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공부

sey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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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0.2.2
보편논쟁 (普遍論爭 controversy of universal)과 신의 존재론적 증명
중세 철학 4편에서 소개한 보에티우스, 미지의 필자 디오니시우스, 에리우게나와 같은 일련의 철학자들이 4세기에 걸친 망각과 암흑의 지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여러 역사적 사건들에 파묻혀 소실되었다.
찰스 1세의 학문 장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그의 사후 여러 소봉건 국가로 분할되었으며, 교황청은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능했거나 부패하였고, 수도원은 이미 지방의 교육과 학문의 선도적인 지위를 상실하였다. 또한 몽고와 사라센, 노르만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학문과 문화의 폐절은 끝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거의 500년 동안 철학적인 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문화의 보급은 일부 황실과 귀족의 대저택에서 매우 장식적인 언어로 이루어졌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침묵과 망각 속에서 10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갑자기 철학은 보편의 문제, 신의 존재 증명, 신앙과 이성의 영역에 관한 문제 등을 들고 나와 격렬히 토론하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들이 토론을 거듭하면서 그리스, 기독교, 유태 및 아라비아의 사상들과 합류하며 철학의 부흥을 촉발하여 새로운 철학을 이루게 되었다.
1. 보편자의 문제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보편자의 문제는 10세기 중세 사상가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사상 체계 구성의 대부분이 이 문제의 해결에 달려 있다는 신념으로부터 나왔다.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논제는 인간 사유의 대상과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어떻게 연관 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은 개체적이고 무수한 반면, 정신 내에 있는 대상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예를 들어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초목(草木)이나 나비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와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우리의 감관에 의해 관찰하는 현실적이고 개체적인 초목이나 나비와 상응한다. 그들은 확실히 나비를 “본다”는 것과 나비를 “생각한다”는 것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즉 개별체를 보고 있지만 보편체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든 설명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감각이 한 개체를 지각할 때 우리의 정신은 그것을 일정한 관념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나무나 나비와 같은 명사화된 관념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 혹은 “부처흰나비”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모든 현실적인 나무들, 즉 참나무, 느릅나무, 플라타너스 등 모든 나무를 나타내는 우리의 언어이며, 나비도 부처흰나비, 제비나비 등과 같은 모든 개별적인 나비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들 명사화된 단어와 나무 혹은 나비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나무란 단어는 단지 언어에 불과한가 아니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가? 나무라는 단어가 상수리나무 혹은 너도밤나무의 그 무엇을 가리키는데 그 무엇이 모든 나무에 공통된 것이라면 그 단어는 보편적인 그 무엇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보편자는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우리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은 단일하거나 개별적이며 특정한 것이다. 보편자가 우리 정신 속에 존재하는 관념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과 정신 외부에 있는 현실의 개별 대상들 간에는 어떤 연관 관계가 존재하는가? 정신은 보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어떻게 활동하는가? 정신 “안에” 존재하는 보편 개념에 대응하여 정신 “외부에는”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반드시 어떤 대답이 필요하다는 점을 당시의 사람들은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모종의 해답을 찾아 중세의 철학자들은 먼 길을 떠나야 했다.
a) 보에티우스의 견해
보편자의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다시 보에티우스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겠다. 이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한 철학자가 보에티우스이며, 비록 그의 이론이 500년 동안 잊혀졌다 하더라도 중세의 어느 날 보편자 문제를 둘러싼 격심한 논쟁을 야기한 초기 주역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는 포르피리우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을 주석하면서 포르피리우스에 의해 제기된 보편자의 문제를 거론했었다. 이 문제들은 주로 특정한 사물과 정신의 개념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유로 경험되는 유(類)나 종(種)과 특정한 대상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문을 제기하였다. 1) 유와 종은 실재로 자연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정신의 구상물에 불과한가? 2) 그것들이 실재라면 물질적인가, 비물질적인가? 3) 그것들은 감각적인 사물과 별개로 존재하는가, 혹은 그것 내에 존재하는가?
보에티우스는 이 문제가 대단한 난제임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사유가 정신 외부의 실재에 대응하는가, 대응하지 않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논점의 전부라면 외부에 대응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우리의 정신 속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리스 인들이 메두사를 생각해 낼 수는 있었지만 메두사라는 개념과 대응하는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는 기하학자가 하듯이 선분이나 삼각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종류의 선분이나 삼각형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메두사의 개념과 삼각형의 관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메두사의 개념에 대해서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삼각형의 개념은 “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각형의 개념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보에티우스가 여기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정신이 개념을 형성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즉 “합성”(괴물과 인간을 혼합시키는)에 의한 것과 개체의 대상에서 술어를 부분적으로 이끌어내는 “추상”에 의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유와 종과 같은 보편 관념들은 정신에 의해 현실의 개별 사물들로부터 추론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참”관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편자는 개별자로부터 추론된다고 말한 보에티우스는, 유나 종은 개별 사물 “속에 존재하며,” 그것들이 정신에 의해 “사유”될 때 곧 보편자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보에티우스는 유와 종뿐만 아니라 정의(正義), 선(善), 미(美)와 같은 다른 성질을 포함하는 사항까지) 보편자는 대상과 정신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사물 안에 “내재하고” 정신에 의해 “사유”된다고 서술하였다. 두 그루의 각기 다른 나무가 둘 다 나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것들은 존재에 대한 동일한 근거, 즉 동일한 실체인 보편자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유사하게 보이며 유사하게 지각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신은 두 나무 속에서 동일한 보편적인 요소를 발견하기 때문에 양자를 모두 나무라고 “사유”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자가 자연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정신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첫 문제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답변이었다. 그에게 있어 보편자는 사물과 정신, 양쪽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보편자가 물질적인가 비물질적인가 하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것은 사물 속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며 정신 속에서는 비물질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보편자가 개별적 대상과는 동떨어져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들 속에 내재하는가? 하는 세 번째 문제에 대해 그는, 그것은 사물 안에 존재하며 정신 안에서는 사물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대답하였다.
포르피리우스에 의해 제기되고 보에티우스가 성찰한 이러한 질문들이 거의 500년 후에 토론의 대상이 된 이후, 이 논제에 대해 수세기 동안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다. 비록 그 논점들이 비교적 제한되고 엉성하거나 면밀한 용어들로 구성되었을지라도 논쟁의 결과에 따라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논쟁자들은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들은 일생일대의 결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b) 과장된 실재론
보편자가 실제로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과장된 실재론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유(類)나 종(種)은 실재 안에 존재하며 개체들은 이 보편자를 공유한다고 주장하였다. 보편자는 형상이나 이데아이며 개체와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말한 플라톤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인간성과 인간은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다수의 인간 안에 항상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가 과장된 실재론자들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실재론이 주목을 받은 것은 토우르나스(Tournas)의 오도(Odo, 혹은 Odo Tornacensis)의 저서 때문이었다. 그는 토우르나스의 가톨릭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성 마르틴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캄브라이의 주교가 된 후, 1113년 안킨(Anchin)에 있는 수도원에서 삶을 마쳤다. 그에게 실재론은 어떤 정통적인 신학 교리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원죄설을 설명하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실재론적으로 기술해야 했었다. 실재론에 의하면 한 종의 모든 구성원 속에 포함된 보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본성의 조건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였을 때 이미 인간 혹은 인간성의 실체가 영향을 받고 오염되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세대는 그들의 행위의 결과를 물려받게 되었음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실재론이 부정된다면 아담과 이브의 행위는 그들 자신에게서 끝나게 되며 원죄설의 설득력은 부당한 논거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삼위일체설을 설명하려면 실재론의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여러 구성원들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인된다면,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으로 화할 것이며, 각 구성원은 전체적으로 독립적이며 다른 존재로 군림할 것이라고 그는 파악하였다.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1125)에 의해 전개된 이 추론 방식에 대답을 한 안셀무스는 “모든 사람이 단지 하나의 보편자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각각의 위격(位格, persona)은 신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유일한 신을 이룬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과장된 실재론자인 샹포오의 기욤므(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는 두 가지의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 하나는 동일성 이론인데 인간성과 같은 보편자는 모든 구성원 속에서 동일하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었다. 보편자의 “총체적인” 실재는 각 사람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특정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는, 단지 그들의 본질 혹은 실체가 우연하게 변형된 성질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1142)는 다음과 같이 기욤므의 추론을 반박하였다. 각 개인이 총체적인 인간의 종이라면 인간성은 로마에 있는 소크라테스나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 내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고, 이럴 경우 인간의 본질이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즉 로마와 아테네에 소크라테스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아벨라르두스는 이것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그와 같은 생각은 곧 범신론으로 귀착된다고 비판하였다. 기욤므는 이와 같은 반박 때문에 수정된 이론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은 무차별론으로서 반실재론적인 견해였다. 그는 수정된 견해를 가지고 주장하기를, 하나의 종에 대한 개체들이 동일한 것은 어떤 공통된 본질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분적인 측면에서만 그것들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즉 그것들은 “무차별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논거하였다.
c) 유명론(唯名論)
과장된 실재론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의 한 사람인 로스켈리누스 혹은 로슬랭(Roscelin 1050~1125)은 콩피에뉴 태생이며, 영국, 로마, 토우르나스 등지를 여행하고, 투르, 콩피에뉴, 브장송에서 교편을 잡은 후 아벨라르두스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개체만이 자연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단어와 같은 일반적인 용어인 보편자는 어떤 사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어의 발성에 의해 표현되는 한 단어(voces) 혹은 명사(nomen)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종적으로 종과 유는 실재 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스켈리누스의 입장에서 볼 때 논리학은 단어만을 다루는 학(學)인 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에게 보편자에 대한 논의는 단어에 관한 것이지 실재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논거로부터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은 제각기 독립적인 존재이며 그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는 한 단어에 불과하며 실제로 근본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수아송 공의회는 1092년 삼신론(三神論)을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를 기소하여 로스켈리누스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번복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켈리누스는 어떤 유(類)의 추상, 즉 보편자는 하나의 사물과 대응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과장된 실재론을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보편 논쟁사에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일정한 지분을 행사할 수 있었다.
d) 개념주의 : 온건 실재론
실재론자들이 그들의 관점에 극단적이었던 것처럼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 또한 극단적인 측면이 있었다. 양쪽의 견해가 모두 극단적이라고 하여 이 양극단의 견해를 지양하고 있는 것이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 1079~1142)의 입장이었다. 그는 격정적인 삶을 살면서 그의 스승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엘로이즈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브르타뉴 대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였고 프랑스에서 학자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은 상당 부분 이단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노센트 2세는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려 클러니(Clunny)로 물러나도록 하였다. 1142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엘로이즈는 시신을 인수하여 매장하고 무덤을 22년간 지켰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12통의 편지를 모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서한』은 13세기 하나의 유행처럼 읽혀졌다.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성은 원래 단어에서 연유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 단어가 다수의 개별자에게 적용되는 경우에 그것은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소크라테스”라는 단어는 보편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단어가 단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보편적인 용어의 기능은 개체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보편적인 용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아벨라르두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은 몇몇 개체들의 존재 방식에 의해 그 사물 모두에게서 어떤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이 유사성이란 실재론자들의 본질(essentia) 혹은 실체(substantia)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개체를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각할 뿐 아니라 그것을 사유하거나 이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상이 있어야만 하는 눈과는 달리, 정신은 개념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물질적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정신은 두 가지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데, 첫째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개체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인간과 같은 보편자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논거에는 개체의 개념을 분명하지만 보편자의 개념은 확연하지 않은 점이 있다. 우리는 보편자가 의미하는 바를 사실상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고, 따라서 정신의 개념으로서의 보편자는 개별적인 감각적 대상과는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개체에 적용된 단어들로서의 보편자는 이들 대상 안에만 존재한다고 그는 파악하였다. 여러 개체에게 같은 용어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각각 개체가 이미 다른 개체와 같은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개체로부터 추론되며 추론의 과정에 의해 우리는 보편자의 존재 방식이 아닌 보편자에 대한 이해 방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들로부터 그것들이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성질들을 추론해야만 사물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자란 이 개념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어떤 실재를 나타내고 있는 하나의 단어이자 개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근거란 곧 유사한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우리 정신에 스며드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보편자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는 이 정도이지만 그렇다고 이 근거가 실재론자의 주장대로 사물의 의미에 있어서 실재하는 어떤 것은 아니었다. 또한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자는 단지 주관적인 관념이거나 어떠한 객관적인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에 불과하다는 엄격한 유명론자는 아니었다.
200년 이상 지속될 보편 논쟁은 아벨라르두스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로도 아퀴나스, 오캄을 비롯한 일군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생명을 걸고 논쟁하였으며, 더욱 정교하고 면밀한 개념과 용어를 통하여 중세 철학의 독특한 노선을 걸어갔다. 이 노선이 스콜라 철학이며 스콜라 철학은 논리와 증명을 통하여 보편을 입증하려는 처절하고 놀라운 집념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보편 논쟁에 뛰어든 집념의 중세 철학자들에게 보편자 논쟁은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의 전편(前篇)이라는 것을 누구나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보편자 논쟁은 신의 존재 증명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논의되었으며, 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허다한 철학자들이 그 생애의 일정부분을 아낌없이 헌정했었다. 그들은 이 하나의 논제를 입증할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이나 영혼을 송두리째 내던질 순교자적 자세로 논쟁에 뛰어들었고, 몇몇의 철학자들은 그러한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2. 신의 존재 증명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그의 유명한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으로 사상사에 각인되었다. 그는 1033년 북부 이태리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나 베네딕트 교단에 입문하여 대주교가 되었으며, 1109년 켄터베리에서 삶을 마감한 안셀무스에게는 철학과 신학이 구분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그는 이미 신앙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이성적인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앙과 이성은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르리라고 확신하였다. 더구나 안셀무스는, 인간은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일관된 그리고 합리성 이외의 어떠한 권위에도 의지 않는 자연 신학 혹은 형이상학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렇다고 안셀무스가 자연 신학과 신앙간의 어떠한 연관 관계를 부정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의도는 자연 신학에 의해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마련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추종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에 대한 진리를 단지 이성에 의해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고 있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도입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의 방법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인 셈이며,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그의 논제는 그에게 철저한 진실이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자신의 계획이 출발도 못할 것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인간의 정신은 신의 심오함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지성에 의해 그러한 심오함을 보기란 어쨌든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안셀무스는 고백하였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증명으로부터 안셀무스는 단지 약간의 기대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의 글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진리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대어록(Proslogion)」이라는 제목의 저서에 나오는 존재론적 증명을 제기하기 전에 출간된 「독어록(Monologion)」에서 그는 세 개의 다른 증명을 제시했었다. 이 세 논증은 그의 철학적인 방향을 보여 주는, 즉 유명론을 부정하고 실재론을 수용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의 실재론은 단어란 단지 소리나 문법적인 약속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 사물을 지칭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세 증명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이른바 그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유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서로 비교해야 선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물들은 유일하고 동일한 선의 성질을 공유해야 한다. 이러한 선성(善性)이야말로 선 자체이며 최고선(最高善)과 같은 것이다. 위대함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논증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선하고 가장 위대한 것이 존재해야 한다.
2) 존재하는 만물은 유(有)를 통해서건 무(無)를 통해서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사물은 분명히 무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남은 선택은, 하나의 사물은 여타의 사물에 의해서나 혹은 그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 그것은 무이므로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이 여타의 사물에 의해 생겨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물들 서로가 상대방을 생성한다는 의미이므로 이것 또한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홀로 존재는, 또한 모든 다른 사물의 존재 원인인 하나의 사물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신(神)이다.
3) 존재에는 여러 가지의 정도 혹은 단계가 있다. 동물은 식물보다는 더 우위의 존재를 소유하며 인간은 동물보다는 더 우위의 존재를 가진다. 따라서 인간이 무한히 많은 단계를 반복하여 올라 가지 않으려면 최상의 그리고 완전한 존재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 세 논증 모두가, 존재하는 유사한 사물에서 시작하여 존재의 전체 단계 중에서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이어진 단계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추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사한 사물은 우리의 언어로 선(善), 위대함, 원인(原因), 존재(存在)라 불리우는 것을 분유해야 비로소 이들 단어가 어떤 존재하는 실재를 지칭하며, 따라서 유한한 사물은 한 단어뿐만 아니라 어딘가에 최대의 완전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존재를 분유한다는 안셀무스의 실재론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플라톤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이러한 논증들이 수학적인 증명과 같은 명증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동료 수도사들은 그가 이 논증들을 간단히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사유한 후 더욱 단순하고 명확한, 그리고 그의 생각에 전혀 아무런 결함이 없는 논증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대어록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편에 실려 있다.
a) 존재론적 증명
이 증명에 대해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훗날 같은 논제를 들고 성찰한 아퀴나스의 증명들이 어떤 경험적인 증거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에 신에게로 옮겨 가는 논리적인 가정에서 출발한다면, 이와는 달리 안셀무스의 논증은 그의 정신 내부로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안셀무스는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가져다 준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시론을 본받아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였다. “당신의 정신 내부의 방으로 들어가 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과 신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외의 모든 사물을 차단시켜라.” 또한 그는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도 하기 전에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논증 자체는 빠르게 진행된다. 안셀무스의 말에 의하면, 신은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존재는 실재하는가? 이 질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시편 14:1의 “우둔한 자는 다음과 같이 진심으로 말했나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를 인용하며 이 구절에서 “우둔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석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우둔한”이라는 의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곧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우둔한 자가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그 말을 이해하면 그가 이해한 것은 그의 지성 안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지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과 실제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화가가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을 미리 생각한다고 할 때 그의 지성 안에는 그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그려지지 않은 작품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마침내 그가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 그는 그의 지성 안에 그 둘 다를 가지고 있으며 그는 그가 완성시킨 작품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이것이 증명하고 있는 점은 지성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기조 전에 그것이 지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그의 정신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둔한 자가 그 구절을 들었을 때 그는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 또한 이해되는 것은 무엇이나 지성 안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둔한 자일지라도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가 그의 지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안셀무스는 그의 논증의 핵심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즉 우둔한 자일지라도 그 누구나 하나의 관념으로써 단지 지성 안에 있는 존재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존재가 그 이상의 더 위대한 존재의 현실적 존재이다. 우둔한 자, 그 스스로 발견하는 모순은 신의 의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즉 그는 현실적 존재는 지성 안에 있는 그것의 관념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실재 속에나 지성 속에나 모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도를 하면서 그는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감사드린다. “당신의 온유하신 은혜로 내가 이전에 믿었던 것을 나는 이제 당신의 신성한 계시를 통하여 이해하였나이다.”
b) 가우닐로의 반박
토우르나스 근처의 한 수도원의 또 다른 수도사인 가우닐로(Gaunilo)는 그 “우둔한 자”를 변호하고 나섰다. 가우닐로가 우둔한 자를 변호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안셀무스의 증명의 부당함을 반증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는 그 증명의 첫 부분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 증명에 의하면 지성 내에는 신의 관념이 존재해야 하며, 우둔한 자가 이 말을 듣자마자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의 개념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둔한 자는 그러한 존재의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하는 여타의 사물 중에는 이러한 개념이 형성될 수 있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더구나 안셀무스는 신과 똑같은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은 더욱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현실적으로 인간의 정신이 그러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면 “증명”은 필요치 않게 된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존재를 완전한 존재의 한 측면으로 연결시킬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가우닐로의 또 다른 중요한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종종 사실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섬, 즉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섬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완전한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는 것이 가우닐로의 주요한 논지였다.
c) 가우닐로에 대한 안셀무스의 답변
안셀무스는 두 가지의 대답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우둔한 자와 더불어 우리는 더 이상 위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완전성의 정도를 비교한 후, 더 이상 완전한 것이 없는 최대의 완전성을 향해 움직인다면 항상 이것이 가능하다. 두 번째로 가우닐로가 완전한 섬을 비유한 것은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단지 한 가지 경우에 있어서만 어떤 관념으로부터 필연적인 그것의 존재에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경우란 비존재가 사유될 수 없는 신의 경우이다. 어떤 섬이란 반드시 존재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거나 혹은 우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모든 유한한 사물에 대해 적용 가능하다. 여타의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유일의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 자체는 다른 사물로부터 유출되지 않고 그 자체로부터 필연적인 존재를 얻는다. 이것이 곧 신이다라고 안셀무스는 가우닐로의 반박에 대답하였다.
마무리
중세의 어느 날 몇몇 철학자들이 갑자기 보편자 문제를 두고 각론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논제처럼 보였던 것이 그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철학자는 그들이 다루는 논제가 세상의 지배논리(기독교 교리)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돌연 철학이 절실해졌고 절실한 철학은 더욱 처절하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렇게 탄생하였으며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유와 논리를 흡입하여 거대하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몇몇 철학자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그러한 시도 자체가 신성(神性)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이도 있었고, 그러한 논제는 인간의 손으로 결코 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중세의 철학자들이 느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의 진위를 그들 자신의 손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이었다. 종교적인 절박감은 사실 당시의 성화(聖畵)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예수의 수난을 그린 다수의 성화에서, 또는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초상에서 예수와 성인(聖人)의 고통은 다만 신성한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결코 리얼한 묘사나 세속적인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 10세기 이전의 성화에서 예수가 피 흘리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고통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노력은 그만큼 기독교의 신앙이 절실한 요구에 직면했다는 반증이며, 인간의 감각적 자극에 호소해야 하는 이유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지식이나 학문을 생산 관리하는 계층의 독점적 위치가 흔들리고 있음을 지식관리자(오늘날의 technostructure)들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며, 문화와 학문의 많은 요소가 대중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동시에 대규모 생산과 대규모 소비를 중시하는 사회적 변화가 도래하는 사회적 조짐이기도 하였다.
멜 깁슨이 연출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았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중세의 성화(聖畵)에 스민 절제되고 신성화된 예수의 경건함과 온건함이 핏자국 흥건한, 소름끼치는, 골고다 언덕의 잔혹사 위에 펼쳐진 예수보다 더 강인하고 견고한 것임을 재삼 의식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관성을 갖는 법이다. 멜 깁슨과 중세 보편논쟁에 참여한 철학자들은 거의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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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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