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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8.18
알렉산더 웬트,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 구성주의(Social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1999, 사회평론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냉전 시기 국제정치학의 양대 이론은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였다. 현실주의자들은 무정부 상태의 세계관을 전제로, 무대의 행위자들은 민족, 종교, 이념이 아닌 '국가'라고 보았다. 현실주의가 설명하는 국제정치의 원동력은 국가의 물질적인 힘과 이익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는 무정부 상태"라는 가정을 비판하고 도덕, 이념, 국제법, 국제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1970~80년대에는 신현실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나타났다. 신자유주의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국가의 역할을 인정했다. 신현실주의는 무정부 상태라는 고전적 현실주의의 전제를 유지했지만, 국가의 행동은 이기적 본성이 아니라 국제체제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세계가 영구적 갈등과 전쟁에 시달리는 원인은 이 무정부적 구조 때문이었다.
구성주의 이론의 등장
현실주의는 영원히 지속할 것 같던 냉전이 갑자기 종식되면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구조(냉전과 양극체제)가 행위자(소련)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현실주의 교리와 달리 소련은 스스로 자신들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재평가하고 스스로 해체했다. 현실주의자들은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 공백을 설명하는데 도전한 이론이 바로 구성주의였다. 구성주의는 80년대 후반 니콜러스 오너프(Nicholas Onuf), 존 러기(John Ruggie), 피터 카첸슈타인(Peter Katzenstein) 등 일군의 정치학자들이 제기한 이론이었다. 이들은 국제정치가 행위자들(국가)의 물질적 힘이 아니라 관념, 규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물질적 힘과 이익에만 천착하는 현실주의는 '관념'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자유주의 역시 구성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관념, 규범,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지만, 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힘, 영향력과 국제 제도를 더 중시했다. 행위자들이 특정한 가치관과 규범이 우세한 구조(국제체제)에 종속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반면, 구성주의는 구조와 행위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어려운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관념적 구조들은 행위자와 서로를 구성하고 결정한다" 냉전 종식에 대한 설명으로 설득력을 얻은 구성주의는 현실주의, 자유주의와 함께 국제정치학의 3대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알렉산더 웬트와 그의 구성주의
오늘 소개할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 구성주의'(Social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1999)는 구성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저자인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알렉산더 웬트(Alexander Wendt, 1958~) 교수는 1992년 "Anarchy is what states make of it(무정부 상태는 국가들이 만들었다)"는 논문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제사회가 원래 무정부 상태인 것은 아니며, 이는 국가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산물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 웬트 교수는 1999년작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구성주의'에서 철학적 개념들을 인용해 기존의 국제정치이론들을 철저히 검토,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보충했다. 국제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006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정치학자' 1위로 선정된 웬트 교수는 지금도 구성주의 이론의 명실상부한 권위자이다.

저자 알렉산더 웬트(Alexander Wendt, 1958~)
국가의 정체성과 관념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신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국제정치의 주 행위자로 보고 있다. 국제정치에서 물질적인 힘, 권력과 이익의 중요성 역시 인정한다. 저자는 급진적인 구성주의자들과 달리 정체성, 규범, 제도, 가치과 같은 '관념'이 권력과 이익보다 중요하다거나 독립적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가 보유한 권력과 국가의 이익은 이기적 본성이나 무정부적 구조가 아닌 관념 덕분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국가 정체성과 국익도 역사적,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알렉산더 웬트 교수는 자신을 '온건한 구성주의자'로 규정하며 현실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반박과 동시에 적절한 보충을 시도한다.
홉스적, 로크적, 칸트적 무정부 상태
"국제사회의 무정부성"이라는 현실주의의 전제는 저자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다룬 부분이다. 그는 무정부상태를 홉스적, 로크적, 칸트적 무정부상태로 구분하여 그 유형별 구조와 문화적 특징을 세밀히 분석한다. 홉스적 무정부상태에서 국가들은 서로를 '적(enemy)'로 인식한다. 홉스적 세계의 국가들은 서로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영원히 경쟁하고 갈등한다. 국가의 중요한 지상과제는 생존이다. 케네스 월츠와 존 미어샤이머 같은 현실주의자들은 홉스적 무정부상태를 국제사회의 기본형태로 상정했다. 반면, 로크적 무정부상태에서 행위자들은 서로를 '경쟁자(rival)'로 인식한다. 국가들은 경쟁상대지만 적어도 상호 공존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로크적 문화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국제사회의 주된 상식으로 통했다. 칸트적 무정부상태는 더 나아가 국가들이 영구평화를 위해 친선(friendship) 관계 속에 상호협력한다고 본다. 웬트 교수는 일단 무정부 상태가 자연적이라는 전제에 반박하며 이 무정부성은 국가들이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그는 국제정치가 홉스적 -> 로크적 -> 칸트적 문화로 발전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로크적 문화가 한번 내면화되면, 그 문화가 홉스적 문화로 퇴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유사하게 칸트적 문화가 로크적인 문화로 퇴보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참정권의 역사적 궤적은 교훈적인 유추를 제공한다. 선거권이 부여된 후에 박탈된 예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한번 투표의 특권을 내면화하면 그들은, 역행의 비용을 높게 만들면서, 투표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울 것이라는 것"(p.437)
"만약 어떠한 구조적 변화가 있다면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것이다. 따라서 심지어 국제체제의 미래가 과거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더 나빠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할 이유는 있다"(p.438)
현실주의 vs 구성주의
결론적으로 저자는 세계정치가 영구적 갈등과 전쟁에 시달린다는 현실주의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는 관념과 문화가 국가 권력과 이익의 내용,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책을 저술했다. 구성주의 이론은 국제정치의 현상을 정해진 도식처럼 파악하는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위정자들이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유용한 지적 도구가 됐다. 냉전을 종식시킨 요인은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미국의 압도적 우위도,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의 연합도 아니었다. 웬트 교수는 소련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 가치, 규범을 재구성한 것이 요인이라고 본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는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개념적 재평가였다. 소련은 해소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던 갈등을 일방적으로, 그리고 거의 하룻밤 새 종식시킬 수 있었다.
구성주의에 대한 비판
그러나 구성주의는 이미 일어난 일들을 해석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타인/타국의 행동은 예측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익의 개념, 행위자들의 정체성이 변한다는 전제 때문에 일관성 있는 예측이 어려운 것이다. 만일 국가들끼리 서로 기만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구성주의가 설명할 수 있는가? 국가들이 서로 성향이나 의도를 확신할 수 있거나 우호적인 관계여도 문제는 남는다. 구성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확신과 신뢰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여느 동맹국, 우호국이라도 공격적 성향으로 돌아서고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상황은 배제할 수 없다. 결국 국가들은 타국의 국력이 변하는 추이를 지켜보며 자국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웬트의 구성주의는 역으로 현실주의를 뒷받침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어려운, 너무나 어려운
여기까지 이 리뷰를 읽으신 분들은 느끼겠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 학술서 중에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필자도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서너 번은 그냥 책을 덮고 포기하려 할 정도였다. 책의 첫 장부터 실재론, 존재론, 인식론, 인과론, 개체주의, 총체주의, 거시구조, 미시구조 같은 용어가 등장해 독자들이 머리를 쥐어짜게끔 한다. 문장과 문장 간 개연성이 없어, 전체 문단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원 내용도 난해하지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전달력을 떨어트린 경우도 많다. 아래 문장들을 보자. 이걸 보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이 설명상대성의 중요성은 왜, 어떻게, 무엇 간의 차이를 다룰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냉전사례가 보여주듯이 하나의 질문 부류 내에서도 동일한 현상에 대해 우리가 묻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에 따라 다른 설명이 주어질 수 있다"(p.133)
"일정한 부분을 문제화하지 않음으로써 잠정적으로 우리는 문제로 삼지 않은 부분을 '자연화'하거나 '물신화'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창출된 지식으로 그것(문제로 삼지 않는 부분)을 변화시키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p.134)
"권력분포에 근거한 설명의 중요성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국가 이익의 분포에 달려 있다. 만일 냉전과 같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문화구조 안에서처럼 이익과 문화가 외연적이고 영속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면, 능력분포의 변이들에 의존해 상당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p.165)
"왜냐하면 이 원리는 행위자들이 자아에 대한 타자들의 재현의 '거울' 속에서 타자들이 그들을 보거나 '평가하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반영으로서 그들 자신을 보게 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가 자아를 적인 것처럼 간주하면 반영된 평가의 원리에 의해 자아는 자신이 타자에게 적으로 간주된다는 신념을 타자에 대한 자신의 역할정체성에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모든 타자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며, 그러므로 힘과 종속의 관계가 그 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p.465)
이만하면 비전공자인 필자가 아니라 정치학과 국제정치 전공자들도 과연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전문 학술서라는 한계, 원문의 난이도를 감안해도 좀 더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문장 구조로 번역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볼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 구성주의>를 읽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구성주의에 관해 유일하게 번역되다시피 한 해외 학술서이며 동시에 구성주의를 집대성한 책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현실주의, 신현실주의의 특징과 의미까지 재정리할 수 있다. 알렉산더 웬트는 국가와 국제체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 정체성, 행동 양식, 이익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인류는 테러리즘과 극우 민족주의(nationalism)처럼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구성주의는 이러한 변화를 해석하고 대응책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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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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