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rararis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4.1.7
어제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점점 '시간'이라는, 이 거대한 지구의 비밀을 알 수 없어졌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과거, 현재, 미래. 그중에서도 며칠 전의 과거로 나는 돌아간다. 이 드라마를 말하려면 그때로 거슬러올라가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난 과거는 그의 기억을 말살한 알 수 없고 끔찍한 것이고 미래는 백지와도 같아서 그는 오직 손에 잡을 수 없고 환영과 같은 지금만을 가졌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너대니얼 호손, <일곱 박공의 집>)
2013년도 연기대상에서 지상파 방송 3사는 [직장의 신]의 '미스김' 김혜수, [기황후]의 '승냥이' 하지원,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짱변' 이보영에게 대상을 안겼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제대로 보지도 않았지만, [야왕]의 수애는 굉장히 아쉬운 수상의 기회를 날렸다. 옆에서 슬쩍 보기만 해도 굉장한 연기변신으로 열정의 연기투혼을 펼치는 게 느껴졌었는데. 기억에 의하면 수애는 [아테나: 전쟁의 여신]으로 수상이 점쳐지던 2011년도에도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보영이 모자란 게 아니라 수애가 굉장히 강한 느낌. 여하튼 한해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배우에게 연기대상의 대상은 중요한 의미 아닌가. 비슷한 연령대(셋 모두 70년대생)의 세 여배우라니, 꼭 사전모의라도 한 듯한 이 수상결과로 보면, 두드러질 정도의 연기를 선보인 배우가 3사를 통틀어 여럿이 아니었다는 결론과, 영화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은 방송 드라마라도 여전히 특정 배우에게만 상을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닌가, 그만큼 연기를 빼어나게 잘 하는 배우가 참 드물다는 생각, 에 닿는다.
기억나는 대로 대충 떠들면 올해 하반기에는 [비밀]과 [상속자들]과 [응답하라 1994]를 좋아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으면 봤다는 말을 하지 않는 성향상, 백퍼센트 본방사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방영내내 기대감에 마음 졸이며 봤다. 모두 기호와는 상관없이 시청률이 탄탄했고, 이루말할 수 없는 기대 속에 다양한 컨텐츠를 재생산한, 방송계를 쥐락펴락할 만큼 높은 관심을 받은 작품들이지만, 이미 과거다, 지나갔다고. 아쉬워해서 뭐하나. 다시 본다고 뭐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나.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있다.

드라마 [총리와 나]의 '나'는 굳이 소녀시대 윤아가 아니어도 됐을 것이다. 상큼한 마스크를 가진 이십대 초반의 뉴스타였어도 이야기가 통통 튀면 얼마든지 괜찮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인공은 윤아다. 예쁜데다 핫한 윤아. 전국의 대학에 연극영화과를 비롯한 방송관련학과가 통틀어 몇 개인지, 배우지망생이 얼마나 많은지 감도 안 오지만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뛰고있을 수많은 꿈들은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꿈이 간절함을 안고 세상을 부유한다. 걸그룹 멤버라는 이점을 이용해 이름을 알리고, 획득한 스타성을 발판으로 검증되지 않은 연기력으로도 비교적 쉽게 주연을 맡고, 스타 마케팅으로 주목받아 크게 실패만 하지 않으면 연말에 비중있는 연기상을 타는 이 아이러니한 구조와 시스템이 과거에는 당연하고 또 상관도 없다 생각했다. 세상이 원래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뻔한 대답도 수긍했다. 같은 사실이 유난히 비도덕적으로 느껴진 건 내 상황이나 사정이 달라져서라기보다 문득 이로써 기회를 잃거나 얻지 못한 누군가의 눈물과 한숨이 떠올랐다 사라졌달까. 가만히 있어도 대한민국 연예계의 최우선에 서있는 윤아와 수지는 상을 받았고, 물론 그 상의 이유가 연기의 격에만 놓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공식적으로 증명되었다 해도 여전히 누군가는 억울하거나 아쉬울 것 같아서. 그 억울함이나 아쉬움이 내것이 아닐 이유가 없어서. 처음이 아니라 검증될 만큼의 경력이 쌓인 후라 별 문제 없다면 없는 것도 같고. 이 순간에도 배우를 꿈꾸는, 웬만한 실력으로는 작은 배역 하나 맡기도 힘든 수도없는 배우지망생들의 슬프고 가혹한 현실은 일순간 내눈에만 보인 거겠지.

어쨌거나 잘생기고 예쁜데다 트렌디 드라마로 이미 과한 주목을 받은 적 있는 한류스타급 청춘배우 이민호와 박신혜의 만남, 남주를 능가하는 매력의 서브남주 김우빈의 합류, 거기다 아이돌 그룹 멤버의 연기변신으로 화재가 된 18세의 격정 로맨스 [상속자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만난, 정치표방로맨스의 여주는 사실 윤아가 아니어도 됐을 것이다. 윤아가 등장한 순간, 이 로맨스는 정말 땅에 발붙일 수 없는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또 한편의 그저그런 로맨스가 되었으니까.
이범수와 윤아는 극중에서도, 실제로도 스무살의 나이 차이를 자랑한다. 톡 건드리면 훅 날아갈 듯한 여리여리한 윤아가 발산하는 매력은 전혀 특별할 게 없고, 배우로서의 풋풋함을 연기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하지만, 아내와 사별하고 세 자녀를 홀로 키우는 40대 총리에게 어필하는 이십대 초반의 외모가 예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화면은 반짝인다. 실은 무얼해도 예쁘게 보일 프레임일 수밖에 없다. 극의 전반을 끌고나가는 원동력과 비중이 로맨스에 있고, 그 절정이 바로 남다정(윤아)의 역할이 미칠 수 있는 좌충우돌 상큼발랄 매력의 끝장판으로 통제되기 때문이다. 사랑스럽고 희망적이며 따뜻하고 감동적인 예쁜 여자를 누가 지켜주고 싶지 않을까. 심지어 시한부 치매 홀아버지를 두고도 활짝 웃어보이며 오히려 같은 처지의 강인호(윤시윤)를 위로할 정도로 기적의 힘을 믿는 해피 바이러스 아가씨이기도 하다. 연예가십전문 인터넷신문 여기자로 총리내정자 권율(이범수)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은밀한 각도에서 사진이 찍히며 시작된 얽히고 설킨 관계, 매스컴과 처남이면서 적인 기획재정부 장관 박준기(류진)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관에서 지내면서 겪는 티격태격 정쌓기와 부침있는 가족과의 찡한 에피소드까지,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게 싫어서 2등을 의도했다는 행시 차석의 엘리트 수행과장 강인호(윤시윤)의 명석한 두뇌가 어이없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꾸민 계약결혼이 어떻게 로맨스가 되는지 지켜보는 일이 시청포인트.

이런저런 말들을 썼지만 나이 먹었나, 본래 스릴러나 공포에 비해 로맨스나 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드라마 속 로맨스에 어째서 왕창 흔들리고 있는지. 드라마가 아직 3주차였기 때문에 거짓말 살짝 보태 얄밉긴 했어도 어찌나 예쁘고 화사한지, 젊음은 그래서 젊음인가. 내가 배우지망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티로 변신할 기회를 데려갔는지도 모르지만. 드라마란 모름지기 보는 그 순간에만 재미있으면 될 일이다. 주어진 시간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온전하게 즐기면 성공적인 감상을 한 것이다. 영화는 곱씹을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지만 드라마는 순전히 지금 현재 바로 이 순간을 주제로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중에 다시 감상할 수야 있지만 그건 방송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인 현재성과는 다른 각도에서 말해져야 한다. 의아하다, 월요일인 오늘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 글을 시작하고 끝냈다는 사실이. 이 글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이런 구절을 써야 한다.
나는 기차를 타고 링비 역으로 가서는 거기서 버스를 탔다. 어떤 면에서는 열일곱 살이었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망이 나를 차디찬 상태로 멈추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절망은 잘 싸여져 어두운 구석 안쪽 어딘가에 있으면서 나머지 다른 기관을 작동시키고 실용적인 문제를 처리하도록 한다. 이런 문제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주고, 어쨌거나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준다.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지난해는 지나갔으니 1월의 첫 월요일을 드라마로 풀자. 매일매일 정해진 시각에 꼬박꼬박 흘러나오는 대사와 음악과 움직임들. 그런 식으로 나는 어떤 저녁을 가졌고,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증받았고, 오늘 하루 절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다행이다. 이 글은 [총리와 나] 예찬이지 윤아 안티 고백이 아니다, 잘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나는 대부분의 배우를 그들이 곧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아주 간혹만 다른 이유로, 좋아한다, 그 직업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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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