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과 <희생양>(1982)이라는 그의 양대 저서가 그 개념들이 발아한 태반이었다.
‘욕망의 삼각형’ 도식으로 설명되는 지라르의 욕망 이론은, 욕망이 자발적·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간접적인 성격임을 강조한다. 욕망의 주체는 매개자 또는 모델을 좇아서 대상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방적 욕망이 급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욕망의 대상을 둘러싼 갈등과 그에 따른 폭력이 나타난다. 갈등과 폭력이 격화되어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기로 치달을 때 공동체는 그 폭력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할 때 선택된 폭력의 대상이 바로 희생양이다. 지라르의 이론에서 대표적인 희생양은 예수 그리스도다.
지라르의 이론은 문학은 물론 인문학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열렬한 찬사와 그에 못지않은 비판을 낳았다. 그를 가리켜 ‘인문학계의 다윈’으로까지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한쪽에 있는가 하면, 그의 이론이 입증 불가능한 허구적 가설일 뿐이라거나 그의 이론의 귀결이 결국 보수적 기독교도의 신앙고백이라며 타매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새롭게 번역돼 나온 <문화의 기원>은 지라르가 케임브리지대학의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피에라파올로 안토넬로와 리우데자네이루대학 비교문학 교수 주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샤와 나눈 대담집이다.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만큼 지라르의 사상과 생각을 평이하면서도 내밀하게 접할 수 있다. 대담의 거의 모든 장 머리에 지라르는 찰스 다윈의 <자서전>에서 뽑은 구절들을 배치했는데, 이는 다윈의 주저 <종의 기원>을 떠오르게 하는 책의 제목과 함께 ‘인문학계의 다윈’이라는 평가에 대한 그의 은근한 애착을 보여주는 듯하다.
대담의 앞부분에서 지라르는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회고한 다음 모방 메커니즘과 기독교, 그리고 테러 위기에 노출된 현대 사회에 대한 견해와 같은 핵심 주제로 넘어간다.
그는 우선 흔히 혼동하기 쉬운 본능과 욕망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음식물과 섹스를 향한 본능은 아직 욕망이 아니며, “어떤 모델에 대한 모방에 따라” 비로소 욕망이 된다는 것. 그는 나아가 “모방적 욕망만이 자유로우며 또 진정으로 인간적”이라며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한다”고 단언한다. 지라르의 이론체계에서 모방이 부정적·소극적인 개념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방이 없다면 교육도 없고, 문화 전수도 없고, 평화로운 관계도 없”다.
다음으로, 그는 신화와 기독교를 구분한다. 기독교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신화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굳건한 믿음이다.
그런데 신화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신화가 가해자의 편인 데 반해 기독교는 희생양의 편이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를 처음으로 폭로한, 종교 이상의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에 휩싸인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널리 알립니다.” 그는 “(제가)기독교인이 된 것은 제 연구결과가 이렇게 인도했기 때문”이라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광신적인 반기독교주의나 반종교적인 몽매주의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보기에는 ‘이론에서 신앙으로의 투항’으로 보일 법한 대목이다.
테러가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에 발생한다는 통찰은 일견 참신해 보인다. “테러의 원인은 그(=‘차이’)보다는 오히려 서로 하나로 수렴되면서 같은 것이 되고자 하는 지나친 욕망에 있”다는 것이 지라르의 견해다. 그러나 그가 세계화를 가리켜 “원래 부를 생산하여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경제 발전”이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테러의 원인을 다만 뒤쳐진 경쟁자들의 비뚤어진 모방 욕망의 발현으로만 이해하는 데에서는 맹목적인 서구 및 기독교 우월주의의 냄새조차 맡아진다. <문화의 기원>은 지라르 사상의 기원과 전개, 특장과 한계를 두루 보여주는 책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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