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북북리뷰

shinwk1
- 작성일
- 2013.4.29
그리스 비극 걸작선
- 글쓴이
- 소포클레스 외 1명
숲
<그리스비극 걸작선>은 그리스 비극 3대 작가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2편씩 엄선한 6편을 수록한, 옮긴이 천병희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 정도만 읽어도 그리스 비극이 무엇인지를 개관할 수 있는 용도에 충실한 책, 그야말로 걸작선이다.
나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이 책의 쓸모를 덧붙이고자 한다. 그리스 고전 읽기는 보통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부터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일리아스>부터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초심을 끝까지 이어가기 위해서는-기대와는 달리 친절하게 서사시의 전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호메로스에게 가지게 되는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동시에 혹은 곧이어 그리스 비극과 사귀어야 한다고. 서사시 이후 비극작가들의 섬세한 배려를 읽어야 하는데, 이 책 걸작선에 실린 세 작가의 몇 편의 작품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는 신과 인간의 관계, 신과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핵심어인 미망(迷妄)이란 단어를 중심으로, 비극의 역할을 소개하고자 한다.
“치욕을 꾀하는 미망(迷妄)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223~224행. 아르고스 시의 노인들로 구성된 코로스 들은 극이 시작되면,
10년 만에 귀향하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무슨 사연으로 아내와 그 정부에 의해 살해될 운명인지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는 노래를 하는데, 그 중의 한 대목으로, 유명하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사전의 해석으로,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맴.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착각인데, 이것이 자기 생각으로만 머물 때는 괜찮은데, 실행에 옮기는 동안, 자신은 물론이고 관계된 이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긴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1천 척의 백을 거느린 함대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지도에서 보듯 아울리스 항에서 트로이아로 가려면 남쪽으로 만을 빠져나온 다음에 동북쪽으로 바다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리스인들이 보레아스라고 부르던 북북동풍이 불어와 그리스에서 에게 해를 건너 동북쪽의 트로이아로 돛단배를 타고 항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그래서 이들에게 는 역풍이 되는 것. 역풍을 순풍으로 바꾸려면 아르테미스 여신의 노여움을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그러나 자기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가멤논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복종치 않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오.
그러나 내 집안의 낙인 자식을 죽임으로써
제단 옆에서 이 아비의 손을
딸의 피로 더럽힌단 말이오.
그 어느 것인들 불행이 아니겠소?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저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코로스가 들려주지만 아가멤논이 하는, 자신의 고뇌를 담은 말이다. 깊은 슬픔에 잠겨 고민했다. 그러나 딸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활이다. 여기까지는 아가멤논에게 미망 어쩌고 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운명에 휩쓸리다보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에서 그의 마음 상태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보자,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불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정확히 아가멤논의 미망은 본인만이 아니라 주위 관계들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단계로 전이된다. 앞서 인용한 유명한 2행이 이어지는 대사다.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는 말이 있지만, 속담은 속담이고 한번 실수는 늘 다음 번의 실수들에 대해 양심의 가책마저 무디게 만든다는 점에서 용납해서는 아니 된다. 딸을 그렇게 제물로 바치고도 아폴론 신의 사제의 딸을 탐하고, 명예 운운하면서, 미운털이 박힌 아킬레우스의 전리품 여인을 데려가는 등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은 자신이 제물로 바친 딸 또래의 아가씨들, 탐한다. 말은 여인들 자체가 아니라 명예의 상징으로서의 전리품 분배에 대한 얘기라지만, 여자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왜 그들이 그곳 트로이아에 와 있고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거기에 이르렀는지를 망각하게 되는 게, 그것이 바로 미망이고 미망의 결과로 더 큰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이아>에서는 미망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가?
<오뒷세이아> 4권에서 이 미망이라는 단어가 두 번 등한다. 한번은 헬레네 스스로 하는 말로, 자신이 남편과 딸을 저버리고 파리스를 따라 트로이아로 간 것은 미망 때문이라고 하는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멤논 일행과 귀향길에 올랐던 아이아스가 거친 파도에서 살아남은 것이 신들의 배려인 줄 모르고 잘난 체 하다가 포세이돈의 응징으로 죽게 되는 바로 그 부분이다. 영웅들의 기품 있는 삶만을 조명해야 하는 <일이아스>에서는 쉬쉬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이나,
아이아스는 트로이아 점령 당시 캇산드라를 겁탈하여, 아테네 신의 노여움을 불러와 전우들의 귀향에 어려움을 주는 그 아이아스다.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돌아왔으나 곧바로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그의 귀향은 영원히 이뤄지지 않았다 라고 볼 수 있다. 메넬라오스는 18년 만에, 오뒷세우스는 20년 만에 귀향을 하게 되는 것도 이 아이아스의 철없는 본능에 이끌인 욕정 때문이다. 미망은 이렇게 무서운 재앙을 낳는 불씨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 치명적인 실수를 반성하지 않고, 까부는 행위 자체가 미망으로 신들은 이를 용서하지 않는, 결과적으로 이중 삼중 사중의 중첩된 처단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하긴 덕분에, <오뒷세이아>란 고전을 우리는 얻게 된 셈이지만..
걸작선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미망(아테)'과 '오만(히브리스)'은 그리스 고전을 이해할 때 핵심어이다. 그 교과서 격인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페르시아 인들>. 아이스퀼로스비극전집 해설에서 옮긴이 천병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미망(아테)과 히브리스(오만)를 설명한다.
"미망(Ate)은 히브리스(hybris, 오만)와 더불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개념이다. <페르시안 인들>에서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인 다레이오스의 혼백이 나타나 사건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페르시아 군세의 파멸은 분수를 모르는 오만, 즉 히브리스의 결과이며, 이러한 히브리스의 의미는 자연의 질서를 바꾸어 바다를 육지로 만들고 강력한 선교(船橋)의 사슬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제압하려 했던 크세르크세스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는 것. 히브리스 못지 않게 <페르시아 인들> 앞 부분(93행)에 나오는 아테(Ate) 역시 아이스퀼로스 비극에서 세계 해석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양대 서사시의 사건들이 왜 그랬는지, 특히, <오뒷세이아>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응징, 시달림, 재난)의 관계가 아테와 히브리스 관계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다가온다. 그리스비극걸작선은 양대 서사시를 읽는데, 필독서이면서, 그리스 비극을 개관할 수 있는, 서사시와 비극의 가교 역할을 하는 책이다. 양대 서사시의 완독을 위해서 그리스 비극은 꼭 친해져야만 하는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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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