가장 먼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대개 흐릿해져 버리는 것이다.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거나. 혹은 딱히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그리하여 '어쨌든 많은 장기짝이 연달아 넘어졌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길을 걸을지 모른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어떤 인간이든 저 안쪽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잘 찾아내어, 혹시 표면이 뿌옇다면(뿌연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헝겊으로 말끔히 닦아준다. 그런 마음가짐이 으레 작품에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아끼고 아껴가면서 1권을 다 읽고, 이제 2권을 읽으려고 하는 중이다. 하루키 덕분에 오랜 만에 천천히 읽는 독서를 즐기는 중이다. 늘 시간에 쫓겨 이 책, 저 책 여러 가지를 한 꺼번에 읽어야 했는데 말이다.
하루키는 <1Q84>이후 7년 만의 장편소설인 이 작품을 쓰는 데 "1년 반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가급적이면 그 속도만큼 오랫 동안 시간을 들여가면서 읽고 싶은 작품이다. 물론 책 두 권을 그리 오래 읽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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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