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1. 해적판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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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플라이프의 인터뷰는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엄마가 친구와 통화할 때 그 인터뷰에 대해 ‘평소대로 하면 되지 뭐, 준비할 게 뭐 있나?’ 라고 말하는 걸 들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식탁 위에는 그 토요일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60가지 항목으로 세분화되어 적혀 있었다. 60가지라니, 이를테면 담벼락 다시 칠하기처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세차처럼 조금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싶은 것까지 포함되었다. 엄마는 ‘이참에’ 라든지 ‘이 기회에’ 같은 말을 자주 썼다. 아빠는 주말에도 일찍 눈을 떴지만, 식탁 위에 놓인 60가지 목록과 대면하고는 미리부터 지쳐서 다시 침대로 갔다. 그래 봤자 오래 잠들지도 못했다. 아침을 먹으며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보는 게 우리의 평범한 토요일 풍경이었고, 그걸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였다.


 


  그런데 오늘은 텔레비전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서야 했다. 엄마가 ‘이참에’ 하라고 했던 일 중에는 센터에서 준비하고 있다던 그 폐기물 보관소가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분명히 확인하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센터의 폐기물 보관소에 다녀오는 건 이미 지난주에 할 일이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나머지 59개의 항목이 모두 이 하나를 위한 들러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건 엄마가 가장 강조하는 숙제였다. 아빠는 지난 주말에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폐기물 보관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미 서류로 다 얘기가 된 건데, 굳이 그걸 황금 같은 주말에 따로 가서 확인해야 하냐는 거였다. 


 


  “그냥 두 눈으로 확인하자는 거야. 그게 어디에 있는지. 세차도 좀 하고.”


 


  엄마의 말만 들으면 폐기물 보관소를 보고 오는 게 세차처럼 꽤 간단한 일인 듯 느껴졌다. 아빠는 괜히 세차를 문제 삼았다.


 


  “내일 비 온다던데. 다음주에 하자.”


 


  “그럼 세차는 다음주에 하고, 오늘은 거기는 다녀와. 직원도 두 시까지 오기로 했다며. 약속 다 해놓고 왜 그러는지 몰라.”


 


  “팀원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주말인데.”


 


  “본인이 같이 가겠다고 했다며, 그리고 거기 담당자잖아. 일 확실히 해.”


 


  막내가 엄마 뒤에 숨어서 후렴구를 따라 했다.


 


  “일 확실히 해.”


 


  오후 두 시, 나는 아빠를 감시하겠다는 핑계로 따라나섰다.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내가 숙제를 다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동행을 허락했다. 두 동생들은 안 된다고 했다.


 


  아빠가 차를 약속장소로 몰면서 말했다.

 


  “미소약국 보이지? 칠팔 년 전에 엄마가 차를 몰고 돌진한 데야. 저 유리문 앞으로 슝.”


 


  “왜? 저기서 뭘 잘못했어?”


 


  “아니. 운전 미숙으로.”


 


  미소약국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빠는 그쪽으로 차를 댔다. 


 


  “근데 왜 여기서 만나, 하필이면? 찜찜하게.”


 


  “이 통유리, 아빠가 갈아준 거니까 우리 문이나 마찬가지지. 앞으로 아빠랑 밖에서 만날 때는 항상 여기다. 알았지? 어이, 왔어?”


 


  한 사람이 조수석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안녕, 잘 지냈니?”


 


  나는 얼른 인사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시퍼런 자루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날의 시퍼런 자루와는 이미지가 너무도 달랐다. 하긴, 그날 내가 기억하는 건 그의 옷이었을 뿐, 정작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나는 뒷자리에, 잘못 달린 블랙박스처럼 앉아서 모든 것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는 아빠보다 한참 젊어보였고, 심지어 향수 냄새도 났다. 자루의 뒤통수에 자꾸 시선이 가는 건 그의 뒷머리와 목이 연결되는 지점 때문이었다. 그 경계선이 꽤 깔끔해 보였다.


 


  “난 또, 직속상관이랑 같이 오신다기에 사모님인 줄 알았는데. 따님이었구나!”


 


  자루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번 더 뒤를 돌아 내 얼굴을 확인했다.


 


  “와, 더 예뻐졌네. 책은 여전히 많이 읽고?”


 


  그게 뭐라고,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얼굴에서 온도 변화가 느껴졌다는 게 당황스러워서 얼른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는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을 낮게 틀었다.


 


  “그나저나 저녁이 있는 삶을 못 도와줄망정, 이렇게 주말까지 불러내서 어째?”


 


  “그게 함정이죠. 저녁 대신 주말을! 하하.”


 


  “저녁이 있는 삶?”



  내가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자, 자루가 대답했다.


 


  “음, 퇴근 후에 집에서 책 한 권 읽는 게 덜 부담스러운 인생이랄까?”


 


  “나도 그 나이면 그런 모토로 다시 살아볼 텐데 말이야. 이미 때가 묻었네!”


 


  아빠가 그렇게 말하며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차에 내장된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 1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주소지는 우리 집 주소와 앞머리가 같았지만, 구 단위에서부터 달랐다. 자루는 우리 시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동하는 셈이라고 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꽤 한산했다. 우리는 어느 한가운데서 점점 멀어지는 방향으로, 인파가 점점 적어지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자루의 명찰을 바꿔 달고 있었다. 이제는 자루가 아니라 ‘루’ 라고 부르기로 말이다. 내가 왜 그를 자루라고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루는 적절치 않았다. 그건 어째 불길한 이름이니까.


 


  우리는 49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빠의 센터 이름이 적혀 있는 넓은 부지였는데, 아빠가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뭔가를 한참 얘기했는데, 살짝 내린 차창 덕분에 대화가 내게도 들렸다. 아빠는 두 달 전에 이미 이곳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고 했고, 루는 깜짝 놀랐다. 나도 놀랐다. 아빠는 그때와 지금이나 이곳이 멈춰 있는 게 똑같다면서, 휴대폰으로 사진까지 찍어뒀으니 비교가 가능할 거라고 했다.


 


  “보관소를 만들 생각조차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


 


  “에이, 그럴 리가요. 아직 두 달 쯤 남았으니까, 기다려 보시죠. 공사야 금방 하잖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아빠는 엄마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거기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고, 루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그 허허벌판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마침내 아빠가 어딘가로 가자고 말했는데, 루는 그곳이 어딘지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아빠가 어떻게든 지금 그 주소를 알아내라고 다그쳤고, 루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새로운 목적지가 내비게이션에 입력되었다. 거기까지는 3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지금 이 위치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는 코스였다.


 


  30분은 1시간이 되었다. 인적이 드문 지역이라 교통체증도 없었는데, 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내비게이션조차 자신의 목적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영 아닌 것 같은 좁은 길로, 비포장도로 위로 우리를 인도하더니 마침내 어느 지점에 가서 이렇게 기권을 선언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흙길이었지만 타이어 자국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어쩌면 차가 들어오면 안 되는 것 같은 길 위였다. 아빠가 차를 돌리자 내비게이션에서는 다급하게 유턴하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는 결국 내비게이션을 껐고, 한손으로 주머니를 더듬더듬했다.


 


  “유나야, 아빠 휴대폰 안 가져왔니?”


 


  “난 모르는데?”


 


  “아, 놓고 왔네. 그나저나 길이 왜 이렇지. 혹시 내비 어플 없어?”


 


  아빠가 루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루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비는 없는데요?”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정말 내비가 하나도 깔려있지 않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얼른 새로 내려받는다거나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길 아닌 길로 계속 달리면서 말했다.


 


  “요즘에는 휴대폰 내비가 더 낫던데. 어플도 많고.”


 


  아빠의 뒤통수만 보아도 그 속에서 뭔가가 팽창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정작 옆에 앉은 루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가만히 있었다.


 


  “내 얘기는 얼른 내비를 깔라는 거야.”


 


  “내비를요?”


 


  루는 그렇게 되묻더니 주섬주섬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번 달 데이터를 다 써서 뭔가를 더 내려받는 건 곤란하다는 거였다. 저 아저씨가 왜 저러지? 이 상황에 내 또래나 할 법한 말을 하다니.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결국 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얼른 내비게이션 어플을 내려받아서 아빠가 폭발하기 전에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빠가 깜짝 놀랐다.


 


  “뭐야, 너 휴대폰이 있었어?”


 


  “요즘 없는 애들이 어디 있어. 참고로, 아빠 휴대폰에도 내 번호 저장되어 있는데.”


 


  아빠는 별 대꾸가 없었다. 엄마가 내 휴대폰을 개통해준 시점은 지난 여름이었는데, 그 이후 아빠가 얼마나 나한테 무심했는지를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자, 찍어봐. 정확하게.”


 


  자루는 아빠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아 새 주소를 입력하기 시작했는데 그조차도 서툴러서 또 남은 둘을 답답하게 했다. 다시 남쪽으로 30분을 달려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아직 지도에도 잡히지 않는 길을 통과했다. 그 결과 새 목적지까지 예상보다 금방 도착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아빠가 기대했던 폐기물 보관소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보였다. 지하에 얼마나 많은 길이 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이미 오후 다섯 시가 지나있었고, 해가 곧 저물 것처럼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루가 정말 데이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모든 걸 지연시킨 게 아닌가 하는 거였다. 데이터 부족이 아니라 실은 이 주소가 마땅치 않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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