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리학 - 심리 상담 및 치료

seyoh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6.5.28
금욕주의를 탈피한 20세기의 욕망담론에는 바타유의 에로티즘 외에도 많은 흐름이 있지만 여기서는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지라르 (René Girard, 1923~2015)의 욕망담론만을 살펴보겠다. 그들의 욕망담론이 20세기 욕망담론의 흐름을 대표할 뿐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20세기 초 인류의 정신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라캉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언어적으로 재해석했다.
현대과학에서 꿈은 수면 중에 기억을 정리하는 뇌의 활동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꿈을 욕망과 관련시키지 않는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을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Libido: 성적 충동)의 위장된 성취로 봄으로써 꿈을 욕망과 관련시켰다. 그렇다면 꿈은 억압되고 왜곡된 무의식적 욕망이 가상적으로 충족되는 심리적 과정인 셈이다.
그래서 드러난 ‘꿈 내용’은 꿈의 숨은 뜻, 즉 ‘꿈 사고(思考)’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꿈 내용을 수수께끼 같은 ‘상형문자’라고 불렀다. 꿈 사고가 꿈 내용으로 변환될 때 그대로 변환되는 게 아니라 가장과 변형의 왜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그는 꿈의 작업이라고 불렀다. 라캉은 바로 이 꿈의 작업에 주목했다.
꿈의 작업은 대체로 압축과 전위의 작용으로 나뉜다. 압축이란 꿈의 숨은 뜻 전체가 어떤 한 요소로 압축돼서 표현되는 작용이며, 전위는 도덕적으로 저촉되는 무의식적 욕망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표현되는 작용이다. 압축의 예는 꿈에서 수염이 아버지를 대표하는 경우다. 전위의 예는 성교가 꿈에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하는 장면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다.
이런 꿈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거꾸로 꿈 내용의 언어를 꿈 사고의 언어로 바꾸어 무의식적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그런데 라캉은 압축과 전위 같은 꿈의 작업도 언어의 수사적인 기능인 은유와 환유에 의해 가능하다고 여겼다.
은유란 어떤 기표(記標)가 유사성에 의해 다른 기표로 대체되는 수사적 기능이며, 환유는 어떤 기표가 인접 관계에 있는 다른 기표로 치환되는 수사적 기능이다. 은유의 예는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는 경우이며, 환유의 예는 대통령이 청와대로 치환되는 경우다.
만일 압축과 전위가 언어의 수사적인 기능인 은유와 환유에 의해 가능하고, 압축과 전위에 의해 무의식이 구조화된다면 결국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에 의해 구조화되는 셈이다. 따라서 무의식적 욕망은 언어의 수사적 기능에 의해 성립하므로 무의식이 언어의 조건이 아니라 언어가 무의식적 욕망의 조건이 된다.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쳐 욕망이 형성된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자신의 몸을 조각조각 따로 구성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처음에는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이는 어머니의 동의를 거쳐 이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 단계가 거울 단계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어머니와 하나가 되어 있다고 상상하며, 어머니의 욕망 대상인 남근(Phallus)이 되려는 욕망을 갖는다. 아이는 어머니라는 타자(Autre)의 욕망을 욕망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의 자아와 욕망은 거울에 비친 그의 이미지나 어머니라는 타자에 의존하기 때문에 환상과 오인에 빠져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아이는 상상계1)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등장으로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받고 공포에 질려 어머니의 욕망 대상인 남근이 되려는 욕망을 억압한다. 아이는 어머니와 하나가 되는 열락(Jouissance)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단계가 오이디푸스 단계이다.
이 단계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라기보다는 아버지라는 법과 기표다. 그리하여 아이는 상상계에서 벗어나 상징계2)로 들어선다. 그럼으로써 아이의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다. 이 텅 빈 구멍은 욕망의 어떤 대상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자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는 대상 원인, 즉 대상 a(object petit a)3)다. 이 대상 a가 욕망의 실재다.
그리하여 인간은 권력과, 부, 사회적 지위, 명예 등을 끝없이 추구해도 이 결핍을 채워 욕망의 실재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이 욕망의 환유적 성격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종착역 없이 내달리는 기관차와 같다.
이런 성격을 라캉은 기호공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청각적 영상)와 기의(개념)의 결합, 즉 기호=기의/기표라고 보았다.4) 라캉은 그의 기호공식을 뒤집어서 기호=기표(S)/기의(s)로 바꾸었다. 라캉의 기호공식은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를 표시할 뿐 아니라, /은 기의와 기표를 결합하는 선이 아니라 기의가 기표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서 서로 만날 수 없게 만드는 선이다.
예컨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뜻이지만 이성과 동물의 뜻을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하므로 이렇게 끝없이 기표의 연쇄만 있게 된다. 기의와 맞아떨어지는 궁극적 기표는 상징계에는 없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욕망도 언어적 차원에 있으므로 인간은 욕망의 실재에 도달하지 못하고 욕망의 대상만이 끝없이 치환된다.
들뢰즈: 욕망은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는 혁명적인 힘이다
들뢰즈는 좌파적인 정신분석학자 가타리를 만나기 전에는 니체의 영향을 받은 ‘차이(Différence)’의 사상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타리를 만나 그와 함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을 출간함으로써 욕망의 정치학을 만들어냈다.
들뢰즈는 욕망을 결핍이나 획득과 연결시키는 서양의 전통철학과, 욕망을 언어적 차원에서 무의식의 재현으로 이해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동시에 거부했다. 이런 사상적 흐름은 욕망을 생산과 연결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플라톤, 데카르트), 설령 생산과 연결시키더라도 환상의 생산과 연결시키기(칸트, 프로이트, 라캉) 때문이다. 이런 사상적 흐름에 맞서서 그는 욕망을 생산과 연결시키되 현실적인 것의 생산과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욕망(Désir)이란 어떠한 부정과 금지도 무시하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리비도처럼 순수한 에너지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뻥 뚫린 구멍이나 목마름, 또는 부러움 등의 결핍이 아니다. 욕망은 뒤죽박죽되어 이리저리 흘러 다니면서 끊임없이 한계를 무너뜨리고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 그래서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될 수도 조작될 수도 없다.
이에 반해 욕구(Besoin)는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환상을 생산하며 결핍과 연결된다. 욕망과의 관계를 볼 때 욕구는 욕망으로부터 파생하며 욕망이 생산하는 현실계 속의 역-생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욕구는 결핍과 같이 사회적으로 조작되며 지배계급에 의해 시장경제에서 환상적으로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그는 욕구로부터 욕망을 구분하여 욕망을 사회와 동급인 것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욕망을 사회를 위협하는 혁명적인 힘으로 간주했다. 이때의 욕망이란 오이디푸스의 침실이나 가족극장5)에서 나오기 때문에 위협적인 게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기존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흐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지만 혁명적이기도 하다.
푸코나 데리다처럼 들뢰즈도 주체라는 개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욕망에서 주체를 박탈했다. 욕망은 고정된 주체가 결핍되어 있는 기계다. 그리고 욕망의 대상도 욕망과 접속된 기계다. 심지어 인간도, 자본주의 사회도 욕망 기계다.
이 기계들은 서로 접속하고 있지만 수목(樹木)형처럼 위계구조를 이루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리좀(땅밑 줄기)처럼 연결되고 접속한다. 욕망의 수목형에서는 뿌리가 중심이 되어 줄기와 가지의 주변으로 욕망이 흘러간다. 반면에 욕망의 리좀형에서는 뿌리와 줄기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지점이든 다른 지점과 연결되고 잡초가 퍼져나가듯이 중심과 주변의 이항 대립이 해체되어 욕망이 흘러 다닌다. 이는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의 욕망의 흐름과 유사하다.
욕망과 자본주의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이성적 기획을 포기하고 조작할 수 없는 분열적 욕망을 유목적 기계로 간주하여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힘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이중의 운동을 항상 수반한다. 한편, 자본주의는 이윤을 창출하고 극대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의 영토(시장)를 개척하고 확대함으로써 전통적 사회관계를 무너뜨리고 욕망의 흐름을 분열적으로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탈영토화).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탈영토화가 자본주의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오이디푸스적인 가족, 관료조직, 경찰기구 등을 동원하여 욕망의 분열적 흐름을 조절하여 자본주의의 공리계6) 안으로 끌어들인다(재영토화).
욕망은 본질적으로 착취와 예속의 위계구조를 위협하고 사회의 모든 부분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그리하여 이성이 아니라 욕망만이 자본주의적이고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조절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넘어서는 탈주의 선7)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는 진단하였다.
지라르: 욕망은 모방적 경쟁에서 나온다
지라르도 라캉과 들뢰즈처럼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사상가이다. 그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프랑스보다는 미국에서 더 많이 알려졌다.
지라르는 욕망을 욕구(Appétit)로부터 구분했다. 욕구는 식욕과 성욕 같은 동물적 본능에 불과하지만 욕망은 인간적 차원에 있다. 그렇다면 욕망은 무엇일까? 그는 욕망을 한 인간이 선망하는 모델(중개자)을 모방하려고 할 때 이 모델이 지니고 있지만 그에게는 결핍되어 있는 대상을 차지하려는 정념이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욕망이란 그 자신의 본성에서 자율적으로 우러나오는 것도 아니고, 욕망 대상의 본성 속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욕망이 주체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낭만적 환상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서 욕망은 인간 주체와 욕망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욕망이 모방적 경쟁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례로 돈키호테의 욕망을 들었다. 돈키호테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세르반테스의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인물이다. 돈키호테는 전설적 기사인 아마디스를 흠모하고 선망하여 그의 행적을 모방하려고 한다.
이 경우에 돈키호테의 욕망 대상은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일이다. 이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모델이자 중개자를 통해서 촉발된다. 그러나 아마디스는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키호테는 현실적으로 그와 경쟁할 수 없고 마음속으로만 경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돈키호테의 욕망은 주체, 모델 그리고 욕망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예는 소설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를 일반화한다면, 욕망은 욕망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모델-대상의 꼭짓점을 잇는 삼각형을 이룬다. 따라서 욕망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타인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고 타인의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모방적 욕망을 좋은 쪽으로 돌려라!
인간의 욕망은 모방적 경쟁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들은 갈등과 불화에 빠지기 쉽다. 돈키호테는 아마디스와 현실적으로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델이 주체 가까이 있다면 주체는 모델이 욕망하는 대상을 차지하려 하고 모델도 이 대상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에 서로 욕망이 경쟁적으로 상승하여 갈등이 일어나고 마침내는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다.
예컨대, 친구인 갑과 을이 말다툼하다가 갑이 화를 이기지 못하여 을의 뺨을 때리고 을은 복수욕에 갑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갑은 몽둥이로 다시 응수한다. 이런 식으로 갑과 을은 서로 상대방을 모델 삼아 경쟁적으로 모방한다.
이런 갈등과 폭력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에 보복의 악순환이나 참극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악순환은 극단적으로는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모방적 욕망을 좋은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지라르는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지라르는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든지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밀라’는 설교를 인간의 모방적 욕망의 폐해를 잘 통찰한 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그의 욕망담론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보았고 결국 기독교에 귀의했다.
욕망담론들의 한계와 의문점
앞에서 보았다시피, 라캉, 들뢰즈, 지라르의 욕망담론은 각기 욕망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내 준다. 하지만 이들의 욕망담론에는 의문스러운 점도 있다.
라캉은 자본주의 사회의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갈증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인간 욕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거세공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확인하기 힘든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열증적 욕망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고집하는 순수한 욕망이란 허구적 개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한 그가 욕망을 과도하게 강조했다는 비판이 불거질 수도 있다.
지라르는 인간 사회의 모방적 욕망을 잘 간파했다. 하지만 욕망을 모방적 경쟁의 측면에서만 보려 함으로써,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생존을 위해 벌이는 무한경쟁과 욕망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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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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