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8일 en Paris(2018)

eternity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10.21
루브르박물관의 리슐리외관과 쉴리관 이야기:
http://blog.yes24.com/document/10894748
관람객이 비교적 적을 것이라 예상했던 금요일 오후. 밤 9시 45분까지 연장 오픈하는 날이므로 4시 30경 입장했다. 뮤지엄 패스 줄이 따로 있고 일반 줄보다 확연히 짧은 덕택에 거의 순식간에 검색대를 통과, 유리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서니 본격적인 설렘이 인다. 2년 전에는 시간이 없어 루브르는 포기하고 오르세를 선택했다. 오르세를 관람하고 루브르까지 걸어와서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사진만 찍을 수 있었다. 8월 말의 기분 좋은 햇빛을 받으며 유리 피라미드 옆 분수대에 앉아 '언제 와서 저 안에 들어가 보나'아쉬워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갔고 이제 그토록 기대하며 기다려 온 루브르 안으로 들어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 나폴레옹 홀로 내려온다. 이곳은 유리 피라미드 바로 아래 공간이며, 드농관 쉴리관 리슐리 외관으로 각각 입장하는 입구(에스컬레이터 탑승)가 있다. 뮤지엄 패스가 있으므로 티켓은 살 필요 없어 시간이 단축되고, 안내데스크에서 한국어 안내도를 챙긴다. 한국어 오디오도 있지만 표준발음을 내느라 더디게 진행되는 설명을 듣는 것보다 사전에 대충 알아본 바에 의지하기로 한다. 어느 미술관 또는 박물관이든 오디오는 은근히 무겁기도 하고 거추장스럽기도 하다(오르세에서도 5유로로 빌렸지만 곧 가방에 넣어버림).
안내도없이 루브르를 다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전시실에 입장하기 전 우선 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역피라미드! 말그대로 지상에서 삼각형으로 서 있는 유리피라미드를 거꾸로 천장에 매달아 놓은 피라미드이다. 메트로 1호선 팔레루아얄-뮈제 뒤 루브르(Palais Royal-Musée du Louvre)의 7번 출구로 나오면 역피라미드를 보며 지하 검색대를 통해 루브르곤내로 들어온다. 우리는 지상으로 들어왔기에 역피라미드를 보러 일명'카루셀 뒤 루브르 carrousel du Louvre'를 지난다. 루브르 아트샵를 비롯 여러 브랜드샵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일종의 지하 쇼핑센터이다. 문제는 역피라미드 바로 앞까지 가게 되면 루브르로 들어올 때 다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오늘은 지하도 지상 못지않게 한산한 모습이므로 일부러 이 수고를 감내해본다. 역피라미드 뒤쪽으로는 쁘렝땅 백화점 루브르 지점도 있다.
다시 나폴레옹홀로 돌아와 당연히 '드농관'을 선택한다. 왕궁이었던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바꾼 나폴레옹 1세는 드농남작을 루브르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했고, 그의 이름을 따 '드농관'이라 명명, 반지층부터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출발점으로 삼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나리자>를 볼 것이며, 자크 루이 다비드와 외젠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프랑스 회화 전시실에서 볼 그림들이 많다. 레오나르도 빈치의 다른 그림들을 포함, 카르바조 등의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들도 찾아봐야 한다.보고 싶은 작품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들떠 빨랑빨랑 걷는다.
드농관은 1층이 거의 전부.안내도에 따라 방향을 잡고 <모나리자>를 기준으로 삼으니 모든 것이 수월해진다.
첫 출발부터 낭패다. 복도와 전시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길 찾기가 힘들다는 것은 미리 알고 왔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사전에 공부하여 내 블로그에 올려놓은 전시실 표기가 완전 엉터리임을 알고 망연자실. 여러 여행 가이드북을 비교 대조하며 가장 보기 편할 것 같아서 올려놓았는데 이럴 수가! 루브르에서 받은 안내도를 펼치니까 훨씬 더 복잡하고, 출발로 삼으려고 했던 <니케>를 도통 찾지 못한다. 어영부영하다가 '모나리자'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가본다. 계단도 오르고 긴 복도도 지나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긴 복도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 전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화살표만 따라 허겁지겁. 도착하니, 가관이다. 저만치 멀리 조그맣게 <모나리자>가 보이는데 전시실 입구부터 그 앞까지 관람객들의 운집된 모습이 더 볼거리이다. 어찌어찌 인파를 뚫고 진입, 키 큰 아들덕에 줌인으로나마 <모나리자>를 정면에서 끌어당겨 찍는다. 스푸마토 기법이니 눈썹이 어떠하니 미소를 짓는 것 맞니 등등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여러 질문들을 생각하며 깊게 바라볼 여건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모나리자>의 반대편 벽에 걸려있는 파울로 베로네제의 <가나의 혼인잔치>을 감상하는 편이 낫겠다.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그림으로 베네치아에 어울리는 화려한 색채로 밝은 분위기이다. 베로네제 자신을 포함하여 당대의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며 팔라디오풍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파를 헤치고 줌인 촬영, 흐리지만 그래도 내 생애 첫 <모나리자>
루브르에서 가장 큰 그림677× 994cm. 파올로 베로네제의 <가나의 혼인잔치>
이제는 프랑스 회화를 찾아가야 한다. 안내도를 보니 <모나리자>가 있는 711번 전시실에서 나가 아까 지나온 긴 복도로 나가야 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메두사의 뗏목>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역작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있는 루브르 마당을 향해 바깥쪽으로 나가 700 701 702 전시실을 찾아야 했는데, 아직 방향감각을 터득하지 못한 우리는 반대편으로 들어가 710 712전시실 쪽으로 갔다. 안내도도 손에 들고 있고 가야 할 전시실 번호도 알고 있지만, 창문 하나 없는 완벽한 실내이어서인지 동서남북 파악을 못 하는, 웃기지만 짜증나는 상황이다. 다빈치의 역작 <바쿠스>, 미켈란젤로의 어릴 적 스승이었던 도메니크 기를란다요의 <노인과 소년>,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등 책에서 보았던 그림들을 발견하여 반갑다. 그러나, 이곳은 프랑스회회전시실이 아닌거다. 다시 찾아나가야 하나,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사계>연작이 보여 이리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근데 4개이어야 할 그림이 2개밖에 없다. 마침 옆에 있던 영어 가이드의 설명을 줏어 들으니 위에 있던 두 개의 그림들은 '손질'을 하기 위해 작업실로 들어갔다 한다. 보티첼리나 라파엘로의 그림도 이곳에 있겠지만, 우리는 프랑스회화실로 가야 한다. 아직 <니케>도 못 찾았고, 한번 길을 잘못 드니 제대로 찾아가려면 정말 멀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모나리자를 지나(여전히 북적대는 관람객들) 700 701 702로 찾아간다. 나와 보니 알겠다. 맨 처음에 화살표를 따라 <모나리자>를 찾아오며 지났던 곳이다. 이제서야 드농관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모나리자>가 있는 711전시실을 기준으로 좌,우를 정하면 되겠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바쿠스>
도메니크 기를란다요의 <노인과 소년>, 커다란 딸기코와 사마귀의 외모적 특이함속에 단아한 노인의 품성을 표현.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사계>연작 중 여름과 겨울. 계절에 맞는 나무와 꽃과 열매로 형태를 잡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가 모델.
방향을 읽어내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작품들이 드디어 실감 나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색채가 생각보다 선명하다. 우리뿐 아니라 이 작품들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날을 잡아 왔을 관람객들을 고려하니 그림에 바짝 다가갈 수 없다. 이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들을 각자의 카메라에 담으려고 애쓰고 있으므로 내가 방해가 될 수 있다. 우리 역시 관람객의 방해 없이 오로지 작품만 카메라에 담고 싶다. 그래도 눈치 없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림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을 제대로 보는 것 같지 않으면서 오로지 셀카와 커플샷을 찍기 위해 (활짝 웃으며) 그림 앞에 머물며 좀처럼 나와 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방해하는지에는 관심 없다. 우리의 인증샷은 꿈도 못 꾸고 팔은 아프지만 사람들이 좀 벗어나가줄 때까지 카메라를 맞추고 있다. 신기하다. 하나의 유명한 역작 옆에 또 다른 역작, 거기서 뒤로 돌아서니 또 다른 역작들. 이렇게 그려낸 화가들도 대단하지만, 완전히 공개하고 긴 세월 동안 잘 보존하고 있는 이들도 놀랍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약간 거만한 느낌이 드는 프랑스적 자부심의 원천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다. 그림마다 감탄하며 이동하다 보니 드농관 1층 700번에서 702번까지의 기나긴 프랑스회화 전시공간을 싹 다 걸어본 셈이 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자크 루디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때 내 눈에는 놀라운 광경이 포착된다! 처음부터 애타게 찾던, 그러나 찾지 못하여 반은 포기해버린 <니케>가 왼쪽 저 아래에 보인다. 반지층에서 1층으로 올라서는 계단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저 계단, 온통 우아한 하얀 빛의 대리석 같은 장식이다. 저 넓은 공간에 오직 하나 <니케>밖에 없다. 텅 빈 공간을 오롯이 <니케> 혼자서 차지하고 있다. 부드럽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에 <니케>주변이 고요하게 느껴진다. 뛰어가듯 쫓아가서 먼저 이쪽 난간에서 내려다본다. 누가 만들었지도 모르고 발견한 이래 날개와 팔의 일부를 만들어다가 갖다 붙인 '의도적 인공미'를 품고 있지만, 나 같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마냥 아름답기만하다.
이제서야 여유가 생긴다. 시간은 밤 8시경, 클로즈는 9시 45분이니까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드농관에 입장하여 한순간도 멈춰 있거나 앉지 못한 상태에서 두 시간 반가량이 흘렀다. 다리가 아픈 것은 당연, 지금에서야 욱신욱신한 느낌이 감지된다. 전시실을 찾고 그림을 찾는데 집중하느라 잊고있었지만, 배고픈지도 한참 되었다. 원래는 나폴레옹홀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루브르의 내부가 얼마나 넓고 복잡한지 당하고 나니 다시 내려가고 싶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람객이 빠져나가므로 <모나리자>를 포함하여 좀더 많은 작품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을테니, 일단 아까 700번 옆에서 보았던 카페로 간다. 다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되돌아가는 셈이지만, 간단하게 샌드위치 종류를 먹으며 쉬기로 한다. 가는 길에 다시 좌우로 벽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그림들을 쳐다보게 된다. 여전히 새로운 감격에 이 긴 복도를 세 번째 걸어가는 고역을 치르고 있는데도 발걸음은 가볍다. 카페는 내부와 외부로 나눠져있다. 카페 몰리엔 CAFE MOLLIEN이다. 샌드위치, 샐러드, 오렌지주스, 카페 알롱제를 주문(총 22.50유로) 하여 받아들고 야외 테라스로 나간다.
아~또 한 번 의외의 감탄을 할 수밖에.루브르의 바깥이 보인다. 유리 피라미드와 분수 및 루브르 마당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목을 내밀어 보니 카루젤 개선문과 튈르리 정원의 일부도 내려다보인다. 시간적으로 너무 완벽한 순간이다. 막 밤 8시를 넘으면서 루브르에는 핑크빛을 머금은 어두움이 내려앉고 있다. 머리카락을 날리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들지만 하루의 해가 마지막 빛을 내보내며 또 다른 시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 순간, 지켜보는 감동의 열기가 세다. 나는 여행자이다. 평범한 현상에도 황홀해질 특권을 부여받은 여행자. 어디에서나 매일 해는 지고 밤이 몰려 올 테지만, 오늘 우리 앞에서 진행되는 이 일몰의 '자연'현상은 '예술'이다. 평생 마음에 남아 그 어느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 줄 테고, 행복한 순간마다 소환되어 기쁨을 배가시켜 줄 추억의 성역에 자리 잡는다. 붉은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루브르를 지켜본다. 유리 피라미드는 투명한 광채에 싸여간다.
음식으로 장관으로 충전된 에너지를 안고 다시 전시실로 향한다. <모나리자>를 한번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아까 보았던 프랑스 회화 작품을 더 자세히 보면서 제대로 사진찍고 싶다. 물론 계단을 내려가서 <니케>를 바로 앞에서 볼 것이다. 카페에서 나오니 루브르아트샵이 보인다. 사실 아트샵이라고 하기엔 천장부터 벽면 모두가 굉장히 예술적이다. 이 자체도 하나의 전시실이다. 실물크기에 준하는 프린트부터 문구류 의류 양말과 시장바구니에 이르기까지 죄다 모나리자를 입혀놓았다. 사방에서 모나리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기념품 욕심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루브르만은 다녀왔다는 '물증'을 남기고 싶다.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고 부피도 작으면서 별로 비싸지 않은 것, 무엇이 있을까? 파일이 정답이다. <나폴레옹황제의 대관식> 축소판 그림도 한 장 구매한다.
전시실로 돌아오니 거의 텅 빈 느낌이다. 2백 년을 넘은 건물 안에서 역시 2백 년 전후의 시간을 살아온 작품들 속에 서 있다니 신비한 시공간의 연결을 느낀다. 오늘 서너 번째로 마주하게 되는 그림들, 어쩌면 오늘로 이렇게 보고 다시 보려면 한참 후에나 가능할 거다. 애틋한 아쉬움이 밀려든다. 더 자세히 보게 된다. 몇 명의 관람자들이 서성이며 그림을 가리는 경우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의 기념샷에 넣어준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이 그림들에 매료되어 오늘 이 순간에 가급적이면 일분이라도 더 그림 앞에 머물러 있고 싶을 것. 그림 앞 의자에도 앉아본다. 그림이 말을 걸어온다는 착각 속으로 기꺼이 휘말려든다. 강렬하고 때로는 험난했던 시대와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내가 앉은 이 자리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고 오늘 이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림은, 예술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응시하며 마음을 열어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환상과 환희의 세계가 찾아든다. 과거의 그림이 현재 속으로 들어와 미래에까지 이어질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살아가면서 내내 이 그림들을 대하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이야기할 것이므로.
운이 좋다고 해야 하겠다. <모나리자>앞도 널널하다. 자연스럽게 한자리 차지하고, '나와 모나리자'의 사진을 찍는다. 접근금지 거리가 꽤 있어 아무리 두 눈을 들이밀어도 가장자리가 뿌옇게 처리된 선이 빚어내는 신비로움이나 애매하여 더욱 빠져들게 된다는 미소를 감지할 수 없다. 그래도 한번 제대로 자리 잡고 볼 수 있다니 이만한 다행이 어딨을까.
<니케>앞에도 서 본다. 저만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한 걸음씩 올라오며 바라본다. 거룩한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소박한 마음을 갖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긴다. 비슷한 종류의 조각들이 많이 있고 흰색도 평범하고 계단이나 대리석 천장에 난 창문이나 조명 등 <니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새롭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런 특별하다는 느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에게 이럴 자격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조각가의 발상과 손길에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시간도 밤9시를 넘었고 이만하면 드농관은 다 보았으리라 확신하며 안내도를 들춰본다. 순간 <모나리자>의 711번 방 뒤편으로 왼쪽 끝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들의 번호가 참 특이하다. 720번 다음에 721이 없고 726 727, 또 껑충 뛰어넘어 734라니. 나의 기억 속에서 뭔가 잽싸게 툭 튀어나온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이 이름이 떠 올랐다. 런런의 '테이트 브리튼'과 '내셔널 갤러리'에서 안개 같으면서 연기 같은 터너의 그림을 보며 희뿌옇한 것 같으면서 강하게 몰아쳐오는 모호함에 끌렸었다. 그 이후 책도 읽어보면서 혼자서 아는 체를 해 온 윌리엄 터너! 이곳 루브르에는 그의 그림이 단 한 점 있다던데 그곳이 바로 저 뒤쪽 끝 어딘가가 아닐까?. 이때 또 하나의 그림이 연상되어 떠오른다. 역시 영국 화가 '게인즈버러'의 그림인데, 언제부터인가 풍성한 핑크빛 드레스와 연관되어 내 기억속에 자리잡아왔다. 루브르 방문 준비과정에서 김영숙 저 <루브르 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을 읽다가 이 드레스 자락이 사뿐히 내려앉은 그림이 바로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공원에서의 대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내도에는 이 그림의 위치가 나와 있지 않지만 나의 느낌상 터너와 게인즈버러는 영국 화가이므로 같은 전시실에 있을 것 같았다. 이 두 그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왜 이 문닫기 직전의 시점에서 생각나는 건지. 여기는 <니케>앞, 718 1719 전시실은 안내도상으로 <니케>와는 정말 극과 극이다.
결국은 내 눈으로 보지 못한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공원에서의 대화> 출처: 김영숙 저 <루브르에서 꼭 봐야 할 그림100>
또다시 702 701 711을 지나 이보다 더 긴 거리를 뛰어가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다. 오늘 <모나리자>를 세 번이나 보는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막 뛰어오니 진짜 터너의 안개 번지는 듯 모호하고 야릇하게 따뜻함을 퍼뜨리는 풍경화가 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찾아본 대로 제목은 <멀리 만이 보이는 강가의 풍경>. 폐관 시간이 임박하고 게인즈버러의 그림도 봐야 하지만 터너 앞에 멈추었다. 바로 옆에 풍경화 한 점이 더 있다. 터너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풍경화를 그렸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어 늘 터너와 대조 비교되는 화가, 컨스타블의 그림이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도 두 화가의 작품이 한 전시실에 있어서 영국 풍경화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두 화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인상을 준다. 두 화가도 서로를 라이벌이라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프랑스에서도 나란히 견주어지는 것이 재미있다.
왼쪽이 콘스터블, 오른쪽은 터너
이제 마지막, 게인즈버러. closed.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나오며 '끝'이라고 말한다. 터너의 그림이 있는 이곳이 718번 전시실, 바로 뒤에 딱 하나 남은 방 719에 <공원에서의 대화>가 있는 게 분명한데, 이미 이 직원들이 불을 꺼고 문을 닫은 모양이다. 내 머리로는 '게인즈버러의 그림을 봐야 하니 저 방에 들어가고 싶다'라고 외치고 있는데, 입에서 '게인즈버러'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 대신에, "719번 전시실이 저기 있어요?"라고 묻는다, 싱겁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니 그들은 "yes"라고 부드럽게 말한다. 그러면 '게인즈버러의 그림을 보고 싶으니 불 좀 켜달라'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바보처럼 가만히 얼굴만 쳐다본다. 내 표정은 다급함으로 상당히 격앙되어 있을텐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곧 여자 직원이 ' but it's closed. We should be out of here"이런 식의 대답을 하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718전시실을 순순히 걸어 나온다.
우리 뒤로 여러 직원들이 전시실을 하나씩 소등하며 우리를 쫓아낸다. 9시 45분에 문을 닫으니 30분부터 관람객을 몰아내는 모양이다. 혹시 우리가 구석에라도 숨어들까 봐 의심이라도 하는 건지 바짝 뒤를 따라온다. 쫓겨나다시피 다시 드농관의 기나긴 복도를 총총 걸어내려온다. 중간중간에 난 창으로 내다보이는 밖은 이미 짙은 밤이다. 유리 피라미드의 금빛광채가 더욱 역력해졌다. 속으로는 게인즈버러 게인즈버러 게인즈버러라고 절규하고 있지만, '이 순간의 모든 것이 황홀하다'는 말도 안 되는 모순을 몸소 겪고 있는 중이다. 내 뒤로 하나씩 불꺼져가는 드농관 1층, 밖으로는 눈부신 어두움 속에 화려하게 빛나는 유리 피라미드, 우리는 루브르의 마룻바닥에 발소리를 울리며 퇴장한다. 오늘 여기서 보낸 5시간 남짓한 시간들이 기억 속에 번진다. 첫 40여 분은 방향도 못 잡아 쩔쩔매며 우왕좌왕. <모나리자>를 중심으로 방향을 감지한 이후로는 봐야 할 그림들을 찾아다니느라 종횡무진. 점점 제대로 그림들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즐거움. 포기할뻔한 순간에 발견해낸 <니케>와 그 충격적인 우아함.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사진을 찍고, 보고 또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어안이 벙벙. '카페 몰리엔'의 테라스에서 선사받은 붉은빛 어두움이 내려앉는 루브르 전경. 막바지에 떠 오른 터너와 게인즈버러를 찾아 복도 끝에서 끝으로 달려가던 그 순간의 급박한 기대감. 바로 눈앞에서 게인즈버러의 그림을 못 보고 떠밀려 나온 어리바리함. 이 모든 것이 기쁨이다. 아쉬움은 언젠가 다시 드농관으로 나를 불러들이는 합당한 이유가 되어 주리라 믿으며 확실히 행복해하기로 한다.
폐관시간의 루브르, 텅빈 공간에서의 특권을 누린다
나폴레옹홀에는 마지막 관람객들이 우르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향하고 있다. 지쳐 보이는 이가 없다. 우리처럼 이들 모두 오늘 루브르에서 보낸 시간들을 아름답게 간직하며 또다시 올 날을 기약하고 있으리라. 유유히 들어갔던 유리 피라미드의 입구는 이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탑승객들을 내려놓는 타임머신의 출구가 되었다. 현재로 귀환하니 파리의 밤하늘은 새까맣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금빛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은빛 같기도 하다. 루브르도 유리 피라미드도 저만치 앞의 카루젤 개선문도 달빛과 조명 빛을 한데 빚어 화려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드농관을 빠져나와 다시 나폴레옹홀
유리 피라미드로 올라서면 현실의 파리로 돌아간다
찬란한 과거와 아름다운 오늘을 오가게 하는 문, 유리 피라미드
뭔가가 먹먹해져온다. 가슴은 따뜻하게 차오른데 눈시울은 차가워진다. 평생 처음 맞이한 루브르에서의 시간들은 실로 대단했다. 그림 속을 헤집고 다니며 내가 아는 그림을 눈으로 쓰다듬고 처음 보는 그림에 빨려 드는 경험, 이 같은 일은 내 인생의 '사건'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의 나는 분명히 이 사건이 생기기 이전의 나와 달라졌다. 숙소까지 걷기로 한다. 밤 10시를 향해가는 리볼리거리, 관광지 한복판이지만 이젠 제법 한적하다. 무서운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법도한데, 하나도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다. 루브르에서 보낸 시간의 감흥이 연장되고 있다. 감격, 감동, 설렘, 기대, 흥분, 행복 등등 모든 종류의 좋은 기분이 우리의 발걸음에 남아 있다.
루브르를 남겨두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파리의 밤이 부드럽다
이대로라면 밤새도록 파리를 쏘다닐 기세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른다는 위험한 생각을 억누르며 애써 차분히 숙소로 향한다. 파리에서의 밤이 또 하나 흘러가고 있다. '내 집'에 들어가 어서 내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이 더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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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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