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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ay] 아는 여자 (2d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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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여자> (2004)

- 도둑과 전봇대가 말해주는 사랑 -




 로맨틱한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고 호젓한 가을 산길을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남녀. 서로에게 보내는 애틋한 눈길과 마주잡은 두 손, 누가 봐도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이다. 그 위로 남자의 독백이 이어진다.


‘사랑은 새벽길을 산책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아침 숲길을 걸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사랑은 세상 그 무엇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진부함과 상투성으로 똘똘 뭉친 대사가 끝나자마자 여자는 남자에게 이별을 선고하고 남자는 흥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여자에게 낙엽을 모아 던지고 쌍욕을 한다. 하지만 그 장면은 모두 남자의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 남자는 이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말한다. ‘그래.. 그만 하지 뭐.’




<아는 여자>




 장진 감독 필모그래피 13편(단편 포함) 중 유일하게 남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인 <아는 여자>의 오프닝을 이루는 이 장면은 ‘장진식 코미디’의 전형적인 톤을 보여주는 시퀀스다. 장진 감독의 2004년 작품인 <아는 여자>는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므로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좀 어색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여기서 ‘어색하지만’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장진 감독은 이 영화 안에서 두 주인공의 관계가 그야말로 과연 ‘로맨틱’한가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 주인공과 그를 오래 전부터 짝사랑해왔던 동네주민인 여자 주인공은 흔하게 되풀이 되는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 영화의 주인공의 수많은 전형 중 하나다. 남녀가 등장하고 서로의 성격, 계급 등의 차이로 인해 다투며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들을 거쳐 결국 사랑에 이르게 된다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설정에서부터 이어지는 진부한 로맨틱 장르의 설정들을 고스란히 (의도적으로) 답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끊임없이 회자되는 사랑에 대한 영화 속의 믿음과 낭만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현실에 귀착할 수 있는지를 ‘장진식’으로 보여주는 색다른 러브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




 90년대 이후 충무로에 등장해 꾸준히 만들어진 기획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대부분이었다. 자본이 크게 들지 않으며 남녀 배우의 인지도와 인기에 크게 의존할 수 있는 안전한 장르로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장르보다도 한정되어 있으며 상투적인 내러티브 때문에 갈수록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힘들어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맨틱 코미디는 의외로 시장이 좁으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기도 쉽지 않다. 이 영화 역시 개봉 당시 전국 관객 70만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 영화 <아는 여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온갖 정의를 모두 버무려 진부하지만 재미있는 사랑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구태의연한 질문, 사랑에 대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있는가 라는 물음에 장진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성적인 배경음악과 숲속의 오솔길, 눈 내리는 골목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 과거의 회상 장면, 남녀의 재회 등과 같은 수많은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의 온갖 전형을 모두 끌어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장진 특유의 대사, 캐릭터, 일상적이면서도 엉뚱한 에피소드들 덕분이다.  







장진's 스타일




 우선 이 영화를 이야기하거나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진의 다른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녹아있는 코드를 습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위트 넘치는 대사와 적절히 녹아든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유명한 장진식 코미디 뿐 아니라 장진 감독의 희곡 연출작인 <웰컴 투 동막골>과 2005년작 <거룩한 계보>에서도 동치성이라는 같은 이름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아는 여자>와 <거룩한 계보>에서 두 번 ‘동치성’을 연기한 배우 정재영은 장진감독의 페르소나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거기에 장진 감독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조연과 엑스트라들을 알아보는 재미 역시 장진 감독 영화의 팬들에게 허락된 즐거움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은 <아는 여자>의 이연(이나영 분)이 커피숍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커피숍의 한 켠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있는 한 동호회가 나오는 장면이다. 아이디 분홍복면님의 기조연설을 청해 듣는 이 진지한 동호회는 조금 후 동치성이 대출 상담을 받고 있던 은행을 터는 강도떼로 등장한다. (이 은행강도 장면은 장진 감독의 2007년작 <바르게 살자>에서 역시 주인공 동치성(정재영 분)이 은행 강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연마하는 비디오 장면으로 삽입된다.) 이렇게 장진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장면들을 교묘하게 뒤섞는 잔재미를 비롯해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요소들을 이용해 모두가 인정하는 ‘장진식 스타일’을 완성해 냈다.




배우의 힘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와 공감도는 여주인공의 매력도와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아는 여자>의 이나영이 연기한 한이연이라는 캐릭터는 보통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과는 약간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동치성이 애인에게 헤어지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날 아는 선배의 술집에 가서 술을 먹고 취해 잠들자 술집 바텐더로 일하고 있던 이연은 술에 취한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고 자신을 어떻게 데려왔냐고 묻는 동치성에게 ‘봉투에 담아서 데려왔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다음 컷에서 더욱더 천연덕스럽게 이연이 잠든 동치성을 진짜로 봉투에 넣어 등에 지고 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동치성과 이연이 함께 간 극장에서 동치성은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난다. 이연을 가리켜 누구냐고 묻자 동치성은 망설이다 ‘그냥.. 아는 여자’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극장 안에서 이연은 서운한 듯 동치성에게 묻는다. ‘그냥 아는 여자.. 많아요?’ 동치성이 ‘그 쪽이 처음이에요, 한 명 밖에 없어요’라고 대답하자 비로소 이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또 동치성이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마지막 통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녀는 ‘원래 이륙할 때 전화기 꺼야 되는데 용케 하셨네요.’라고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건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멕 라이언이 흔히 보여주던 귀엽고 깜찍한, 성격도 있지만 섹시하기도 한 여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다. 이나영은 배우 본연이 지닌 신비로운 이미지에 세상사에 무심한 듯한 표정을 더하고 그 안에서도 사랑하는 남자의 일거수 일투족에 활짝 웃고 슬프게 우는 순수한 여주인공의 또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물론 상대역을 맡은 정재영과 장진 감독의 능력이 도움이 됐겠지만 주위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는, 전혀 예쁘지 않게 말하고 옷입는 ‘옆집 처녀’ 같던 한이연을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로 만든 것은 배우 이나영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나영은 이 영화로 그해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결국, 사랑에 관한 영화




 영화의 초반 애인에게 버림받고 곧이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동치성은 이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어냐’고 묻고 다닌다. 은행을 털러 들어갔다가 동치성에게 사랑에 관한 질문을 받았던 강도들은 경찰서에 잡혀가서 인터뷰하다 말고 ‘사랑에 빠지면 이름을 물어보고 나이를 물어보고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고... 사랑이 뭐 별건가’라고 말한다. 또 어떤 경찰은 ‘사랑하면 서로 죽고 죽이기도 하는 거다’라고 비장하게 읊기도 하고 동치성과 같은 야구팀의 선배는 ‘사랑이 기다리면 그냥 그리로 가면 된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이렇게 장진은 자신이 사랑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의를 이 영화 안에 쏟아 넣는다. 그 중에서도 장진의 사랑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동치성의 집에 숨어들었던 젊은 도둑이다. 동치성에게 잔뜩 훈계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젊은 도둑이 밤에 함께 누운 아내에게 ‘사랑이 뭔지 아느냐’고 묻는다. 아내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우리집도 컴퓨터 사고 인터넷도 깔고 신문도 좀 보면 좋겠구만..’이라고 말한다. 그런 거 없으면 사랑이 뭔지 모르냐고 도둑남편이 되묻자 아내는 그저 ‘사랑해’ 하면서 남자에게 안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동치성에게 남긴 말은 ‘도둑이라서 잘은 모르지만 사랑, 그냥 사랑하면 사랑 아닙니까.’였다. 그가 장진이 말하고 싶은 사랑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신분도 나이도 경제적 차이도 모두 떠나서 그저 ‘사랑한다’고 느끼면 되는 것.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랑을 위한 동화’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치성과 이연이 처음으로 극장에서 함께 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연인들(이연과 동치성, 그리고 전봇대가 주연으로 등장하는)의 허무맹랑한 러브스토리처럼. 사랑은 그렇게 유치하고 진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며 행복한, 살아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장진이 말하는 사랑




 동치성은(장진은) 결코 국어사전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찾아보지 않는다. 그는 사랑이란 것은 글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이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쉽게 믿지 않고 의심한다. 그에게 이연은 사랑일지도 몰랐지만 그에게는 죽음이 사랑보다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그는 자신에게 확정되어 있던 죽음이 떠나고(시한부 선고가 의사의 실수라는 것을 알고) 죽음의 허무를 목격하게 되면서(한 여자의 교통사고를 목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곁에 와 있던 삶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연을 향해 뛰어가는 동치성의 머리 위로 전봇대의 전선을 타고 (사랑의) 불꽃이 따라간다. 영화 속 허무맹랑한 사랑을 비웃었지만 결국은 자신도 그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음을,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부한 사랑에 대한 냉소를 삶에 대한 애정과 웃음으로 뒤바꾸는 장진의 전략이다. 사랑이란 누구나 쉽게 정의할 수 있는 흔해빠진 감정이지만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듯이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 역시 진부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더라도 그것이 얼마든지 새롭게 변주될 수 있으며 가장 좋은 건 직접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장진의 실험정신은 서플먼트에 있는 <아는 여자> 낭송회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사를 '낭독'하고 영화음악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이런 형식의 작은 공연.


영화의 부대공연 식으로 많이 활성화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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