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받아 쓰다

산티아고
- 작성일
- 2017.8.20
누구의 인정도 아닌
- 글쓴이
- 이무석 외 1명
위즈덤하우스
다행히 자가 검사에서는 심각한 인정중독은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4단계 중 2단계라고나 할까, 경미한 수준이지만 인정중독을 유의해야하는 수준. 그렇다, 나는 스스로 '인정중독이 아닐까' 걱정할 만큼 인정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 일을 할 때 특히 잘 드러난다. 누군가 칭찬해주면 신이 나서 열심히 하고, 혼쭐을 나면 어쩔 줄 몰라하며 그 다음 일까지 망친다. 돈, 명예, 권력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명예'를 택할 것이다. 이쯤이면 심각하진 않아도, 인정에 꽤나 목말라 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터.
인정중독 덕에(?) 어디 가서 못 났다는 소리는 잘 듣지 않지만, 솔직히 그리 행복하지 않다. 아주 잘 하는 경우가 아니면, 웬만해선 잘 칭찬을 하지 않는 게 사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이 드물다(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칭찬거리를 찾아내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 보자. "왜 굳이 칭찬을 받아야 하는가?" 아주 단순하고 어찌 보면 진부한 이 질문 앞에, 인정중독자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진다. 달리 할 말이 없다. 칭찬 받으면 기분이 좋다,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왜?'
이들에게는 '인정받는다'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 인생의 목표 자체가 인정받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이나 삶의 의미는 도리어 뒷전이다. (6)
<누구의 인정도 아닌>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인정중독에 빠진 사람들과 그들이 인정중독에 빠지는 이유, 그리고 해결책. 이렇게 세 가지가 책의 줄기를 이룬다. 정신분석의 렌즈를 통해 분석해서 그런지, 이유는 주로 '부모'를 꼽는다. 자기애가 강한(=부모로서 준비가 덜 된) 부모 때문에, 유년기의 상처 받은 기억이 인정중독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덧붙여서 사회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제기한다. 무한경쟁주의, 상명하복과 계급주의, 고통긍정주의 등 사회의 풍조 또한 일익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회적 압력은 위계문화다. (...) 두 번째 사회적 압력은 강박적 경쟁이다. (...) 세 번째 사회적 압력은 고통의 미화와 강요다. (33~36)
즉, 인정중독의 원인은 부모와 사회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원인의 범위 자체가 워낙 포괄적이다 보니, 이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 또한 조금씩 다르다. 인정중독의 형태가 다르다는 말이다. 책에서 묘사하는 인정중독의 성격은 네 가지로, '분리불안'과 '완벽주의', '자기희생', 그리고 '분노 억제'가 그것이다. 아마 다들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성격적 특성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이것 또한 인정중독의 심리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완벽주의 심리가 좀 있다고 생각했다. 실수하거나 조금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진다. 때로는 그게 일주일 동안 가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책에서 나오는 완벽주의 성격의 숨겨진 감정, '수치심'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 병적인 수치심은 나 자신의 한계가 드러났을 때 나의 전체가 실패했다는 극심한 무가치감을 느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의 존재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긴다. 병적인 수치심은 합리적인 대처 능력을 무력화해버리고, 지독한 무기력감과 무능감에 빠지게 한다. (101)
그렇다면 이러한 인정중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책에서는 총 네 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구분-과거와 현재의 나를 구분 / 이해-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나에게 준 영향을 이해 / 변화-병적 관계를 수정하기 위한 노력 / 애도-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음을 인식하고 슬퍼하는 과정. 제일 재미있는 개념은 바로 '애도'인데, 저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인정중독을 극복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란다.
자신의 삶을 재조명하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에 결핍되었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받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을 다시 받을 수도 없다. 의식적으로는 그것을 잘 알지만, 무의식에서는 아직도 완벽한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갈망과 소망이 계속된다. (204)
'내가 그렸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구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이러한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받아들이고 무의식적 소망을 서서히 포기해가는 과정, 이것이 애도의 단계다. 애도의 단계를 거치면서, 슬프지만 이제는 내가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205)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다. 저자는 애도까지의 과정을 거치며 인정중독을 서서히 치료해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애도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실낙원의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언제까지나 낙원에 대한 애도를 그칠 수 없다는 것. 완벽한 사랑을 꿈꾸지만 (라캉에 의하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이룰 수 없는 환상이다. 인생을 마음대로 하길 원하지만, 운명은 늘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 그밖에 말할 게 더 무엇이 있으랴. 돈에 대한 집착, 권력과 명예에 대한 병적인 탐심. 인식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절망적인 인간의 절망적인 운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리어 이러한 애도의 과정이 짙어질수록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이 과정을 거친 뒤 인정중독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하듯이. 그러고 나면 진정한 자유가 찾아오지 않을까?
인정중독에서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내가 나를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나는 내 값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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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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