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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
- 작성일
- 2022.3.27
내게 남은 삶이 한 시간뿐이라면
- 글쓴이
- 로제 폴 드루아 저
센시오
생각해 본 적 없고 생각하기도 싫지만 한 번 용기를 내어 상상해보기로 한다. 오늘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내게 남은 삶이 한 시간뿐이라면?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었을 때조차 곧 죽음이 들이닥치리라 믿었던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매우 당황할 것이 뻔하다. 주어진 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그 천금 같은 (아니, 돈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짧은 여생을 허비할 가능성이 높다. ‘죽음’에 관한 오래되고 반복된 나의 사유는 죽음의 문 앞에서가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져서 강 건너 불구경한 셈이다. 하지만 죽음과 직면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철학자는 어떨까? 철학 교수이자 철학 평론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급하게라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 한다. 진지한 생각의 유희에 빠진 후 스스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바로 글을 쓰기로 한다. 과연 철학자답다. 글쓰기를 선택하기로 한 것은 저자에게는 죽음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이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저자의 기록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교훈이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주어진 시간의 종말을 앞두고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글을 써야겠다. 누군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은 내용이다. 죽음을 앞두고 명예욕에 휩싸여 자신(의 사상)을 포장하는 일은 헛된 일이다. 저자가 철학자답게 정직하게 ‘죽음 상상 게임’에 임한다면 그 어떤 가식도 위선도 없으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많은 부조리와 역설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생각할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소멸을 확신하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것, 아는 척하지 않고 전달하는 것, 이런 모순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 얽힘 속에서 나아가는 것을 봅니다.” (본문 p.85)
저자 스스로 거품을 터트렸으니 비판도, 동의도 없이 그저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행복한 부지함과 무력한 앎. 분노라는 부질없는 감정.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행복. 수많은 생각과 욕망이 공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죽음 이후에 대한 무지. 소멸과 계승으로써의 삶과 죽음. 무지에 대한 찬양. 결코 닿을 수 없는 진리. 사랑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 증오가 세상을 지배하지도,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면서, 증오를 수용하는 법. 빛과 어둠의 공존. 인간의 위대한 광기. 무한한 자연 앞에 먼지에 불과한 우리의 불안. 그리고 저자의 개인적인 유언과 남기고픈 묘비명.
죽음 앞에서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 같지만 사유의 대상들은 실로 철학적이다. 그러나 표현 방식은 철학적이기보다 차라리 문학적이다. 함축과 은유, 생략된 근거로 가득 찬 글에 논리적 분석을 통해 접근하면 궤변 충만한 아무 말 대잔치로 읽힐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죽음을 한 시간 앞둔 철학자의 글이라는 점을 계속 상기해야만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친절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이리저리 곱씹어보면 수긍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분명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다는 것 >이다. 예상했던 대로 철학자인 저자는 ‘죽음’을 앞두고 끝까지 ‘삶’을 말했다. 사후의 삶을 없다고 가정하고 삶의 끝자락에서 (의사는 부를지언정) 성직자는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실로 철학자답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침묵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철학의 한계인 것 같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외면’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증명될 수 없으므로 ‘요청’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비록 철학자의 머리를 물려받지 못한 나이지만 철학자의 피는 흐르기에 죽을 때까지 철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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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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