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다이어리(그림으로 쓰는 일기)

eternity
- 공개여부
- 작성일
- 2023.4.17
올 때마다 감격하게 되는 미술관, 국제갤러리.
이 여유롭고 세련된 공간. 디자인적으로 완벽한 건축물은 기본이라고 말한다. 자연스러운 야외 공간까지 한품에 거느리고 있어 이곳은 각박한 대도시의 본질에 어긋난다. 세 채의 전시관을 들어갔다 나오면서 햇빛과 바람을 만나게 되어 있고, 아담한 한옥 공간을 가까이에 두어 고즈넉함이 어떤 분위기인지 알려 준다.
매번 전시도 공간적인 탁월함에 버금간다. 국내외의 굵직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걸리고 그들의 명성을 대변하는 양질의 작품들이 당연하게 선보인다. 더욱 놀라운 점은 무료 전시라는 사실!
올해로는 처음으로 찾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쳐서는 안 될 두 사람의 이름. 바로 이우환과 알렉산더 칼더! 장-미셀 오토니엘의 (자그마한)전시 Wonder Block도 (16일까지)진행중이다.
K1, K2 그리고 K3 전관 (K3 앞의 정원까지 포함)에 전시를 여는 경우는 특히 '볼만한' 행사임을 말해준다. 이 두 예술가의 콜라보 전시는 아니지만, 분명 같은 기간에 나란히 있어도 서로 거슬림이 없는, 공통분모가 없어 보여 되레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내포하고 있는 병치 juxtaposition이다.
4월 4일에 시작되어 5월 28일까지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번 전시는 거의 모든 날짜의 모든 시간대가 매진되어 있다. 부지런히 움직여 네 번 관람하도록 준비를 해 두었고, 동행할 가족과 친구들에게 크나큰 선물을 해주는 것 같아 뿌듯하다. 4월 12일 첫 방문. 관람 전 사전 정보를 최소한만 챙겼기에 기대 속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분명 이우환의 회화 <선으로부터>와 <점으로부터> 연작은 없다. 재작년인가 작년인가 프랑스 아를에 마련된 이우환의 공간을 대표하던 '관계항' 연작을 국내에서 나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관계 relation / relationship'과 사뭇 다른 '관계항 Relatum'을 이우환의 작품에서 알게 되었다. '관계'는 규정지을 수 있는 반면 '관계항'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쌍방향적인 양자 또는 다자 구도보다 작품을 이루는 각각의 요소들과 작품을 대하는 관람객 한 명 한 명에까지 직접성과 주체성이 부여된다. 관람객으로서 나는 어떤 '주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K1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벽, 그저 하얗고 다만 검정으로 이름과 기간을 적어놓았을 따름이다. 1950년대 말부터 지금껏 작가가 주도해온 '모노하' 운동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번 전시의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늘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1번 방. 두 개의 벽을 아우르고 있는 큰 투명창으로 봄의 시간이 가득 그려진다. '관계항'의 주재료이자 주요 요소인 돌과 철판이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자연을 대표하는 돌 natural stone과 산업 사회를 상징하는 철판 steel plate. 본질상 이질적이며 질감도 형태도 대립적이기 마련이다.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짙은 색감과 유려한 휘어짐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철판. 몇 개는 철판 뒤에 가지런히 숨어 나오기 자체를 꺼려 하고 자그마하고 동그스름하여 도저히 상대할 만하게 보이질 않는 돌덩이들. 제목은 <Relatum - a Corner>이며 코너가 아닌 공간의 한복판을 혼자 차지하고 있어 철판의 앞 옆 코너에 조그맣게 놓인 돌덩이에서 수수께끼를 풀어보게 된다. 철판의 코너를 돌면 네 개의 돌덩이가 나타나는 모습에 제목을 갖다 붙여보기도 하고.
이우환의 이렇게 담백한 그림은 처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드로잉이다. 회화 연작 <Dialogue>과 연계된 드로잉이라는데 <선으로부터>나 <점으로부터> 연작과도 닮았다.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검정과 회색의 굵은 점 내지 면은 한 번에 찍어둔 느낌이 난다. 흘러가는 구름을 뭉게뭉게 풀어놓거나 가느다랗게 늘어뜨린 것 같은 선들도 끊어지지 않았다. 돌과 철판의 앙상블처럼 대비를 이루면서 은근한 여유를 전달한다. 아무것도 없는 여백에서 오히려 팽팽한 그 무엇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빈 것은 채워야만 한다는, 뭐든지 비어두면 안 된다는, 채움에의 강박이 밀려들면서도 천천히, 여유 있게...라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호흡이 스며든다. 점과 선의 'dialogue'이면서 일상의 나와 작품 앞의 나 사이의 'dialogue'가 이루어진다. 단순한 번잡함을 벗어나 밀도 높은 멈춤을 배워보라 권한다. (내 시선에 맨 오른쪽에 있던 드로잉이 내 화면에는 잡히질 않았다. 다음 관람 때 이 사라진 작품부터 찾아야겠다)
드로잉의 맞은편, 조명이 확 낮아지며 동굴에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Relatum - The Kiss>.제목 그대로 눈에 보인다. 두 개의 돌덩어리가 맞닿아 있고 각각을 둘러싸고 있는 쇠사슬도 부분집합을 그리며 바닥에 놓여 있다. 이 역시 'dialogue'라 할 수 있겠다. 묵직한 강철판의 이미지를 벗고 은색에 가까운 빛을 발하며 부드럽게 엮어진 쇠사슬에서 일종의 감미로움마저 느껴진다.
K1을 벗어나 K3과 K2로 가는 길. 늘 산만해진다. 모던한 건물 내부에 있다가 도시의 흐트러진 공기를 흡입하게 되는 순간, 정작 관심을 끄는 것은 한옥스러운 것들이다. 고급스러운 서점, 진열장 앞에서 오늘도 유혹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내친김에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책에 대한 욕구는 지식욕일까 소유욕일까 아니면 과시욕일까. 몇 가지 관심이 가는 장서들... 가격이 엄청 센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서점의 담벼락에 우르르 떨어져 있는 돌. 이우환의 돌의 연장선일 수도 있고, 한옥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장- 미셸 오토니엘의 채색 벽돌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겠다. 한옥관은 말 그대로 한옥의 한 켠을 전시공간으로 삼고 있다. 바깥 길보다 몇 걸음 아래로 내려서면서 나지막한 지붕과 함께 다정다감한 공간으로 초청받는다. 나무 이름도 꽃 이름도 모르지만 그 색과 향, 바람과 햇살에 가만가만 흔들리는 자태에 경직된 모든 것이 해체된다. 이왕이면 한옥답게 미닫이문이면 좋을 텐데. 차가운 쇠고리를 잡아당기며 유리 문으로 방에 들어선다. 내가 격렬하게 좋아하는 블루와 핑크의 눈부신 물결... 작년 6월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에서 마주했었던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 인기가 폭발하여 대기 시간도 길고 직사각형의 덩그런 공간에 그저 나열해둔 상황이라 그의 예술적 뉘앙스를 충분히 살펴볼 수가 없었었다. 오늘의 공간도 이 다섯 개의 놀라운 블록 기둥이 본색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멀리서부터 파랑의 물결과 핑크빛을 띤 붉은 너울거림에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며 한 걸음씩 다가와야 할 텐데. 들어서자마자 확, 내가 달려들며 스스로 움찔하는 바람에 은은한 광택에 서서히 잠겨드는 의식을 치를 수가 없다. 한옥의 창호 문과 모던의 첨단에 서 있는 재료가 충돌하는 동시에 서로를 흡수하며 빚어내는 오묘한 매력이 있긴 하다.
K1을 나와 마당 같은 공간 여기저기에 한눈팔다 보면 자연스레 K3에 들이닥치게 된다. 왜 K2가 K3보다 더 안쪽에 자리하고 있을까?!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세 개의 건물동과 서점과 방 한 칸짜리 전시실을 갖고 있는 한옥 건물 등 국제 갤러리 전체의 구조를 따져 보면 답이 나온다. K1에서 나오면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한옥관 옆으로 걸어가면 K3으로 가는 길이 되고, 한옥관 앞을 지나면 K2로 바로 가게 되어 있다. 결국, 서점 앞을 지나가느냐 뒤로 가느냐에 따라 K2와 K3에 닿는 순서가 달라진다. K2와 K3도 (사시사철 나무, 풀, 꽃으로 운치 그득한) 정원과 아기자기한 골목길로 서로 이어져 있어 사실 어디에 먼저 들어가야 하느냐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 관람객들은 K1-한옥관-K3-K2로 이동한다.
어쨌든, K1에서 보았던 이우환의 세계는 K3의 이층으로 뚝 떨어져 다시 이어진다. 돌과 철판, 점과 선, 여백과 공명, 다소 거칠고 차가운 텍스처와 묵직한 고립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헤어져 나오질 못했고 그렇다고 완전히 빠져든 것도 아닌 상태에서 ... K3으로 들어가면 알렉산더 칼더라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작품과 공간의 케미라는 측면에서 K2는 칼더의 것이야 한다. 관계항으로 공백과 울림을 전달하는 이우환의 작품에는 바깥공기와 자연 채광이 차단될 수 있는 K2의 이층이 제격일 것이다.
국제 갤러리의 매력 중 빠뜨릴 수 없는 포인트, 바로 K2 앞에 차려둔 정원. 짙은 나무 패널로 벽을 쌓아 주위의 콘크리트를 차단하는 동시에 하늘과 나무를 직접 연결 지으며 내가 자연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이끈다. 아담한 공간이지만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어 전시와 어우러지는 예술의 묘미가 확장되는 실로 극적인 시공간이 마련된다. 여기에 올 때면 항상 파리의 '들라크루아 미술관'의 정원을 떠올리게 된다. 들라크루아가 손수 가꾼 공간으로 여기처럼 나무 벽채가 높다랗게 올려져 있어 오직 하늘과 나무 그리고 나 자신만을 둘러보게 된다. 푸르름이 한창이던 4월 말, 나무들 사이에 앉아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았었다. 여기 K3의 뜰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오늘처럼 정원 자체가 탁월한 전시마당이 되어줄 때는 더욱더 그리하다. 자연 채광에 드러나 있어서일까. 이우환의 철판에 붉은 기가 더해 보인다. 원래 뜰에 깔려 있는 조각 돌로 다져 놓은 사각 공간 위에 비슷한 사각형의 철판을 올렸는데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형상이다. 이유인즉 철판 아래 돌 하나를 넣었다. 제목은 <Relatum -Dwelling (A)>. 이 관계항은 더 직접적이다. 크지 않은 돌 (300 x 350 cm) 하나가 꽤 널따란 철판의 하중을 받쳐 주며 작가의 의도대로 '존재'하게 한다. 또는 제목 dwelling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돌 하나가 널찍한 철판을 지붕 삼아 안전하게 '거주'하고 있다. 받쳐주는 힘, 덮어 주는 너비, 그러면서 서로 맞닿으며 이심전심이 발생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일지도. 철판은 거울을 닮았다. 4월 중순의 바람결에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투영된다. 아직 여물지 못한 풀과 잎이 후드득 떨어져 철판에 스며든 햇살 기운 속에 노곤히 나뒹군다. 이 작은 공간에 잠시 '살아보며' 다른 차원의 생각과 감정에 물들어 보는 것, 그지없이 좋다.
깊은 종소리가 울린다?! 철이 이번에는 묵직한 원통으로 떡하니 서 있고 조금 길쭉해 보이는 돌 하나가 이 원통에 바싹 기대어 있다. 강철로 된 이 원통은 속이 텅 비어 있고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방금 들은 종소리 외에 숲속의 새, 비와 천둥, 산속의 개울이 만드는 자연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Relatum -The Sound Cylinder>는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인공의 철과 자연의 돌의 관계를 더 극명히 드러낸다. 관계에는 '울림'이 있고 이 울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사방으로 전달된다. 많은 것들이 연결되는 '열린 세계'를 보고 듣는 것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간이 좀 더 환해진다. 전구 하나가 대롱 매달려 있고 이를 중심으로 데칼코마니 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다.< Relatum -Dialogue>에서 두 개의 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K1에서 보았던 <Relatum -The Kiss>와 비슷하게 돌 주위 바닥에 일부가 겹쳐진 포물선이 있지만, 여기에는 쇠사슬이 아니라 차콜 드로잉으로 되어 있다. 전구는 물론이고 돌을 올려둔 나무 바닥도 작품의 일부이다. 빛과 선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돌의 대화에는 돌의 본질적인 차가움과 딱딱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푸근하고 따뜻하여 무슨 비밀이든 다 터놓을 수 있고 무슨 사연이든 다 넉넉하게 들어줄 것 같다. 앞서 작품에서 계속 들려오는 소리가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어 나는 내부 공간에 있지만, 돌이 이끄는 외부의 자연으로 열린다. 혼자 있지만 닫혀 있지 않고, 타자로서의 존재를 향해 열린다.
이우환의 '모노하'의 절정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는 하얀 텅 빈 캔버스 말이다. 분명히 물질적으로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없기에 (그려지지 않았기에) 정신이 활발히 움직이게 된다. 뭐지? 뭘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품' 앞, '없음'은 침묵을 유도해야 할진대 이 하얀 캔버스를 향해 자꾸 생각을 하게 되고 이야기를 추려내게 된다. 어두워진 조명 덕분에 텅 빈 캔버스는 빛이 날 정도로 투명해지고 그 앞에 덩그러니 놓인 돌덩이는 흰 캔버스 위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돋울 수 있다. < Relatum-Seem>에는 반듯하게 설치해 둔 커다란 흰 캔버스가 무대가 되어 돌과 관람객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끈다. 돌이 매개자가 되어 관람객은 무언의 빛을 향해 말을 걸게 된다. 한편, 돌은 흰 공간에 그대로 드러나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든다. 이를 구경하는 관람객 역시 이 상황을 통해 무언가를 알려 하고 생각하며 말하고자 한다. 모두가 서로에게 보이는 동시에 모두를 서로 바라보며 모두가 함께 관여하고야마는 공존이 빚어진다.
사실, 단순한 게 어렵다. 적을수록 더 많이 알고 싶어지고 이런저런 내 맘대로의 해석을 갖다 붙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알아지는 게 없어 난감하다. 이우환의 모든 것에는 The Less is the More이 맞는 것 같다. 드로잉이든 조각이든, 철이든 돌이든 선이든 점이든 극도로 제한된 재료와 표현 일색이다. 그러면서도 '관계'와 '관계항'을 내세우며 자꾸 연결시키고 오버랩시키고 부대끼며 '만나게' 한다. 솔직히, 갤러리 측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작품 하나하나가 '무한'을 표현하고 있는 메타포'로 선뜻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저 말갛고 깨끗하게 단순화된 공간에서 말쑥하게 정제된 예술을 듬성듬성 대해보는 것... 이 자체로 나는 이우환의 세계가 좋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게 별로 없는데 충만함을 느낄 수 있고, 많은 것을 본 것 같지 않은데도 벅찬 감정이 올라오는 상황.... 이 자체로 나는 이 시공간을 가치롭게 여기며 오래오래 지니고 살 것이다. 전시해설 자료에 실린 이우환의 글을 수차례 읽어본다. 여러 겹으로 압축되어 풀어 헤쳐보는 것이 쉽지 않은, 꽤 어려운 말이다. 철판을 어우르고 돌을 매만지며 예술가로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들려주는 그 이야기에 진심을 다해 나의 귀와 마음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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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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