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쓸데없는 상상이겠지만, 마냥 쓸데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웃자고 쓴 글이지만 또 마냥 웃지만은 못할 것이다. 대부분 코웃음을 치겠지만 그래도 한두 명은 무릎을 탁 치게 되기를 바라면서, 지금부터 한 배우가 영화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기구한 인생역정에 대해 써보려 한다.그는 성우였다. 그의 목소리를 빌려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한 수많은 외국 캐릭터 중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슈렉.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는 헤어스타일부터 슈렉을 많이 닮았다.
‘녹색 성장’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보여준 헐크와 함께 ‘초록은 동색’의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산 녹색 괴물. 아이들은 이 웃기는 괴물을 몹시 사랑했다. 내 조카들도 삼촌보다 슈렉을 더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생긴 것과 달리 친근하고 부드러운 괴물의 목소리가 나름 큰 역할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그는 모든 어린이의 친구가 되었다.
성우였던 그가 배우로 변신했다. 연기를 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배역을 연기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화 <도가니>. 인화학교 교장과 행정실장, 인면수심의 그 쌍둥이 형제를 그가 혼자서 연기했다. 화장실에 숨은 여자아이를 무심한 듯 내려다보며 흘린 옅은 미소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한때 모든 아이들의 친구였던 그가, 이젠 때려 죽여도 시원찮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그는…내시가 되어 나타났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왕을 보필하는 최측근, 조 내관 역이 그의 몫이다. 하루는 왕께서 물으시기를, “그러니까… 그게 정말 없는 거요?” 그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는 그 사람. 자, 이 대목에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우리 시대가 낳은 어떤 부조리한 괴물의 드라마틱한 몰락의 순간이 그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 하나에 다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믿고 따르던 모든 어린이의 친구였으면서 그 믿음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배반했던 괴물. 그러고도 충분히 죗값을 치르지 않은 아동 성폭행범이 다음 영화에 내시로 출연한 게 내 눈엔 그냥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근대 사법제도가 청산한 신체형을 부활시키는 게 올바른 문명인의 자세가 아니라면, 그것이 가능했던 시대로 돌아가는 건 어떠한가. ‘물리적 거세’를 기어이 실행해 보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도가니>의 교장을 조선시대로 데려가 거세하는 영화를 보며 그래도 조금은 채워지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문제의 법안을 발의한 새누리당 의원님께서 라디오에 출연해 ‘물리적 거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신다. “성기가 아니고 고환만 제거하는 수술입니다. 옛날에 내시나 그런 걸 만들 때 시행이 된 것입니다.”
‘옛날에 내시나 그런 걸 만들 때’ 시행했던 형벌을 받기 위해 스스로 옛날로 돌아가 정말 내시나 뭐 그런 게 되어주신 인화학교 교장선생님. 올해 말 개봉하게 될 새 영화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그분’이다. 원작 웹툰 기준으로는 26년 전, 지금 기준으로는 32년 전. 1980년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총칼로 짓밟고 대통령이 되신 그분. 또 한번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는 헤어스타일부터 ‘그분’을 많이 닮았다.
김세윤 방송작가 |
나는 벌써부터 그의 다다음 영화가 몹시 궁금하다. 아동 성폭행범을 연기한 그는 다음 출연작에서 궁형을 선고받았다. 많은 시민을 때리고 죽인 ‘그분’을 연기한 뒤 다음 출연작에선 과연 어떤 형벌을 받을 것인가. 고작 ‘성기가 아니고 고환만 제거하는 수술’ 따위로는 영 성에 차지 않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텐데?
현실에서 그들이 충분히 치르지 못한 ‘죗값’을 대신 치르시며 본의 아니게(?) 속죄의 모범을 보이고 계시는 배우 장광. 부디 이 웃자고 쓴 허튼 ‘장광’설을 정말 웃으며 읽어주셨길. 저, 정말 아저씨 팬이걸랑요!
김세윤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