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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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여부
- 작성일
- 2009.5.14
헤르만 헤세의 기독성
홍 순 길 (목원대)
I. 서 론
헤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와 종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 헤세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은 역시 그의 종교적인 면이다. 특히 그의 기독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고, 그의 기독성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그를 잘못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헤세의 전 생애와 작품을 종교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며 또한 필수적인 작업이다. 종교의 관점을 통해서 헤세의 전 삶과 작품을 해석해 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헤세는 그의 작품들을 가리켜 " 나의 기독교적인 것 속에 시작되는 영혼사"1) 라고 했다.
헤세뿐만 아니라 유럽의 작가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그 작가와 기독교와의 관계 및 그가 접하게 된 다른 종교나 사상의 수용 등을 파악하는 일이다.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유럽 사람들의 종교적 환경은 그들의 삶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고 일률적이다. 유럽 국가들의 일반적인 역사뿐만 아니라 독일의 역사가 원시 게르만족의 토속종교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종교 수용의 역사이며, 이 수용 과정에서 게르만족의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독일은 로마 카톨릭의 영향을 받아 영토뿐만 아니라 고유의 생활방식과 언어, 문화를 잃었다. 비록 용맹스러운 게르만족이 로마군과 싸워 로마제국까지 얻었지만, 그들은 로마인들의 종교의 포로가 되었으며 기독교 속으로 녹아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로마제국은 그들의 안방을 내주었지만 게르만족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유럽의 정신문화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유럽인은 기독교인으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죽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언어, 풍습, 예술, 문학 속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특히 헤세는 기독교의 종교적 혈통 속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친척들이 목사였으며, 그들은 목사 가운데서도 가장 독실한 경건주의 자들이었다. 헤세는 어려서부터 이런 기독교 밑에서 때론 안정을 찾았고 때론 도주하고 싶었다. 그런가하면 그는 싫증난 기독교를 보상받고 싶은 심정으로 다른 종교의 문도 끊임없이 기웃거렸다. 헤세가 종교에 가진 관심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지하고 또 지속적이다. 이런 여러 종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헤세의 종교적 자산은 풍요롭고 다양하다.
그런데 대부분 헤세의 전기작가들은 헤세가 어떻게 종교적인 문제와 씨름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종교문제를 다룸이 없이 어떻게 헤세의 진면목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작품의 진수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헤세의 생의 분수령이 된 것이 마울브론 신학교로부터의 탈출이고 부모와 기독교로부터의 반항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런 문제는 따지고 보면 헤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지금까지 헤세와 종교를 연관지어 다룬 글들은 주로 헤세의 종교 편력을 일반적으로 서술하거나, 헤세와 특정한 종교, 그러니까 기독교, 불교, 힌두교 또는 도 사상과 연관지어 다루거나 아니면 그에게 끼친 신비주의 영향 등을 다룬 것이었다. 그의 기독성을 자세히 분석한 글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헤세 연구 붐의 쇠퇴와 더불어 헤세와 종교문제를 다룬 글도 현격히 줄었다. 헤세를 오로지 기독교에 등돌린 동양종교 예찬자로 보는 시각도 있고 또 다른 시각은 그를 철두철미한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인데 이런 결론은 그의 종교관을 단편적이고 일방적으로 본 결과다. 헤세의 종교관, 특히 그의 기독교관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본 논문에서는 그의 종교관을 알아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단계로서 그의 종교편력과 종교가 그의 삶과 작품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뤄질 것이다. 또한 그의 종교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말이나 작품을 통해 헤세의 기독성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헤세의 기독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이며 그의 기독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오해의 관점은 어떤 것인가를 따져볼 것이다.
헤세가 접한 여러 종교 가운데 기독교가 그와 가장 가까운 종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도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이 논문의 주안점은 바로 여기에 두어졌고 과연 그가 기독교적인가? 라는 질문을 새롭게 그리고 진지하게 던지고, 이에 대한 결론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논문은 그가 다른 종교를 가졌다던가 아니면 범종교관을 가졌다던가하는 결론을 염두에 둔 논문은 아니다.
이 논문만으로는 헤세의 기독성에 대해 어떤 명확한 결론을 내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이 논문에서 제기하는 일반적 고찰 이외에 보다 더 구체적인 고찰, 예를 들면 헤세가 "신 Gott"를 어떤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느냐? 하는 부분에 대한 계속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려고 한다. 이 글은 헤세가 기독교를 믿고, 그가 기독교적이라는 지금까지의 견해, 특히, 헤세가 만년에 기독교로 돌아왔다는 견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다.
II. 본 론
II. 1. 생애에서의 종교
헤세는 모태종교를 갖고 태어났다. 기독교는 그의 가계의 혈통이었다. 경건주의적 혈통이 200년 이상 그의 가계 속에서 이어와 어린 헤세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목사의 아들과 손자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그가 받은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를 일회적이고 경직된, 내 삶 속의 결정적인 형태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지만 거의 사라진 약하고 덧없는 형태로 알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를 경건적 색채를 띤 개신교로 알았고 그 체험은 깊고 강했다. 왜냐하면 나의 선조와 양친들은 완전히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몸바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봉사에 전념했다. 인간의 삶을 신이 내려준 삶으로 여기고 그 삶을 이기적인 충동이 아니라 신에 대한 봉사와 희생으로 살려고 하는 것, 이 유년 시절의 가장 큰 체험과 유산이 나의 삶에 강하게 영향을 주었다.2)
헤세는 또 「전쟁과 평화 Krieg und Frieden」에서도 그의 삶 동안 그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 세 가지 영향 가운데 "양친 집에서의 기독교적이고 완전히 비국가주의적인 정신"을 첫 번째로 꼽고 있다.3)
이렇게 그의 혈통과 가정에서 받은 영향은 헤세의 생애를 통해서 깊숙이 미쳐서 1930년의 한 편지에서는 "나는 종교적인 충동을 나의 삶과 창작활동의 결정적인 특징으로 여기고 있다"고까지 고백하고 있다.4)
헤세의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 Marie Gundert와 오랫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지낸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르트 Hermann Gundert 모두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친가 쪽으로 헤세의 아버지 요한네스 헤세 Johanes Hesse와 할아버지 칼 헤르만 헤세 Carl Herman Hesse 모두 독실한 신앙의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다.5) 특히 헤세의 어머니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남편 찰스 아이젠버그 Charles Isenberg 역시 선교사로서 헤르만 군데르트의 선교사업을 돕던 사람이었다. 헤세의 친아버지인 두 번째 남편 역시 군데르트의 신학관련 출판업을 돕던 사람이었으며 이들 두 사람들은 모두 선교사였으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헤세는 그래서 그의 가족을 "국제적인 선교인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다.6) 헤세의 양가 쪽 선친들은 이렇듯 모두 신앙의 한 가운데 있었으며, 기독교적 헌신과 봉사가 그들 삶의 전부였다.7)
헤세의 혈통은 친가 및 외가를 통틀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으며 신앙의 끈으로 이어진 경건주의 자들의 신앙공동체였다.
헤세는 어린 시절을 부모의 선교활동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주거의 불안정 상태 속에 보냈다. 그가 4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바젤 선교학교의 교사로 가게 되어 그는 스위스로 거처와 국적을 옮겼고 5년 후에는 집안이 다시 칼프로 돌아오고 그가 14세 되던 해에는 마울브론 신학교 입학을 위한 슈바벤의 국가고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기 위해 다시 독일 국적을 가졌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선교사업과 자신의 신학교 입학을 위해 고향과 국적을 바꾸었으며 정신적, 정서적 불안을 겪은 셈이다.
헤세의 어린 시절은 그의 뜻과는 달리 교회, 주일학교, 찬송과 예배 등으로 가득 채워졌고, 그는 때론 그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때론 도피욕구와 내적 저항을 느꼈다. 오직 하나의 세계, 오직 하나의 신앙, 오직 하나의 세계관이 헤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고집스러운 그는 처음에는 맹목적인 복종을 보이다가, 후일에는 비기독교적 양상을 보였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밝고, 경건한 일요일의 성스러운 세계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8) 이런 무거운 체험이 그를 보통 기독교인들의 길로부터 멀게 만들었다. 헤세의 부모는 지독한 경건주의 자들이었으며 금욕주의자들이었다. 이런 가정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더 명암이 짙은 반대 세계로 향하게 했고, 니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헤세도 "신은 죽었다"9)고 외치게까지 되었다.
그가 경건주의 부모를 갖지 않고 마울브론 신학교를 가지만 않았어도 그는 평범한 기독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하게 만들었으며, 유일한 기독 신을 믿지 않게 만들었으며, 종교 없이도 잘 지낼 수 있게 만들었는가?
물론 어려서의 성서 교육과 신앙의 목소리가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다. 그는 고답적이고 숨막히는 교회 안에서도 아름다운 추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헤세가 후일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그의 생애동안 늘 종교에 관심을 갖게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의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성서 이야기를 듣고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 밖에도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나의 환상을 위한 세계와 가교가 흘러 넘친다. 나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독자와 이야기꾼과 수다쟁이에 대해 들었지만 나의 어머니에 비하면 그들은 볼품없고 무미건조하다. 오, 어머니의 황홀하고 밝고 빛나는 예수 이야기, 그대 베들레헴과 그대 회당의 소년, 그대 엠마우스로 향하던 발걸음! 어린아이의 삶의 과도하고 풍부한 세계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의 모습보다 더 달콤하고 성스러운 모습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무릎에 놀라운 눈빛을 한 금발의 소년이 고개를 묻는, 그런 어머니들은 어디에서 이런 힘이 넘치고 아주 경쾌한 재주를, 화가들 같이 지칠 줄 모르는 입술의 요술을 갖게 되었을까?10)
헤세가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그는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었다. 학업뿐만 아니라 친구와 부모와의 관계도 모두 좋았다. 물론 주정부 시험이라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 있고 활기차게 크나 큰 운명과 마주섰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같은 어학에 특히 뛰어났지만 종교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는 1890년 양친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것은 종교작문"11) 이라고까지 했다. 이 때만 해도 헤세 자신이나 부모 어느 누구도 종교가 헤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요소가 될 줄 몰랐다.
헤세의 마울브론 Maulbronn 신학교 입학은 그야말로 헤세의 전 생애와 존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12) 이런 일로 그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켰고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선조의 대열에 낀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기대도 갖게 만들었다. 이 곳은 그로 하여금 작가가 되도록 이끈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그가 진정한 시인으로 여겼던 횔덜린이 나온 곳이며, 낭만주의 작가 뫼리케도 나온 학교였다.
헤세는 이 기숙학교에서 적응할 수 없었으며 결국 6 개월도 못 되어 이 곳을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경건하지만 엄격하고 숨막히는 수도원 분위기를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학교와 신학과 전통과 권위라는 거대한 힘에 대한 고발자나 비판자의 역을 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13)
헤세가 경건주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헤세는 성공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14) 마울브론 신학교 탈출은 부모와의 종교적 갈등의 표출이며 오직 유일한 종교로서 기독교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고 비기독교적인 이 시기는 헤세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색깔을 지닌 동양종교예찬자로서의 시작을 뜻한다.
헤세가 부모 특히 아버지와 갈등을 빚은 것은15)교육문제와 신앙문제인데16),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그는 "작가 아니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17)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그런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건과 신앙의 잣대로 아들을 재고 훈육하려 했으며, 문학이나 예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헤세의 양친은18) 결국 아들을 포기하는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헤세 자신도 기독교 경건주의의 가정환경 속에서는 개인의 기호나 재능이나 천부적 소질이 권장 받지 못하며 "인간의 의지는 원래 악해서, 인간이 신의 사랑과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행복해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의지가 우선적으로 깨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경건주의적 기독교적 원칙"19)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경건주의 가정교육에서는 수 백 년 동안 「창세기」 8 장 21 절에 나오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 글을 쓰고 어떤 목적을 갖는 것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한다 Das Dichten und Trachten des menschlichen Herzens ist böse von Jugend auf"는 구절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경건주의의 화신인 헤세의 부모들이 고집스럽게 이를 금하였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은 뻔한 일이다.
교육과 신앙에 대한 헤세의 저항은 고집으로 나타났고, 그의 문학이 고집문학이 된 것도 이런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20)
헤세가 고집이 있어 부모에 저항했는지 또는 부모의 종교적 억압으로 인해서 고집이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헤세를 유능하고 쓸모 있고 신앙심이 있는 - 이는 헤세의 부모가 그린 독단과 독선의 환영이지만 - 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헤세 자신도 그의 삶에 있어서 실존의 위기를 겪었다. 이 때는 헤세의 전 생애에 있어서 제일 괴롭고 위태로운 시기였으며 허무주의자로 또 염세주의자의 길을 가게될 뻔한 시기였다. 그는 부모도 친구도 신도 모두 부정하고 불안과 초조에 떨며, 급기야는 자살하고 싶은 광기를 느꼈다. 풍전등화 같은 헤세의 운명을 에워싸고 숨가쁘게 점철된 몇 년은 그의 양친과 헌신적인 후원자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폐인으로 만들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가 수도원을 몰래 빠져 나와 황량한 들판을 헤맸듯이, 그는 신학자인 크리스토프 불름하르트 Christoph Blumhardt 집과 슈테텐 요양소와 칸슈타트 고등학교와 에스링엔 서점을 의미 없이 거쳐갔다.
헤세는 돌아온 탕아처럼21)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아가 되었다. 부모의 실망과 염려,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지만, 그는 도시로부터 시골 고향으로 돌아 왔고, 학교와 신앙의 채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자유인이 되었다. 그는 때론 슈바르츠발트 Schwarzwald 숲 속을 거닐며, 때론 나골트Nagold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고향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셨고 흙 냄새를 흠뻑 들이 마셨다. 그는 외부의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이제 오로지 그 자신의 문제, 그 자신의 내면 속에 둥지를 틀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22)
칼프에서의 탑시계 공장의 직공과 그 후 튀빙엔 서점원의 견습공 시절은 헤세가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재충전의 시기다. 단순한 작업 - 육체적으로 힘들고, 전혀 그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 은 그를 현실을 이겨 나갈 수 있는 인간으로 또 현실적인 인간을 만들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독립되고 개성 있는 개체로 만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그가 꿈꿨던 작가가 되려는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이제 부모의 간섭을 떠나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독서하고 글을 쓰는 일에 몰수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책을 읽던, 어떤 글을 쓰던 그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았다.23) 헤세는 원래 고집스럽고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이 때부터 진정한 그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절에 그는 "세계문학의 절반"을 섭렵했고 모든 분야에 걸친 독서를 통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생긴 지식의 공백을 부지런히 메꾸었다.
이렇게 해서 헤세는 불안하고 위험한 청소년기를 무사히 넘기고, 스스로 구도자의 길을 갔으며 그 첫 열매가 『페터 카멘친트』였다. 몇 번의 습작 후에 쓰여진 이 작품이 대 성공을 거둠에 따라 그는 직업작가가 될 수가 있었다. 그 자신의 집과 가정과 직업과 미래를 갖게 되었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양친과의 관계, 양육과 종교적 영향은, 위성이 추진 로케트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목적지를 향하듯, 완전히 끝나고, 그는 그의 삶과 신앙을 먹고살게 되었다.
그 후 헤세의 신앙체험에 있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가 눈을 동양으로 돌려 인도나 중국의 사상과 종교에 심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 당시 유럽과 유럽인들이 갖게 된 일반적 현상인데, 특히 독일은 탐욕스런 세계화의 야망을 채우려고 뒤늦게 외국, 특히 아프리카와 동양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24) 그래서 자연히 인도나 중국의 사상과 종교가 유럽사회에 받아 들여 졌다. 헤세는, 외할아버지나 인도학자인 사촌 빌헬름 군데르트 Wilhelm Gundert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스로 인도 여행길에 올랐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를 직접 체험하기에 이른다. 헤세의 이런 동양정신 탐닉을 그 스스로는 "유럽도주 Europaflucht"25) 라고 부르고 있으며 몰락하는 서양을 동양을 통해 구원하려는 생각을 갖곤 했다.
헤세의 인도여행과 제1차세계대전 후에 쓰여진 헤세의 작품들은 한편으론 유럽 비판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예찬적인 글들이 대부분이며 『싯달타 Siddhartha』나 『유리알 유희』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쿠르티우스Curtius는 헤세의 『싯달타』를 "양친 집의 경건주의에 대한 헤세의 항거의 한 전조가 인도적 장면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26) 이 때의 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유럽적이기보다는 동양적이고,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불교나 도교나 노장사상에 가깝다.
이렇게 해서 헤세의 종교는 한편으로는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나 도교의 경계가 없어진, 종합적인 것이 되었으며 어느 특정한 종교를 애호한다기보다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지양하여 조화의 종교의 경지에 이른다.
II. 2. 헤세의 기독성
헤세가 과연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지, 또 적어도 그가 기독교 신을 믿는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만 달리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난처한 문제다. 헤세의 기독성은 그 성격과 방향과 범위를 규정하기가 어려우며, 더 나아가 그가 과연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1896 년경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하나의 신을 찾지 못했다"27)고 부모에게 고백하고 있으며, 튀빙엔 서점원 시절에는 열심히 신학 토론클럽에 들어가 열띤 신학논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임종할 때까지 매년 한번도 빠짐 없이 바흐의 마태 및 요한 수난곡을 즐겨 들으며 그 밖의 종교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기독성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해서는 헤세 자신이 종교에 대해 언급한 내용 가운데 ,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종교성 여부에 관한 일반적 입장 표명에 해당하는 말 즉, "나는 결코 종교 없이 살지 않았고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28)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헤세가 말하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기독교인가? 또는 불교 내지 그 밖의 다른 종교인가? 아니면 개개의 많은 종교를 통 털어 하나의 종교로 보는 그런 종교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또 한가지 의문점은 그가 말하는 종교란 어떤 성격의 종교를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것, 명상을 하는 것, 기도를 하는 것, 찬송가를 부르는 것, 설교를 듣는 것, 집회나 집회소에 가는 것, 종교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여러 종교 행위가 있는 데 그가 말하는 종교행위는 위에 열거한 어떠한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이런 모든 의문점이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헤세 개인 자체는 철두철미하게 종교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이래로 어떤 외적인 종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늘 종교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은 관심과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이 『나의 신앙』이라는 구체적인 제목 하에 쓰여진 그의 신앙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헤세는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며 그의 삶은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는 "교회 없이도 나의 생애동안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29)고 신비의 장막을 치고 있다. 원문에는 교회가 "Kirche"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기독교의 교회를 뜻하는 말인지 아니면 모든 다른 종교의 예배를 보는 곳을 뜻하는지 애매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독교 교회로 보고 논리를 전개하려고 한다.
헤세를 기독교 신자라고 가정한다면 과연 그가 얼마만큼 기독교에 가깝게 서 있는가를 다져 봄직하다. 그는 1935 년의 한 독자에게 "나는 일평생 나에게 올지도 모를 종교를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짜배기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왔지만, 거기에서 제시된 신과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30)라고 그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과 "신앙"은 부모가 믿는 신과, 부모가 가졌던 신앙으로써 다름 아닌 기독교 유일신이며 기독교 신앙이다.
그러면 왜 헤세는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거부감을 느껴온 부모나 주위의 지나친 경건주의적, 청교도적 신앙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신과 같이 비유되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반항이 후일 유일신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다. 헤세는 자전적 소설 『어린 영혼』에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있는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어린아이에게 전수된 신은 여호와 신인데, 이 신은 강요하는 자며, 심판하는 자며 정신이다. 그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닌다. 거대하고 보이지 않게 죄의식에 차 있고, 죄책감을 가져야만 하는 소년에게 사방의 벽 뒤에서 정신이, 아버지가, 재판관이 숨어 위협하고 있다 31)
특히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의 헤세와 아버지와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가 이 작품의 다른 곳에서는 "저는 하느님 같은 당신에게 침을 뱉고 싶어요"32)라고 말했겠는가?
헤세는 어린 시절을 늘 신앙의 큰 수레 밑에서 신음하며 보내왔다. 헤세의 부모가 애정이라는 토대 위에 헤세에게 의무감을 가지고 베풀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대로 헤세를 양육하려고 한 것이었다. 일상생활이나 교육방향이나 생의 목표를 늘 이런 큰 틀 속에 짜 맞춰 놓고 어린 헤세를 양육했다. 부모가 생각하는 "최고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며, 그 분께 그분이 만드신 세상에서 봉사하는 것"33)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고정되어 있고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인간의 이 지상에서의 삶이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쯤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이 그들의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고, 그 삶을 어떤 이기적인 충동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봉사와 희생으로 살려고 한다"34)는 그의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체험과 유산이 그의 삶에 지나치리만큼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가 본 세계관은 신 중심 세계관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모두 신에 의해 이뤄지며, 신을 통해 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었다. 모든 현상세계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초인간적인 신에 의해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35)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고집스러운 어린 헤세는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 천진난만한 자연아가 되려고 했다. 그는 한 개성 있는 인간의 길을 가려고 하였다. 그는 "개성의 상실 없이 기독교인이 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36)고 말하기도 했으며 또한 경건주의자가 되고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였다면 아마도 부모와 하모니를 잘 이루었을지 모른다고 하였다.
헤세의 생애와 작품을 통털어서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이 개인과 개성의 수호임을 생각할 때, 그가 얼마나 이런 독선적이고 경건한 부모 밑에서 숨이 막혔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는 무엇보다도 형식을 싫어했다. 매 일요일 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는 믿음 형식에 대해 그는 거부감을 느끼며,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만 만날 수 있는 신을 "일요일 신 Sonntagsgott"37)으로 비하했다.
또 그 외의 다른 이유는 그 자신은 어떤 구속을 받기 싫어하며, 어떤 종교적 독단과 독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는 체험이며 삶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교리나 신학적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신앙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싯달타』에서도 그는 철두철미하게 교리, 가르침을 떠나 체험된 삶 속에서 인간의 완성된 모습을 그리려 했다.38)
그래서 그는 아예 기독교를 두 가지 형태로 양분하고 있다. "나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기독교가 있는데, 하나는 실질적이고 개인적이고 도그마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이고 , 다른 하나는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것입니다"39) 헤세는 말할 것도 없이 개인적이고 실질적이며 도그마에서 자유로운 기독교를 갖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공동의 예배 형식, 공동의 모임. 교리에 얽매인 믿음에 대해서 그는 반발했다.
헤세 자신은 이런 그의 기독성을 아주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개인 기독성 privates Christentum"40)이다. 특히 그는 교회를 배제한 기독교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나름대로 이 개인 기독성 이론을 펴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고압적인 강요는 나에게 이중으로 참을 수 없습니다. 첫째, 한 신학자가 기독교 정신에 감동되었다고 보는 평범한 사람에게 자기 신앙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고, 목회자의 통제 밑에 들어와야 한다고 호통치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소명 받지 않은 면이 있는 나의 정신과정까지 간섭하는 이런 강요는, 제가 보기에는, 구두 굽으로 어린 작은 식물을 밟아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둘째, 당신은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 없이는 기독교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나는 반대로 묻겠습니다. 그것은 어떤 교회입니까? 프러시아 교회입니가? 루터교회입니까? 고백교회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러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비공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교의와 규칙은 완전히 결여되어, 맨 마지막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권위적으로 태도를 취해도 되는 것입니다.41)
하인리히 게퍼르트 Heinrich Geffert 는 헤세에게 있어서 자연체험은 종교 체험이 되었는데 교회가 자연 밖에서 신을 설교하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었으며 교회의 도그마를 극복하는데 실패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42)
또 헤세의 종교관 특히 그의 기독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글은 「신학단상 Ein Stücken Theologie」인데, 그는 여기에서 인간 완성의 길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 글은 아주 종교적 색채가 강한 글이다. "인간완성의 길은 순진무구 Unschuld에서 죄로, 죄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파멸 혹은 구원으로 이어진다"43) 헤세는 이 말이 "기독교적이고 유럽적인 의미로"44)쓰여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헤세의 기독성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갖게 해주는 글이다.
우선 인간의 길 - 그것이 인간형성의 길이던, 인간완성의 길이던 간에 - 이 순진무구함, 즉 무죄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인 해석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어서 원죄를 지었고, 이들의 후손인 인간은 대대로 유전된 죄 즉, 원죄Erbsünde를 갖는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헤세의 견해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 헤세는 인간형성의 과정의 첫 단계부터 기독교적인 인간이해와는 거리가 먼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죄Schuld" 또한 기독교 윤리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다르다. 헤세는 순진무구함에서 죄로 이르는 길에 "선악을 알게되는 것, 문화나 도덕이나 종교나 인류의 이상에 대한 요구"도 포함시키고 있다. 다른 것은 논외로 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종교의 요구"45)가 "무죄Unschuld"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물건이나 모든 요소들이 인간을 "무죄"의 천국이나 유년시절의 세계에서 갈등과 번민의 세계로 이끌고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연적인 시련의 단계라고 보고 있다. 또 절망에서 자비나 구원에 이르는 과정, 다시 말해 신앙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켜 그는 "도덕과 법의 저 편의 한 상태의 체험"46)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것 또한 기독교적인 것과 다르다.
헤세는 인간형성의 길을 기독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또 형이상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와 견해는 그러므로 그의 기독성을 의심케하기에 충분하다. 언젠가 헤세는 "내 자신의, 기독교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영혼사를 이야기하는 것, 또 그것에서부터 나의 개인적인 신앙의 방식을 체계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인지 모른다"47)고 말한 적이 있다.
헤세의 이런 불분명한 태도로 인하여 헤세의 독자들은 헤세의 기독교적인 태도에 대해 혼란을 가져온다. 만일 헤세가 자주 그리고 다양한 뜻으로 사용하는 몇 가지 기독교적인 개념들, 예를 들어 "신Gott", "구원 Erlösung", "은총 Gnade", "천국 Paradies" 등의 개념을 온전히 기독교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그는 헤세를 억지로 기독교의 틀 속에 성급하게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다.
헤세의 기독교적인 비기독성을 다른 의미로 표현하면, 그는 항상 살아 있어 여러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신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역사적 예수에 집착하는 기독교, 교회에 갇힌 기독교, 교리에 묶인 기독교를 거부하며, 그가 믿는 신도 전통적 기독교의 신도 아니다. 그는 정통적인 교리나 형식으로 믿어지는 기독교를 한결 같이 거부한다.48)
심지어 헤세는 역사적인 예수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의인화된 기독교 신이 아니라 한 위대한 인간이나 스승 정도로 본다. 만년의 예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면 그의 예수관 내지 기독교관이 얼마나 정의하기 어려운 가를 알 수 있다.
예수에 대해서 나는 내 생애의 84년 동안 내 생각을 자주 바꿨습니다. 교회와 신앙고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저는 다른 견해에 가까이 할 수도 있습니다.49)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사스 Abraxas 신은 기독교 정통 신이 아니다. 이 신은 두 얼굴 다시 말하면 정신과 자연,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신과 악마의 두 얼굴을 한 신이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모든 인습과 종교적 강압에서 해방된 자아는 이 아프락사스 신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싱클레어에게 상징적으로 제시된 신은 결코 유일신이 아니다. 싱클레어가 믿는 신은 선이며 부성적이며 아름다우며 감상적인 신이었는데 그는 데미안을 통해서 이 세상은 그 외에 다른 것을 만들어져 있음을 알고 그가 믿었던 단순한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또 한가지 『데미안』에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싱클레어는 처음에 데미안의 말을 믿지 않지만 나중에는 점차 그의 비기독교적인 이론에 동조하게 되고 결국은 카인을 승리자로 만드는데 동의한다. 정통 기독교 교리로 보면 카인은 죄인이며 신의 심판을 받는 자다. 헤세는 이런 비기독교적인 주인공을 통해서 경건한 부모에 대한 종교혁명을 일으킨 셈이다. 호르스트 크류거 Horst Krüger 는 『데미안』에서 어린 싱클레어가 경건한 부모의 세계를 떠나 강하게 자아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것을 가리켜 "개인적 항거의 무한한 즐거움"50)을 표현했다고 보고 있다.
헤세는 또한 구원관에 있어서도 정통 기독교 이론을 따르지 않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 오직 신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뿐이다. 그러나 헤세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신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자아 내면에서의 개인의 구원이다. 그러니까 내면적, 개인적 완성을 통한 구원이다. 자기 자신 속에 구원으로 이끌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랑 Wanderung』에서 "구원의 길은 오른 쪽이나 왼쪽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 길은 자기자신의 마음으로 이끈다. 거기에만 신이 있고 거기에만 평화가 있다."51)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헤세는 완전히 비기독교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Hans Küng은 이 '사랑'을 헤세에게 있어서 가장 기독교적이라고 했지만, 이 『데미안에서 쓰인 '사랑'은 아브락사스적인 사랑이다. 싱클레어는 꿈속에서 느낀 사랑에 대해 "사랑은 둘이었다. 둘이며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천사의 모습인 동시에 사탄이었으며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된 것이며, 사람인 동시에 짐승이었으며 최고의 선인 동시에 최고의 악이었다."52)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III. 결 론
이상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헤세의 기독성에는 많은 의문과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느 정도 그가 기독교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섣불리 어떤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를 알게 된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조건들과 헤세의 사상이나 행위를 비교해 볼 때 헤세는 전혀 기독교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헤세의 기독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나는 어떤 공동체나 교회나 종파에 결코 속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오늘 날 거의 기독교 신자라고 여긴다"53)는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가는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삶과 작품에서 알 수가 있다.
헤세 자신이나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이 추구한 신은 기독교 유일신이 아니라 아브락사스 같은 양면성이 조화된 신이며, 인간 완성의 표상으로써의 상징적인 신이다. 기독신은 선 그 자체이지 선과 악의 조화된 신이 아니다. 그가 이런 신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작품의 완성된 인간형상들과 일치한다.
큥 Küng은 " 헤르만 헤세는 결코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이해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전통신학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꼈다"54)말로 그의 기독성을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
헤세의 기독교를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개인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 기독교"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헤세의 애매모호한 기독성을 그래도 기독교와 연관지어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신비주의적 성격의 기독교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Gerhart Mayer 는 그래서 헤세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헤세 자신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가 "교회기독교도Kirchenchrist", "개인 기독교privates Christentum","일요일 신Sonntagsgott"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겠는가?
헤세는 어린 시절에는 모태 기독교인으로, 청소년기에는 반기독교인으로 그리고 장년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교회 주위를 서성이는 이방인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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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Hermann Hesse und das Christentum
HONG, Soon-Kil (Mokwon Uni.)
Einer der wichtigsten und sichersten Wege Hesse zu verstehen, ist es, sein Leben und Werk im Zusammenhang mit der Religion zu betrachten, womit er sich zeit seines Lebens unermüdlich beschäftigt hat. Seine Werke seien die Ansätze seiner eigenen im Christlichen beginnenden Seelengeschichte.
Er ist wie fast alle andere Europäer auch als Christ geboren und gestorben. Das Christentum spielte also eine entscheidende Rolle im Leben und Werk von seiner Jugend an bis zu seinem Greisenalter. Man kann sogar sagen, seine Werke seien eine Kette von Variationen seines religiösen Lebenslaufs.
Seine Väter und Eltern lebten im Überfluß vom Geist des christlichen Pietismus, worunter Hesse immens litt und wogegen er eine heftige Revolte führte.
Der Ein- und Austritt des Maulbronner Seminars war ein besonders wichtiger Trennpunkt "als Ort des Übergangs, eines Übergangs freilich in eine der schwersten Krisen." Von da an bis zum Zeitpunkt, wo er als gelungener Schriftsteller selbständig wurde, war sein Leben an sich ein schweres Ringen mit der Religion.
Die Gründe, warum er anti-christlich gehandelt hat, liegen vor allem darin, daß die religiösen Forderungen seiner Eltern zu groß waren, als daß er sie annehmen konnte. Der mißlungene Schulbesuch spielte dabei eine entscheidende Rolle. Zweitens war Hesse von Natur aus ein Mann von Trotz und Eigensinn. Er wollte seinen eigenen Weg gehen. Drittens wollte er frei sein von Dogma und Lehre. Als Naturkind zielte er auf die höchste Entfaltung des Individuums.
Sein Religionsbekenntnis, daß er nie ohne Religion gelebt habe und keinen Tag ohne sie leben könnte, trägt die janusköpfige Attitüde. Er sagt weiter, daß er sein Leben lang ohne Kirche ausgekommen sei. In des Wortes wahrer Bedeutung ist er ein religiöser Mensch, obwohl er nie in die Kirche geht. In dem Artikel 「Ein Stückchen Theologie」 ist er der Meinung, daß der Weg der Menschwerdung mit der Unschuld beginnt, was dem traditionellen, orthodoxen Christentum widrig ist. Ein Mensch ohne Erbsünde ist im christlichen Glauben kaum vorzustellen.
Außerdem hat er andere Begriffsauffassungen über "Gott", "Liebe", "Erlösung", "Gnade" usw. Er sucht nicht nach einen Einzigen, christlichen Gott, sondern einen Gott wie Abraxas in 『Demian』. Oder er gibt dem Gott eine pantheistische, mystische Färbung.
Er glaubt nicht an den geschichtlichen Jesus. Jesus war ihm nur einer der Heiligen, oder der Vollendeten wie Sokrates, Buddha, Laotse u.s.w.
In seinem religiösen Leben spielt das Christentum zwar eine beherrschende Rolle, aber er war ein ewiger Fremde, ein Außenseiter, der sein Leben lang um die Kirche herumschweifte.
Je älter er wurde, desto weiter entfernte er sich vom christlichen Glauben. Er vertiefte sich in die östliche Religion und Philosophie. Besonders begeisterte er sich für den mystischen Einheitsgedanke aus Indien und China. Er treibt keine Universalreligion, aber er zieht die Idee der humanistischen Religionen dem alleingültigen, nur gotteinbezogenen Christentum vor.
Ob Hesse überhaupt ein Christen war und wenigstens ob er an einen Gott glaubt, ist nicht zu überzeugen.
Er ist ein religiöser Mensch, aber kein Christ. Oder man kann vorsichtigerweise sagen, er steht abseits vom Christentum. Das Christentum war nur ein Teil der Religionen, woran er zeit seines Lebens glaubte.
In den Kinderjahren war er geborener Christ unter Betschwestern, in den Jugendjahren ein Anti-Christ wie Nietzsche und in Altersjahren ein Schein-Christ, also kein echter Christ.
1) Hermann Hesse: Mein Glaube. In: Hermann Hesse. Gesammelte Werke in 12 Bänden. Frankfurt/M. 1970. Bd. 10. S. 79. (앞으로는 GW라는 약어를 사용함)
2) Hermann Hesse: Mein Glaube. GW 10. S. 70/71.
3) Hermann Hesse: Krieg und Frieden. GW 10. S. 548.
4) Hesses Brief an Wilhelm Kunze v. 17. 12. 1930. In: Hermann Hesse: Ausgewählte Briefe. Frankfurt/M. 1976. S. 42. (앞으로는 AB라는 약어를 사용함)
5) 이 두 사람들의 신앙 생활에 대해서는 모니카 훈니우스 Monika Hunnius 의 방문록을 참조하기 바람. Monika Hunnius: Johannes. Heilbronn 1948.
6) Hesses Brief an die 「Baltische Rundschau」 v. Sommer 1954. In: AB S. 414.
7)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 바람. Bernhard Zeller: Hermann Hesse und die Welt der Väter. In: Wolfgang Böhme(Hrsg.): Suche nach Einheit. Hermann Hesse und die Religion. Karlsruhe 1978. S. 10-25; Hermann Hesse: Erinnerung an Ärzte. In: Volker Michels(Hrsg.): Kleine Freude. Frankfurt/M. 1977. S. 7-10; Monika Hunnius: Johannes. a.a.O; Hermann Hesse: Großväterliches. GW 10. S. 302-311; Hermann Hesse: Kindheit des Zauberers. GW 6. S. 371-390.
8) 헤세의 『데미안 Demian』, 『어린 영혼 Kinderseele』 등에 밝고 어두운 두 세계 속에서 겪는 어린 영혼이 잘 그려져 있으며, 이는 곧 헤세의 어린 시절의 고백이다.
9) Hermann Hesse: Gertrud. GW 2. S. 38. 똑 같은 시가 「Im Leide」라는 제목으로 발표됨. Hermann Hesse: Die Gedichte 1. Frankfurt/M. 1977. S. 245.
10) Hermann Hesse: Meine Kindheit. GW 1. S. 224/5.
11) Hesses Brief an seine Eltern v. 15. 10. 1890. In: Ninon Hesse(Hrsg.): Kindheit und Jugend vor Neunzehnhundert. Hermann Hesse in Briefen und Lebenszeugnissen 1877-1977. S. 66. (앞으로는 KuJ 라는 약어를 사용함)
12) Luipold는 마울브론을 가리켜 "가장 어려운 위기 가운데 하나에 이르는 과도기의 장소"로 보았다. Luipold, Hans-A.: Das Evangelische Seminar Maulbronn, eine Station im Hermann Hesses Leben. In: Friedrich Bran(Hrsg.): Wege zu Hermann Hesse. Bad Liebenzell. 1989. S. 178.
13) Hermann Hesse: Begegnungen mit Vergangenem. GW 10. S. 352.
14) Irmgard Yu-Gundert는 경건주의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의 두 면이 있다고 보고 특히 헤세에게는 교육에 있어서 부정적인 면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Vgl. Irmgart, Yu-Gundert. Über den Einfluß Innerfamiliärer Tradition auf das Bild des religiösen Menschen im Werk Hermann Hesses. (1997년 헤세학회 발표 원고) S. 3f. 참조
15) 여기에 대해서는 홍순길: 헤세의 생애와 작품에서의 부자갈등. 독일문학 64(1997)과 홍순길: 헤세작품에 나타난 부자갈등의 원인과 발전양상. 헤세연구 1(1998)을 참조
16)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는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써 거대한 바퀴(Rad)는 바로 학교와 신앙의 상징물이며 어린 헤세는 그 밑에 깔려 신음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17) Hermann Hesse: Kurzgefaßter Lebenslauf. GW 6. S. 393.
18) 헤세의 아버지는 창작활동이 "밥벌이 안되는 재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Vgl. Ninon Hesse(Hrsg.).: KuJ 1. S. 415.
19) Hermann Hesse: Erinnerung an Hans. GW 10. S. 212.
20) 헤세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다고 헤세의 어머니는 일기에 적고 있다. Hirsch는 어린 헤세가 경건주의 부모를 떠난 모티브를 심미주의적인 것과 고집으로 보고 있다. Vgl. Willi Hirsch: Hermann Hesse. Beobachtungen und Gedanken zu seiner religiösen Entwicklung. Diss. Bern 1945. S. 6.
21) 헤세의 많은 작품에서는 주로 어린 주인공이 경건한 기독교 분위기를 벗어나 죄악과 양심의 가책 속에 있다가 부모와 가정과 신 속으로 돌아오는 모티브를 갖는다. 『Demian』,『Kinderseele』, 『Meine Kindheit』, 『Narziß und Goldmund』, 『Peter Camenzind』 등에 이런 모티브가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Thomas E. Kolby: Zur Thematik des Verlorenen Sohnes. In: Volker Michels(Hrsg.): Materialien zu Hermann Hesses 『Demian』, Frankfurt/M. 1997. S. 150 ff. 참조
22) 헤세는 이 때 라틴어 학교장이었던 캅 Ernst Kapff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어려운 시기가 "나의 작가로서의 자아를 형성해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Vgl. KuJ. 1. S. 466.
23) 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에 다닐 때는 이런 독서의 자유로움이 없었다.
24) 헤세의 글 가운데 『Robert Agion』, 『Klingsor』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특히 『Robert Agion』에서 유럽인들의 종교적 침략행위를 가리켜 "닭장 안에 침입한 족제비"라고 했다. Hermann Hesse: Robert Agion. GW 3. S. 353.
25) Hermann Hesse: Besuch aus Indien. GW 6. S. 295.
26) Ernst Robert Curtius: Kritische Essays zur europäischen Literatur. 3. Aufl. Bern 1963. S. 158. Fritz Böttger 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Vgl. Fritz Böttger: Hermann Hesse. Leben, Werk, Zeit. Berlin 1977. S. 297 f.
27) Hesses Brief an seine Eltern v. 13. 9. 1896. In: KuJ 2. S. 140.
28) Hermann Hesse: Mein Glaube. A.a.O. S. 73.
29) Ebd.
30) Hesses Brief an eine Leserin v. 23. 2. 1935. In: AB. S. 137.
31) Hermann Hesse: Kinderseele. GW 5. S. 174.
32) Ebd. S. 183.
33) Johannes Hesse an Hermann Hesse v. 10. 3. 1892. In: KuJ 1. S. 187.
34) Hermann Hesse: Mein Glaube. GW 10. S. 71.
35) 헤세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적은 『나의 유년시절』에서 그가 어머니에게 이성적인 질문을 하면, 곧 잘 "하느님이 바로 그렇게 만드셨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말하고 있다. Vgl. Hermann Hesse: Meine Kindheit. GW 1. S. 228.
36) Hesses Brief an Stefan Zweig v. 10. 2. 1923. In: Ursula und Volker Michels(Hrsg): Hermann Hesse. Gesammelte Briefe. Frankfurt/M. 1979. Bd. 2. S. 52. (잎으로는 GB 라는 약어로 나타냄)
37) Hesses Brief an seine Eltern v. 13-19. 1896. In: KuJ 2. S. 139.
38) 여기에 대해서는 홍순길: 『Siddhartha』 연구. -주제, 구조, 사상적 배경- 창학사 1984. 참조
39) Hesses Brief an Kuno Fiedler gegen Oktober 1939. In: AB. S. 183.
40) Hesses Brief an D. Zimmermann v. 3. 3. 1935. In: GB 2. S. 458. Gerhart Mayer 는 그의 신비주의적 종교성을 가리켜 "개인적 종교성 individuelle Reloigiösität"이라고 했다. Gerhart Mayer: Die Begegnung des Christentums mit den asiatischen Religionen im Werk Hermann Hesses. Diss. Bonn 1956. S. 39.
41) Hesses Brief an D. Zimmermann. In: GW 2. S. 458.
42) Vgl. Heinrich Geffert: Das Bildungsideal im Werk Hermann Hesses. Diss. Hamburg 1927. S. 27.
43) Hermann Hesse: Ein Stückchen Theologie. GW 10. S. 77.
44) Ebd. S. 75.
45) Ebd.
46) Ebd.
47) Ebd. S. 79.
48) Ursula Chi는 그가 헤세에게서 감명 깊게 찾은 의미를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살아 있는 신에 대한 신념"때문이라고 했다. Vgl. Edition Isele: Die vielen Gesichter Hermann Hesses. Eggingen 1996. S. 56.
49) Hesses Brief an J. Schneider v. April 1961. In: AB. S. 534.
50) Horst Krüger: Unendliche Lust an der private Revolte. I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v. 29. 2. 1984.
51) Hermann Hesse: Wanderung GW 6. S. 134. 또한 같은 책의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신은 우리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신을 긍정할 수 없다"(S. 157.)고 했다.
52) Hermann Hesse: Demian. GW 5. S. 95.
53) Hermann Hesse: Mein Glaube. GW 10. S. 78.
54) Hans Küng: Nahezu ein Christ? In: Walter Jens / Hans Küng: Anwälte der Humanität. München 1989. S.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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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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