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적판을 타고

윤고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7.1.23
그 건물 맨 꼭대기엔 피아노학원 간판이 걸려 있었다. 쌀집 간판 아래서 분식을 판다거나, 미용실 간판 아래서 구두를 파는 가게를 본 적이 있지만 이건 좀 당혹스러웠다. 폐기물 보관소니 소각장이니 하는 시설이 어떤 형태일지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확실히 지금 저런 건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셋. 지상으로는 3층 규모의 건물이었는데 아주 평범했다. 뭐랄까 솔직히 저 건물보다는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간 그 컨테이너박스가 더 정교한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마당은 쓰레기장이 아니니까. 분명히 임시로 빌린 거라고 했으니까, 연말까지만. 그렇지만 센터에서 처음에 약속한 시간이 가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연말이 되어서 또 뭐가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와 루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 지하를 확인하고 올라오는 동안 나는 차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아래를 보지 못했다. 조금 후에 아빠가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남은 담뱃갑을 지하로 가는 계단 첫 줄에 내려놓는 게 보였다.
오늘 내가 어떤 불안을 감지했다면 그건 아빠와 루가 주고받은 말보다는 두 사람이 방치한 침묵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지만, 해질 무렵 우리가 다시 미소약국으로 돌아올 때 차 안에는 거의 정적만 흘렀다.
“전 솔직히 설마 진짜 여기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루의 말에 아빠가 월요일에 다시 확인해보자고 대꾸한 게 전부였다.
“엄마한테는 헤맨 얘기는 하지 말자. 아빠가 담당자한테 다 연락해뒀거든? 확인하고서 다음주에 엄마한테도 확실히 얘기할 테니까.”
아빠가 미소약국 앞에 루를 내려준 다음에 한 말은 내 예상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은 것이었다. 아빠가 취한 행동 중에 내가 미리 짐작할 수 없었던 건 딱 하나, 담뱃갑과 라이터를 그 작은 건물의 계단에 두고 온 것뿐이었다. 내가 대답을 얼른 하지 않자, 아빠가 룸미러로 내 표정을 확인했다.
“아빠가 믿는 건 첫째잖아. 알지, 우리 딸?”
“아까 거기가 보관소가 맞아? 연말에 거기로 짐을 가져간대? 담당자가 저 아저씨 아니야?”
“저 사람은 아직 신참이잖아. 뭘 모르지. 우리 센터에서 가장 파워 있는 사람이 소장인데, 너도 전에 본 적이 있지? 소장님이 아빠랑 단단히 약속을 했어. 늦어야 연말이야. 최대 늦어야 연말이라고. 알았지? 그러니까 우리 딸은 걱정하지 마!”
60가지 목록을 하나씩 실행 중인 엄마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또, 나는 첫째니까. 내가 흔들리면 동생들은 통제가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미소약국에서 집까지는 안내가 불필요한 길이어서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온 그 말이 별 기능도 하지 못했지만, 내게는 그 말이 오늘 들은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는데, 저 지도의 판단과 우리의 판단이 정확하게 일치한,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초록 대문이 있었고, 그건 마치 반나절 동안 찾아 헤맨 진짜 목적지가 바로 여기인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찾던 건 폐기물 보관소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60개 목록을 다 해결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정확히 따지면 59개일 수도 있었고, 미완성의 한 가지가 영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었지만.
10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아주 화창해서 눅은 이불 같던 내 불안감을 바싹 말려주려는 것 같았다. 햇빛은 찬란했고 마당은 아름다웠다. 배롱나무는 곱게 단풍이 든 채, 오전에 도착한 손님들을 환영했다. 기자 두 명, 그리고 잠깐 우리 대문 안을 기웃거린 마티할머니. 우리 가족은 모두 청바지를 입고, 대문을 보란 듯이 활짝 열어두었다.
마당 한 쪽의 텃밭에는 이미 비닐이 깔려 있었다. 양파 모종을 일정한 간격으로 심을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비닐이었다. 우리는 이미 구획을 다 나눠 두고, 각자의 영역 표시를 할 수 있는 푯말까지 준비했다. 빨간 양파 모종이 100개, 흰 양파 모종이 100개였다. 기자들은 알아서 촬영을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농사를 지으라고 말했는데, 둘째가 그 말이 웃기다고 했다.
“우리가 농부인 줄 아나봐.”
그러더니 정말 프로농부처럼 양파 모종 심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내게 다가와 이런 조언을 하기도 했다.
“누나. 너무 깊게 심지 마. 토끼들도 생각해야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둘째가 어떻게 저걸 알았지? 그 말 이후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둘째가 혹여나 자루 얘기를 꺼낼까봐 마음을 졸였는데, 막내까지도 이렇게 거들었다.
“우와, 슈퍼지렁이야.”
막내가 가리키는 곳에 보통 지렁이보다 훨씬 굵고 길게 느껴지는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둘째가 지렁이를 손으로 집어 들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지렁이가 돌아왔네. 그런데 너무 커.”
우리가 웅성웅성 모여 있는 모습은 사진기자의 카메라에도 담겼는데, 지렁이도 함께 담긴 건지는 모르겠다. 아빠는 지렁이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빠 어릴 때 시골에선 이 정도 크기는 흔했다.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슈퍼지렁이를 시야에서 놓친 건 그때 내가 인터뷰테 응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영상 촬영용 카메라 앞에서 우리 텃밭에서 자라난 이름들을 읊었다. 치커리, 부추, 양배추, 당근, 상추……. 내가 그 이름들을 읊는 걸 보고는 막내가 애플이니 바나나니 말도 안 되는 걸 덩달아 읊기 시작했지만, 나는 적절한 시점에서 오늘의 주제로 돌아왔다. 텃밭식물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양파라고 말이다.
“양파는 추운 겨울에 맨몸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강인하고 씩씩해요. 이런 양파를 많이 먹는 게 건강에 좋대요, 제가 심은 양파를 제가 먹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해요. 나중에 제가 어른이 되어서도 꼭 텃밭을 가꾸면서 살 거예요.”
양파 모종이 실파처럼 가느다랗게 생겼다는 걸 모르는 애들도 많지만, 200개를 심는다고 해서 200개를 모두 얻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애들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 삼남매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마당에서 심고 거두며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삼남매의 하나로 뛰어노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혼자인 친구들이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에 대해 얘기하자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유나도 삼남매의 엄마가 되겠네요?”
뭐 이런 질문이 다 있나.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고, 딱히 중요한 질문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 질문은 내가 최근에 첫째로서 가졌던 부담과 긴장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왜요? 동생들이 있어서 좋다면서요.”
“그건 그거고요. 제가 나중에 부모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죠. 부모가 된다면.”
“그렇다면?”
“전 한 명만 낳아서 잘 케어해줄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가장 크게 웃었다. 엄마로서는 이게 농담이었으면 싶었을 것이다. 어머, 우리 딸 말하는 것 좀 봐, 엄마가 더 케어해줄게, 뭐 이런 말들이 오갔고, 그 반응들을 보니 정말 나도 농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로 어떤 말들은 방향성 없이 태어나는데,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뒤늦게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저기 저 꽃밭은 아이들이 관리한다던데, 유나만의 비법이 있나요? 아빠엄마가 힌트를 주시던가요?”
기자가 가리키는 곳에 채송화가 피어있는 게 보였다. 10월 말이지만 채송화는 아직 피어 있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물들이는 꽃이니 곧 저물 것이다. 이상한건 계절보다도 시간이었다. 아침에 피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지기를 반복하는 꽃인데, 요즘에는 밤이 되어도 저물지 않았다. 불면증에 걸린 아빠처럼.
“힌트요? 음, 아빠는 가끔 꽃이랑 소주를 함께 마셔요. 소주를 꽃에게 주면 꽃이 취해서 더 잘 핀대요.”
어색하게 웃는 아빠를 보면서, 오늘의 가장 큰 얼룩을 꼽아본다면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취재기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꽃이 취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는 거였다. ‘그보다는’ 하고 기자가 입을 열었다.
“꽃이 피는 게 결국 생존경쟁의 결과라고는 하더라고요. 하나만 있을 때보다는 둘 이상이 있을 때 더 왕성하게 피어난대요. 치열한 전쟁의 결과가 꽃인 셈이죠.”
이제 단체사진 촬영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막내는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아빠가 만 원 지폐를 한 장 주자 달라졌다. 최근에 막내는 만 원으로 무얼 살 수 있는지 알아버렸고, 돈을 받은 만큼 프로답게 행동하려고 했다. 얼마 전에 어린이집에서 본인이 만들었던 선글라스까지 썼다. 파란색 셀로판지와 분홍색 수수깡으로 만든 거였다. 우리는 카메라를 보고 나란히 섰고, 아직 식지 않은 햇살이 우리의 어깨를 적당히 데워주었다. 촬영이 끝났고, 기자들이 반사판이니 뭐니 하는 걸 치우면서 가방을 꾸리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연극이 아니라 진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제 유예기간은 끝난 것일까.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모두가 방심하고 있던 순간, 긴장감을 높여준 건 막내였다. 막내는 취재기자를 향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비밀을 하나 말해줄까요?”
“야! 엄마가 말하지 말랬잖아!”
둘째가 이렇게 말하고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기자는 비밀을 알고 싶어 혈안이 된 상태도 아니었다. 다만 발설하려는 자의 욕구가 너무 강했다. 막내가 외쳤다.
“우리 엄마가 저번에 차에서 방귀를 뿡부루붕붕! 아하하.”
막내는 제 흥에 도취되어 저만치 뛰어갔다. 엄마는 또 크게 웃음으로써 안도했다. 우리 모두는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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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