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8일 en Paris(2018)

eternity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12.7
루브르를 하루 만에 다 둘러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소장품이 5만점이 넘고 225개의 전시실에 고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유물과 예술품이 약 3만 5천 점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도 지하 2층부터 지상 2층 까지이고 드농관, 쉴리관, 리슐리외관으로 'ㄷ'자형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세 개의 관마다 구조가 가지각색이라 어디가 출발점이고 어디에서 관람이 끝난다고 결정할 수 없는, 한 마디로 미로이다. 미리 보아야 할 작품을 정하고 위치를 대충이라도 파악해서 관람의 동선을 짜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저 헤매다가 지쳐 포기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보고 싶은 작품도 제대로 못 보고 다리와 발바닥이 몹시 아파 다른 일정에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수 있는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면 '제대로 계획해서 입장해야 할 곳',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다.
금요일 밤 9시 45분까지의 연장 오픈을 이용(수요일도 동일 시간으로 연장 오픈함) 하여 오후 시간에 한 번 방문, 일요일(루브르는 첫 번째 일요일 무료입장이 아니다)에 한 번 방문했다. 이유는 하나, 되도록 관람객이 적은 쾌적한 분위기를 노렸다. 관광객은 주로 오전에 대거 입장하므로 오후가 될수록 비교적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지 않겠나. 금요일 4시 30분경 입장했는데 차차 시간이 지나며 관람객 수가 확실히 줄어들어 8시 무렵에는 그 넓은 드농관을 마음껏 활보했다. 모나리자 앞에서 독사진도 찍었고 <민중을 이끈 자유의 여신> <메두사의 뗏목> <나폴레옹의 대관식> 등 인기 있는 대형 그림 앞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사진을 여러 짱 찍었다. 물론 그림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거나 홀의 중앙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올려다보거나 이쪽저쪽에서 남의 방해받지 않고 남을 방해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 <니케의 여신상>에서 출발하여 드농관의 가장 끝방인 718호 직전까지 쭉쭉 걸어가며 딱 한 점(토마스 게인즈버러의 <공원에서의 대화>)을 제외하고 보려고 했던 작품들은 다 보고 사진도 찍었다. 잊을 수 없는, 두고두고 행복해할 내 인생의 주요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루브르 드농관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http://blog.yes24.com/document/10776114
첫째 일요일에 루브르를 가야 하는 이유도 '쾌적하고 여유 있는 관람'을 위해서이다. 오르세 퐁피두 오랑주리 등 파리 시내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매달 첫째 일요일'에 무료 개장을 하기 때문에 어디 가든 관람객이 넘칠 것이다. 무료인 대신 몰려 드는 인파로 인해 '제대로 된 감상'은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느라 지칠대로 지치지 않을까? 어쨌든 첫째 일요일에는 무료 관람처들로 사람들이 몰릴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루브르는 한산할 수 있고, 나는 이미 가장 인기 있는 드농관을 둘러보았기에 일요일에는 리슐리외관과 쉴리관을 찾으면 더욱더 여유 있게 관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운 좋게도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각 관람실을 담당하는 직원들과 눈인사를 하기도 했고, 갑작 뭔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아 주위를 둘러보니 그 큰 방에 아무도 없어 좀 무섭기까지 했다. 대부분 짙은 색감에다가 어마하게 큰 그림들이 나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이런 상황을 자각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꽤 으스스하다. 출발은 리슐리외관 800번 방부터. 조각보다는 회화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2층만 쉴리관까지 한 바퀴 돌겠다는 각오로 시작한다. 아는 그림 앞에서는 설명도 꼼꼼 읽고 사진도 찍지만, 계획에 없던 그림들은 아쉽지만 그냥 눈길 한 번씩만 주면 스쳐 지나야한다. 저마다 이름은 있는데 관심받지 못한채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림들에게 미안했다. 800번에서 864까지 갔다가 다시 801로 들어왔다가 803~811 ~825~ 835~ 909 ~917~931~944 이런 식으로 정말 한걸음 한 걸음 이 모든 길을 걸었다! 중간중간에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곳도 자주 있어 그야말로 헉헉거리게 되는 강행군이다. 1층의 <앙젤리나>에서 점심 먹으며 휴식을 취한 후, 바로 곁의 <나폴레옹 3세 아파트>를 둘러보고 지하 1층과 지하 2층의 조각 갤러리까지 둘러보는 데에 총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더 섬세하게 관람한다면 6시간은 족히 걸렸을 텐데, 루브르 외의 다른 일정도 있다 보니 거의 날림식으로 그저 한 바퀴 돌며 작품들을 눈에 담는다는 식이었기에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도 보고자 했던 그림이 저만치 모습을 드러내자 가슴이 콩닥거리고 바로 그 앞에 섰을 때 오감으로 압도해 밀려오는 기쁨에 휘청인다. '예술이 주는 희열'은 이 정도면 기대 이상 대만족이었다고 자평한다. 관람을 마치고 차분히 앉아 내가 찍은 사진과 내가 공부하던 책을 펴놓고 다시 살펴보고 떠올려보니 그림 앞에서의 감동이 배가 되어 생생히 돋아온다.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는 즐거움이다. 너무 많은 그림들이 있었고 그림마다 너무 값진 이야기들이 스며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찍어 온 사진들을 넘겨보고 내가 공부한 책을 펴는 것밖에 없다. 누구이든 미술에 관심이 있어 루브르를 찾는다면 한 권의 책으로 사전에 공부하고 관람작품리스트를 준비하는 것으로 충분히 깊이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오래오래 기억으로 지식으로 남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며, 더 충분히 준비하여 또다시 가보리라는 결심을 (나처럼) 하게 될 터. 다리는 후들후들 아파오지만, 살아 처음 만나는 대작들과 명작들 앞에 서면 눈에서 감격의 불꽃이 튀어나온다.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국적 성별 나이 상관없이 시간과 자원을 동원하여 이 그림들을 보리라고 달려온 모든 이들은 저마다 만족해하고 경탄에 빠져들며 그 순간의 경험에 행복해한다. 그래서 루브르 어디를 가든지 미소 가득하고 기쁨에 젖은 얼굴들이다.다른 박물관과 미술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테고.
렘브란트의 자화상들.가장 보고 싶었던 노년의 자화상<이젤앞자화상>은 수정작업을 위해 임시철거ㅠㅠ
<앙젤리나>도 계획하고 찾았는데, 한참 점심시간은 지난 터라 참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보는 즐거움에 덧붙여 먹는 행복함이 절정에 달하며 여행하는 내가 너무 뿌듯했다. 에너지를 충전하여 향하는 곳은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루이 16세의 시대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나폴레옹 3세는 거처를 베르사유가 아닌 이곳 루브르로 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아파트'라는 명성이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는데, 나의 상식을 뛰어넘는 극치의 화려함이었다. 하루라도 왕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유치한(아무 소용없는) 상상을 해 보게 된다. 모든 것이 금빛을 뒤집어썼다. 천장의 구석구석까지 최상의 장식이고 가구 하나 하나마다 평범함은 불허한다. 비록 화려함이나 번쩍번쩍 장식이 나의 취향은 아닐지라도 눈으로 보고 그 사이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라는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다. 저기에 앉아 책을 읽으면, 저기에 누워 잠을 자면, 저기에 앉아 친구들을 만나고 저곳에서 식사를 하고 저 그릇으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 이런 (부질없는)생각뿐이다. 동영상까지 찍고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게 된다. 화장실 가는 길목 복도에 덩그러니 세워 둔 화장대조차 고귀함이 묻어난다. 촌스럽지 않은 화려함, 천박하지 않은 사치를 엿보며 걸어보는 시간이었다.
시간과 체력을 고려하여 2층의 회화 전시실과 1층의 나폴레옹 3세 아파트만 둘러볼 계획이었는데(이것만으로도 이미 에너지 고갈을 부르는 스케줄), 나폴레옹 홀에서 통한다는 메트로 역을 찾아 내려가다가 지하 1층의 조각 전시실에 닿게 되었다. 리슐리외관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마를리 Le Cafe Marly>에 대한 설명을 보다가 마를리는 말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을 위시한 깜짝 놀랄정도로 거대한 조각 작품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위로는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유리(아마 옥외의 작은 유리 피라미드 아래가 바로 이곳 조각 갤러리일 것) 천장이고, 하얀 대리석과 옅은 노란빛을 내는 건물벽과 바닥, 군데군데 설치해놓은 큰 초록 화분 등이 어울려 있다. 그저 아름답다. 거대한 공간감을 주는 동시에 평온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엄청 넓고 높은데도 아늑할 수 있다니, 어쩌면 태어나 처음 접하는 느낌이다. 갖가지의 색채를 선보이는 수많은 회화 작품과 금빛-붉은빛 위주의 휘황찬란한 나폴레옹의 아파트를 보고 온 후라 그런지, 이곳의 단아한 분위기에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며 (뒷일정에 상관없이) 한켠에 앉고 싶어졌다. 새하얀 밀가루 반죽으로 버무린듯한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자아내는 조각들이다. 그 결을 따라 한번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관람객들의 경우를 보니 살짝 터치만 해도 요란한 경고음이 울리는 듯했다. 아~여기 유리천장으로 내려오는 햇빛 속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사각사각 연필을 굴려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이 루브르 전체가 너무 부러워졌다.
어떻게 갔는지 동선이 생각나지 않지만 (길을 잃고 헤매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 한층 더 내려간듯한데 또 광활한 조각 공간이 나온다. 안내지도를 보면 나폴레옹 홀로 내려가는 지하 2층 출입구 바로 앞이다. 여기도 별세계, 신세계이다. 역시 유리천장으로 햇빛이 내려오고 우아하면서 거대한 조각 작품들이 시선을 끌어당긴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무슨 쉼터 같기도 하고 희한할 만큼 여유로운 분위기가 쫙 깔려있다. 아무데나 걸터앉든 털석 내려앉든 무조건 한 템포 쉬어갈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 자신의 스케치북을 놓고 바닥에 앉아 자신이 원하는 석고상을 본떠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저절로 '예술 안에서 노닐다'라는 컨셉속에 내가 있음을 발견한다. 묘한 흥겨움과 평온함 가운데 여행자의 시간적 한계를 뼈저리게 아파한다. 마지막 발걸음을 떼며 한 바퀴 돌아본다. 두 주먹을 단단히 쥐며 결심한다. 다음번(분명 내년 상반기!) 파리에 오면 반나절은 반드시 이곳 조각상들 사이에서 보내겠다고. 얇은 방석 하나, 책하나, 노트 하나 들고 가장 맘에 드는 조각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을 것.
일요일이라 드농관으로 더 많은 관람객들이 입장하는 듯하다. 모두들 기대에 들떠 혼잡함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곳을 공유하는 일종의 동지애가 느껴진다. 우리는 이제 담담히 루브르를 떠난다. 다음에 와도 역시나 조금은 헤맬 것이고, 이번 여행 동안 이곳에서 보았던 작품들이 잘 있나 또 찾아볼 것이다. 이번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쉴리관부터 찾아야겠다. <밀로의 비너스 Venus de Milo> <앉아있는 서기관 Le scribe accroupi> <대형 스핑크스 Grand Sphinx> <함무라비법전 Code of Hammurabi>등 알고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작품들을 찾아가고, 그 사이에 또 보고 싶은 작품들의 리스트를 강화해서 하나씩 찾아내는 '행복한 유랑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 확신한다.
역피라미드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 메트로 1호선 7번 출구까지 걸어간다. 프렝땅백화점 분점을 비롯 꽤나 유명한 숍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다행이었다. 나는 쇼핑에 큰 관심이 없고 이번에는 파리를 출발로 하여 빈과 바르셀로나까지 가야 하는 일정상, 짐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 파리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물욕'의 소강이다. 걸어 다니며 보고 싶고 알고 싶고 발견하는 것이 더 좋아 웬만한 물건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두 손이 무거우면 마음도 곧 비틀어져 여행자체가 힘겨워진다. 집에 돌아가서도 돈을 아끼게 되었다. 뭐 하나 살까 싶어도 이 돈을 아껴서 나중에 여행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멋진 곳에서 멋진 경험을 하자라는 생각에 금방 물욕이 소멸한다.
여행, 다녀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 삶의 현장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일구어낸다. 좀 더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모색하게 하고, 좀 더 스스로에게도 기특한 성향을 갖게 되고 무엇보다도 일회성이 아니라 다음을 기대하는 벅찬 야심으로 생활 곳곳에서 더 성실해진다. 책으로 '예술-역사-장소-사람'을 알아가며 여행을 준비하고, 책에서 배우고 알게 된 것을 여행에서 만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최상의 삶의 방법인 것 같다. 여행을 꿈꾸며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여행을 하며 더 넓은 사람이 되고, 여행을 다녀와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된다.
루브르박물관 역시 두 차례의 방문 모두 일초 일초가 행복했다. 낯선 만큼 신선하여 내 눈에서 광채가 뿜어 나왔고, 연이은 감탄과 감동으로 정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드농관의 마룻바닥을 스치며 삑삑 울리던 내 운동화 바닥 소리가 생생하다. 특히, 드농관에서 밤 9시 30분을 넘어 직원이 이제 나가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할 때까지 정신없이 나다니던 시간들 동안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호기심을 연속 발동하며 걸핏하면 놀라고 걸핏하면 감동하던 더 나은 내 모습, 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요일 한적했던 리슐리외관의 지하 1,2층에 드넓게 자리한 조각 갤러리를 오갈 때 느꼈던 평온과 여유를 잊을 수 없다. '언제나 살아 움직이며' 찾는 이를 향해 넉넉한 기품을 나누어주는 조각들이야말로 '예술의 위대함에 숙연해지는 것'이 무엇이지 가르쳐 주었다.
내 여행의 그리움이 한 겹 더 쌓인다. 이 그리움을 자양분 삼아 '여기, 지금'을 더 용감하게 부지런히 살아내고자 한다.
읽고 또 읽으며 루브르순례를 준비했다. 이 한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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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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