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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에 숨겨진 진실 자유

2012/05/1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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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 오귀스트 로댕 작(1889). 위 사진은 미국 워싱턴 허시흔 미술관 조각정원 소장본.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본이 된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조각상에 관한 일화에는 오류가 있으며 조각상이 세워지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칼레의 시민과 관련된 일화


1346년 에드워드 3세(1312~1377)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필리프 6세(1293~1350)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크레시에서 맞붙었고 장궁의 힘을 빌린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을 대파했으며 프랑스는 여기서 국왕 필리프 6세가 중상을 입고 필리프 6세의 아들 장의 장인인 보헤미아의 맹인왕 얀(1296~1346)이 전사하는 등 11명의 왕자, 1,200명의 기사들을 포함해 10,000~30,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346년 벌어진 크레시 전투.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여담으로 이 전투는 '궁병은 무장한 기사에게 별반 피해를 입힐 수 없다'라는 통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또한 전투 도중에 많은 부상자와 포로들이 즉결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많은 후대의 사학자들은 이 전투를 '기사도 시대의 종말'로 보기도 한다.


 


크레시 전투의 승리로 북프랑스에서의 우위를 점한 잉글랜드군은 진격을 계속해 1347년 9월 칼레 시를 포위했다. 칼레 시민들은 11개월 동안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했지만, 겨울을 지내면서 심한 기근에 시달렸고 결국 항복했다. 승리를 거둔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 모두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렇지만 칼레 시에는 여러 번에 걸쳐 사절단을 보내 사과하며 협상을 이끌어냈고 에드워드 3세는 그 말을 취소했다. 대신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허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모든 시민들이 기뻐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고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잉글랜드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왔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에드워드 3세의 왕비 에노의 필리파(1314~1369)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났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게 칼레의 시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에드워드 3세에게 시민대표들을 살려줄 것을 설득하는 에노의 필리파. 일화에서 에노의 필리파는 칼레 시민 대표 6명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진실


안타깝게도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모두 약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화를 숭고한 희생으로 윤색하고 미화한 것은 14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1337~1405)이다. 그는 1322~1400년 프랑스에서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5권의 연대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그의 연대기가 사건 발생일, 발생지 등의 정보가 부정확하며, 애국적인 성향에 따라 많은 부분 왜곡이 있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칼레의 항복 일화도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프루아사르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된 것이다. 이처럼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다.


 



장 프루아사르. 그의 연대기는 중요한 사료임에는 틀림없으나 부정확하고 왜곡 및 편파적인 서술로 인해 오늘날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


그렇다면 칼레 항복에 관한 수많은 기록들 가운데 왜 프루아사르의 기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19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는 보·불 전쟁(1870~1871)에서 프로이센에게 패했고 황제 나폴레옹 3세(1808~1873)가 1870년 9월 2일 세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사로잡혔다. 1870년 9월 4일 파리에서 권력을 장악한 국민방위군 정부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의 위신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 황제 폐위와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의 저항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9월 19일부터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새 정부의 쥘 파브르(1809~1880) 외무장관은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1815~1898)와 협상을 벌였으나 프로이센이 알자스와 로렌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임시정부 수반이던 레옹 강베타(1838~1882)는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뒤 지방에서 새로운 프랑스 군대를 조직했지만 이들도 프로이센군을 무찌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포위된 파리는 동물원의 짐승까지 잡아먹는 비참한 현실을 맞이해야했고 그 와중인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새로운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결국 파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월 28일 항복했으며 같은 날 쥘 파브르(1809~1880)는 비스마르크와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871년 5월 10일 공식적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중에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공화국 정부가 전복되고 급진주의자들은 파리 코뮌이라는 단명한 정부를 구성했다. 파리 코뮌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이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이 실행에 옮겨졌다. 독일은 끝내 메스를 포함한 알자스 전체와 로렌의 대부분을 합병해 30년전쟁과 루이 14세의 침공으로 잃은 땅들을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배상금이 완납될 때까지 프랑스 북부 주의 독일군 점령경비를 부담해야 했다.


 



포로의 신분으로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와 만나는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의 패배는 자존감이 강했던 프랑스인들에게 엄청난 절망감을 가져다주었다.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은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기억하던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게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프랑스인들에게 엄청난 굴욕감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발호했고 애국심이 강조되기 시작했으며, 역사적으로 영웅적인 행동을 한 인물을 찾아 민족적인 영웅으로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칼레 시 또한 이러한 움직임에서 예외가 아니었고 장 푸르아사르의 연대기에 있는 용감한 시민 6명에 관한 기록에 의거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위대한 시민들의 조각상을 세우기 위해서 로댕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오귀스트 로댕(1840~1917). 그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렇지만 로댕은 이들을 묘사하면서 영웅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두어 고뇌에 찬 얼굴과 몸체에 비해 크게 묘사된 손과 발 등을 통해 외세에 대항해 시민들을 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대신에 인간의 두려운 감정을 표현해냈다. 로댕은 작품의 표현뿐 아니라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조각의 좌대를 낮게하여 일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끌어 내려 영웅들을 관람객이 영웅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우러러 보는 인물 대신에 수평적인 관계에서 작품의 주위를 돌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연히 칼레 시민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영웅의 모습 대신 약한 인간의 모습을 한 자신들의 영웅에 실망하고 분노했고 주문한 조각상을 원래 계획했던 칼레시 광장에 설치하는 것에 반대했다. 결국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채 조각상은 바닷가 한적한 곳에 세워진 채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칼레 시민들은 로댕의 사실주의적·상징주의적 제작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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